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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나라의 해상운송시스템

by 중은우시 2010. 3. 28.

글: 용엄(龍掩)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황제에 정식 등극한다. 그리고 남하하여 남송과의 전쟁계획을 세운다. 이때 남송은 임안(지금의 항주)등지를 점거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통로가 필요했다. 남방의 식량을 북방으로 운송해야 했다.

 

몽골인들은 말을 타고 자란 유목민족이다. 육지에서 전쟁를 해왔었다. 그러나, 남방으로 진군할 때는 아주 총명하게 해양을 이용하였다. 그들은 남송을 배반한 해군을 받아들여, 규모가 방대한 해양전함을 확보하고 대형해양화물선을 보유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또 다른 겉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할 것같은 경로 즉, 해적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해외무역로를 개척하여 해상식량운송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갖춘다.

 

장강에서 바다로 빠지는 지역에 몇개의 섬이 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이 숭명도(崇明島)이다. 숭명도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수비는 쉬우나 공격은 어렵다. 13세기에 이미 송나라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해적의 천국이 된다. 13세기중엽, 이 곳에는 두 명의 유명한 해적이 있었다. 바로 주청(朱淸)과 장선(張瑄)이 그들이다. 이들은 무리를 모아서, 소금을 팔고, 부호의 배를 약탈하였다. 많을 때는 해적이 천명에 가까웠고, 배는 5백척이었다. 그들의 활동범위는 남해에서 북으로는 교동반도와 내주만에 이르렀다. 나중에 송철종에게 초안(招安)된다.

 

1273년, 주청과 정선은 남송을 배반하고 원나라수군의 중요한 역량이 된다. 주청은 대리관군천호의 무관직을 받는다. 3년후, 두명의 전직 해적은 새로운 임무를 맡는다. 남송의 창고에 든 물건을 운송하는 것이다. 그 해, 원나라는 임안을 점령하고, 남송에서 투항한 신하들은 승상 바얀에게 남송의 국고에 든 자료, 도표, 제사기구를 모조리 원나라의 수도인 원대도로 옮길 것을 건의한다. 이를 가지고 송사를 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회동지역은 여전히 남송의 장수들이 점령한 상태였다. 그래서 바얀은 해상운송을 생각한다. 그는 이 임무를 주청과 장선에게 맡기고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육년후, 대운하를 통하여 북경으로 오는 양식이 줄을 잇게 된다. 그러나, 대운하를 통한 운송은 비용이 비쌌다. 바얀은 그리하여 1276년에 해상을 통하여 운송하는 것을 생각한다.

 

바얀은 이 방법을 쿠빌라이에게 보고하자, 쿠빌라이는 서로 다른 조운방안에 대한 이해득실을 따져본 후 승상 바얀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60척의 해선을 건조하도록 명령하고, 해상상황을 잘아는 선원을 대거 모집하고, 주청, 장선을 해도운량만호에 임명하여, 해상운송을 책임지게 한다.

 

1282년, 원나라정부는 60척의 배를 건조완료한다. 주청과 장선의 주재하에, 조운선은 지금의 강소성 태창현 유하에서 양식을 싣는다. 큰 배는 1000석을 싣고, 작은 배는 300석을 싣는다. 50척의 배는 모두 4.6만석의 양식을 운송했다. 선단이 항구를 떠난 후, 양주를 지나, 해문현동쪽의 황련사저와 만리장탄을 지난 다음 서북으로 항행하여 등주고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계속 서진하여 지금의 해하구에 닿는다. 전체 항해일정은 4개월여에 이른다. 양식은 1283년 3월에 북경에 도착한다. 그 양은 대단했고, 이것은 멋진 시작이었다. 이번 항해로 해상운송의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당시 장황(張晃)이 시를 하나 지었는데, "국초해운자주장, 백만누선도대양(國初海運自朱張, 百萬樓船渡大洋, 나라초기에 해상운송은 주청 장선에서 시작했다. 백만의 선박이 큰 바다를 건넜다)"라고 읊었다. 이것은 당시 해상운송의 상황이다.

 

출항의 성공으로 원나라통치자들은 해상운송을 더욱 중시하게 된다. 지원20년(1283년), 조운선 2000척을 건조하게 한다. 지원22년(12285년) 다시 3000척을 추가한다. 이 배들은 모조리 조운양식운송에 동원된다. 해상운송의 수량은 매년 증가하여 지원27년(1290년)에 이르러 양식의 연간운송량은 159만석에 이른다.

 

이때 쿠빌라이는 일본과 점파(占婆, 월남 남부)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많은 배와 선원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의 경제력으로는 대량운송에 적합한 평저선을 건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인과 해적들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한 해상항해를 하도록 결정한다.

