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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나라 멸망이후의 몽골역사

by 중은우시 2012. 3. 1.

작자: 미상

 

1368년, 100년도 버티지 못한 원나라는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군대에 멸망한다. 요(遼), 금(金), 서하(西夏)등 소수민족정권과는 달리,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순제(元順帝) 토환테무르(妥歡帖木兒)는 전사하지도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다. 왕족과 잔여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조상들이 살았던 옛땅인 몽골고원으로 돌아갔다. 중국에 외래정권을 설립했다가 온전하게 철수하는 '기적'을 완성했다. 이것은 아마도 징기스칸이 시작한 거의 미친 듯한 확장으로 몽골제국의 영토가 광활하고, 칸국과 부락이 수없이 존재하고, 원나라의 판도는 몽골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하고, 원나라의 황제는 몽골제국의 칸이면서, 몽골의 다른 각 칸국과 부락에 대하여 종주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의 "멸망"은 몽골제국이 중국영토를 상실했다는 것일 뿐이고, 몽골제국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원순제는 원나라 황제중에서 드물게 한문화와의 접촉이 깊었던 사람이다. 대도(大都)가 함락되고 황망히 북으로 도망가야했던 타격은 그에게 지극히 컸다. 그러나 그의 '고국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去國懷鄕)"의 우수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명나라군대가 그를 계속 공격하자 그는 더더욱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370년 5월 23일, 그는 비분과 우울 속에서 사라무룬(沙拉木倫)강변의 응창(應昌)에서 사망한다.

 

원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愛猶識里達臘)는 부친이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 하라허린(哈拉和林)에서 즉위한다. 그는 원나라정권을 8년간 유지한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병마를 이끌고 언젠가 중국황제의 자리에 다시 앉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바램을 실현할 기회가 없었을 뿐아니라, 몽골지역으로 깊이 쳐들어오는 명나라군대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1372년, 명나라의 장수 서달(徐達)은 군대를 이끌고 하라허린으로 향한다. 이 곳은 몽골 황금가족의 대본영이다. 즉, 권력과 영광의 상징이다. 일단 명나라군대에 함락된다면, 몽골제국은 세계에서 철저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몽골인들의 저항은 아주 격렬했다. 다만, '만리장성'이라고 칭해지는 서달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다. 아유시리다라는 거의 절망에 처한다. 다행히, 명나라의 대군은 전선이 지나치게 길어지면서, 군수물자조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투라(土拉) 강변에서 진격이 저지되고 만다.

 

1378년, 아유시리다라는 유감을 가득 안고 사망한다. 그의 아들인 토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가 황제의 지위를 잇는다. 그는 세번째 북원의 황제인데, 지배하는 영토는 이미 몽골제국이 처음 흥기했을 때의 규모로 줄었다. 조상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이미 전혀 가능성이 없게 된다.

 

1388년, 10만명의 명나라군대가 장수 남옥(藍玉)의 지휘하에 하러카(合勒卡)강과 커루룬(克魯倫)강의 사이에 있는 베르(貝爾)호의 남쪽에서 토구스테무르의 군대를 패배시킨다. 북원의 여러 왕, 평장(平章) 이하 관리 3천여명과 군인 7만여명이 포로로 잡힌다. 토구스테무르는 도망간 후에 그의 부하장수에 의하여 목졸려 사망한다.

 

이번 실패는 황금가족 - 쿠빌라이가족의 북원세력이 몽골인들의 마음 속에서 지고무상의 지위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몽골부락은 북원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한다. 1399년, 예니세이(葉尼塞)강 상류연안에 분포한 키르지스(乞兒吉斯)부의 수령인 구이리츠(貴力赤)은 마지막 북원황제 어러보커(額勒伯克)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1399년 그를 격파하고 죽여버린 후, 각부를 통치하는 패권을 취득한다. 이렇게 하여 29년간 연명하던 북원정권은 멸망한다. 합법적인 몽골제국의 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몽골각부는 다시 몽골제국의 칸의 보좌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에 휘말려 든다.

 

북원의 멸망은 명나라로 하여금 정치적 적수를 상실하게 만든다. 몽골은 이미 '변환(邊患)'이 된다. 그러나 더 이상 전왕조의 잔여세력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락제는 구이리츠에 대하여 극도의 우호감을 표시하고, 그의 몽골각부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다.

 

다만, 구이리츠는 칸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1400년 아수트(阿蘇特)부의 수령인 아루타이(阿魯台)와 웨이라트(衛拉特)부의 수령 마하무(馬哈木)의 연합공격에 패배한다. 아수트부는 몽골화된 이란인이다. 기원은 코카서스족이다. 몽골의 서부정벌로 중국에 들어온다. 원나라군대에는 그들로 구성된 군단이 있었다. 웨이라트는 삼림몽골인중의 강대한 부락이다. 징기스칸시대에는 "임목중의 백성"이라고 불리웠고, 바이칼호 서안에 정착했다.

 

아루타이와 마하무는 모두 몽골제국의 칸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의 부족이 몽골인으로부터 독립하는 외에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이리츠를 패배시킨 후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다. 자신들은 다른 몽골제국의 칸을 노리는 부족과는 다르다고 표시한다. 이런 신복(臣服)은 명나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한다. 이런 지원에 의존하여 웨이라트부락은 패권을 바이칼호 서안에서 어르치