 

이 정책은 상인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상인들이 많이 참여해서 양식운송은 사상유례없는 성공을 거둔다. 반세기동안, 해로는 원나라대도로 양식을 공급하는 주요 경로였다. 1341년에는 최고봉에 이른다. 양식운송수량이 360만석에 이른다. 이는 중국역사상 유례가 없는 숫자이다.

 

1287년, 주청은 누강(지금의 유하)를 준설하여, 유가항 해도에서 직접 천진까지 갈 수 있도록 한다. 주청, 장선의 두 사람의 수하에 있는 선원들도 이 곳으로 이주한다. 조용하던 작은 마을이 하룻밤만에 번화한 항구로 바뀐다. 유구, 일본, 고려의 상선들도 이 곳으로 와서 무역을 한다. 그리하여 유가항은 "육국마두(마두는 항구라는 뜻임)"라는 명칭을 얻는다.

 

당시에 사인이 바다로 나가서 장사를 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일반 발견되면 모든 재산이 몰수된다. 그러나, 주청과 장선이 보낸 상선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역은 조정고관의 묵시적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청과 장선의 두 사람은 스스로 지폐를 인쇄하였는데, 국가에서 발행한 지폐와 비교하면 약간 검었을 뿐이다.

 

두 전직 해적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리하여 일본, 고려 및 동남아국가와의 무역에서 적지 않은 이윤을 얻었다. <<원사.식화이>>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을 뽑아서 외국으로 가서 여러 물건을 교역하게 했다. 얻은 이익은 10로 나누어 7은 관청이 가지고 3은 무역업자가 가졌다." 이를 보면 70%의 이윤은 국가에 납부하고, 30%의 이윤은 상인이 가졌다.

 

주청, 장선의 두 사람의 권력은 금방 해상에서 육지에까지 확대된다. 그들은 중국동남부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권세있는 사람이 된다. 1280년대에 태창에는 100여명의 고관이 탄생하고, 12명이 만호후에 이른다. 64명의 천호, 40명의 백호가 있다. 그중 대부분은 주청, 장선 두 사람의 자식 조카와 친척이었다.

 

주청 본인의 권력은 더욱 커진다. 원대덕4년(1300년), 그는 강남행성좌승으로 승진하고, 원나라의 조운대권을 장악한다. <<속자치통감.원기>>에서는 "문중과 친척에 고관이 수두룩했고, 집이 천하에 퍼져 있었다. 거대한 배가 여러 외국과 교역을 하고, 가마와 말이 항구를 가득 메웠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자주 관리들이 그들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다를 종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원나라통치자는 두 사람을 발호를 처벌하지 않을 뿐아니라, 공고를 내서, 조정은 그들을 완전히 신임한다고 선언한다. 당시 쿠빌라이는 승상 완택에게 말한다. "주,장 두 사람은 큰 공을 세웠다. 짐의 고굉지신이다. 경들은 끝까지 그들을 보호해주어라."

 

1303년, 쿠빌라이의 아들 테무르가 병이 심해져서, 황후가 섭정한다. 어떤 사람이 이 기회를 잡아 주,장 두 사람을 역모로 고발한다. 역모는 당시에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황후는 조서를 내려, 주청, 장선 및 그 가족을 북경으로 압송하도록 명한다. 주청은 화가나서 자살하고, 장선과 그의 아들 장문호 처형당한다.

 

그후 주,장 두 사람의 재산은 해상의 선박, 육지의 토지와 집안의 보석을 포함하여 모조리 국고로 귀속된다. 두 사람의 재산처리를 위하여, 조정은 흠차대신을 보낸다. 두 사람은 생전에 부가 엄청났으므로, 숨은 재산을 모두 추적조사하는데만도 6년이 걸렸다.

 

비록 주청과 장선은 처형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지만, 원나라통치자들은 전통적인 역모죄로 처리하지 않았다. 구족을 멸하지 않은 것이다. 더더구나 그들과 무역했던 다른 사람들은 연루시키지 않는다. 조정은 복잡한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원나라에 있어서, 해상운송로는 완전히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장 두 사람의 가족과 부하들을 풀어주면, 해상무역활동에 익숙한 이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해상으로 양식운송을 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간에 조정은 다시는 그렇게 큰 권한을 주지 않는다. 두 사람이 죽은 후, 조정은 해운을 관청에 귀속시킨다. 주청과 장선의 시대에는 해상무역을 관리감독하는 관리가 최소한 4명의 만호후, 24명의 천호가 있었는데, 그들이 죽은 1년후에는 평강로(지금의 소주 부근)의 책임자는 해상운송임무를 접수한다. 행정절차를 대거 간략화하여, 다루가치 1명, 만호 2명, 부만호 3명만 둔다. 천호는 지역별로 구분하여 11곳으로 하여 다루가치, 천호, 부천호만을 둔다.

 

기구설치는 개선했지만, 해상무역운영측면에서는 정부가 예전의 주청, 장선이 하던 때만큼 할 수가 없었다. 운송량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는 부득이 개인의 선박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1309년 북경에 기근이 발생하여, 정부는 급히 20만석의 쌀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운송이 쉽지 않았다.

 

절강지역의 관리가 올린 보고서에는 이런 곤경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전에 주청과 장선이 해상양식운송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매년 운송량이 45만담(擔)에서 서서히 100만담으로 늘어났고, 운송하는 선박도 많고 운송비도 공평했는데, 1309년에 이르러서는 세수가 번잡하고 가혹해서 개인선주들이 곤경에 처했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속속 숨어버린다. 그러다보니 양식을 운송할 배가 부족하게 되었다. 선박수량을 맞추기 위하여 관리들은 할 수 없이 복건등지에서 선박을 징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관리는 동시에 감포의 양씨가족이 선박을 보유하고, 수로에 익숙하다고 보고하면서 조정에서 감포 양씨로 하여금 해상운송 만호를 맡게 하면 그들의 해상운송경험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해상운송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상황은 몽고통치자들로 하여금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해상운송을 관청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맞는 방법인가?

 

1310년, 아마도 장선의 손자가 청구하였거나, 아니면 북방의 기근으로 인한 시급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거나 장선의 가족을 조정이 다시 기용한다. 결론적으로, 이 해에 황제는 주청과 장선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장선의 장남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무역을 관장하게 한다. 그렇지만, 양식을 운송하여 기근을 구하는 것은 이미 늦어버렸다.

 

1310년, 양식을 안전하게 천진항에 운송한 후, 황제는 흠차대신을 천진으로 파견하여 해신낭낭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다. 그리고 해신의 선단에 대한 보우에 감사한다. 다음 해, 주청의 똑똑한 부하 한 명이 성공적으로 800척의 선단을 조직하고, 2,773,266석의 쌀을 북경까지 성공적으로 운송한다. 이때 운송한 수량은 엄청났다. 지금 보더라도 기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원나라통치자는 해상운송의 복잡성을 인식한다. 다시 해상운송관리의 직급을 올려준다. 명신 유관의 기재를 보면 조정이 그들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관리들은 호두금패를 달고 다닌다. 바깥을 나갈 때 3,4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 있고, 모든 도시의 관리들은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

 

주청과 장선의 이후에 또 다른 유명한 해적가족이 조정의 품에 들어온다. 바로 감포의 양씨가족이다.

 

양씨가족은 송나라때부터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그 중심인물인 양발(楊發)은 주청, 장선과 함께 남송의 초안을 받았다가 다시 배신하여 원나라에 투신하였다.

 

1277년, 쿠빌라이는 송나라를 본받아, 현재의 닝보, 상해와 감포에 3개의 시박사(市舶司)를 설립한다. 이것은 모두 양발의 관할하에 들어간다. 양씨집안은 바로 해염현 감포진으로 옮겨간다. 4년후, 이곳은 동남아의 중요상품집산지가 된다.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폴로가 감포에 와본 적이 있다. 그의 여행기에 '이곳에는 아주 좋은 항구가 있다. 그래서 인도로부터 온 화물선이 항상 이 곳에 정박한다."

 

주청과 장선이 쫓겨난 후, 1311년, 감포양가등이 배를 가지고 있고, 조운을 잘 안다는 이유로, 양발이 해도운량도조만호에 임명된다. 그는 더 많은 해상운송의 무역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양발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양재(楊梓)가 그의 사업을 계속했다. 양재는 일찌기 일본 및 고려등과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1293년, 원나라군대를 따라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 남정에 따라갔던 양재는 해상운송로와 동남아의 풍토민속에 잘 알았으므로 선무사관에 임명된다. 대신 이크무수를 따라 군사항해를 책임진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온 후, 그 공으로 안무총사의 직위를 받고 나중에 항주로총관이 된다.

 

양재의 아들 양추(楊樞)는 중국의 저명한 항해가이다. 그는 페르시아만 부근의 호르무즈까지 간다. 이곳은 정화하서양의 주요목적지이다. 정화는 제3차항해때 비로소 이 곳에 도착한다.

 

양추의 중동행은 정화보다 111년이나 빨랐다. 1301년, 19살인 양추는 인도양으로 해외무역을 떠난다. 돌아올 때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에 정박했을 때 페르시아 하찬왕이 파견한 사신인 나회등과 만난다. 나회는 1303년 중국에 도착한다. 대도에서 원성종을 만난 후, 다시 양추의 해선을 타고 페르시아로 돌아가겠다고 요청한다. 원나라는 양추를 충현교위, 해운부천호에 임명하고, 금부를 찰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에게 관리신분으로 나회일행을 귀국하는데 호송하게 한다.

 

1304년초, 양추는 나회일행을 호송하여 출발한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폭풍이 그들의 항로를 방해한다. 1307년이 되어서야 선단은 비로소 안전하게 호르무즈항에 도착하고 사명을 완수한다.

 

조정의 해상무역독점이 타파된 후, 해상무역은 발전을 이룬다. 이에 종사하는 상인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양씨가족은 특히 돈을 잘쓰기로 유명했다. 그들은 사원에 보시를 하고, 불경을 인쇄하였다. 양씨집안이 만든 사원은 절강과 강소에 널리 분포되었다.

 

비록 원나라통치자들은 상인들의 해상무역확대를 허가했지만, 최대한 몽골인들이 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려했다. 주청과 장선의 부하는 조정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고, 양씨집안의 해상공간은 갈수록 협소해졌다. 양재는 희곡창작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집안에 100여명의 배우를 기른다. 언제든지 그가 새로 쓴 극본을 공연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에 이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원나라때 요동수의 <<동교사어>>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양씨집안의 노비들은 남북의 노래에 능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해염의 소년들은 노래와 악부에 능한 자가 많았는데, 모두 감천의 양씨집안출신이다."

 

그가 창작한 희곡중에는 양씨가족의 불만이 담겨있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고려경덕불복로(下高麗敬德不伏老)>>는 당나라의 명장 위지공이 쫓겨난 후 다시 기용된 일을 적었다; <<승명전곽광귀간>>은 서한 때 대사마가 황실에 충성을 다하고 생전에 힘을 다하여 보좌했는데, 사후에도 영혼이 흩어지지 않고 귀신이 되어 간언한다는 내용이다. 비록 이들 희극은 중국의 정통희극의 방식을 따라서 충군사상을 선양하는 것이지만 그 속에 암암리에 불만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양씨가족이 주청과 장선의 지위를 대체했다. 그러나, 원나라통치자들은 그들에 대하여 더욱 엄히 감시했따. 양씨집안의 유일한 권력은 해상무역을 진행하는 상인을 소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청, 장선과 같은 고관대작을 받지도 못했고, 주청, 장선이 쫓겨난 후에 비로소 중용되었다. 그러나, 주,장씨가족과 달랐던 점이라면, 양씨가족의 호화로운 생활이 원나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개국황제인 주원장이 그들을 제거했다.

 

원나라 통치자는 상인을 장려하여 해상운송에 종사했다. 사전에 고액의 운송비를 지급해주었다. 이런 운수체계는 보통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요역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 정부로서는 관료구조를 늘여서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대의 양법(一代之良法)"이라고 불렀다. <<원사>>에는 "백성들은 수송에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고, 국가는 재물을 가득 쌓아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청, 장선이 제거된 후의 일부시기를 제외하고는 원나라가 이 정책을 계속 시행했다. 해적과 상인을 이용하여 양식을 운송한 것이다. 원나라 통치자가 해상상인을 모집한 것은 조선업을 대거 발전시킨다. 1294년, 건조한 최대의 선박은 1000담의 쌀을 실을 수 있었지만, 해상운송이 많아지면서, 선박의 적재량은 갈수록 커졌따. 1314년, 최대의 선박은 8000에서 9000담의 쌀을 실을 수 있었다. 가장 적은 배도 1,2천담은 실을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선박의 적재량에 크게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운을 장려하는 동시에, 원나라통치자들은 육상운송도 잊지 않았다. 항운을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1289년, 원세조는 회통하를 건설하게 한다. 동평로 수성현(지금의 산동성 동평)에서 임청에서 어하에 연결된다. 전체 길이가 250리이다. 거기에 갑분이 31개였다. 2년후, 곽수경의 건의하에, 쿠빌라이는 다시 280여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통혜하를 건설한다. 원나라정부는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의 적재중량에 제한을 두었다. 상인들이 건조한 선박은 점점 300-400료(料)에서 심지어 500료까지 늘었다. 이는 조정이 상인들에게 고액의 운송비를 지급하고, 상인들에게 선박건조를 장려한 결과이다. 그러나 악영향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선박이 너무 많아서, 대운하의 선박운송속도는 계속 느려졌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원나라의 해운정책이 명나라에 승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나라에 이르러, 유가항과 감포라는 예전에 번성했던 해외무역항구는 조용해지고, 사람들에게 잊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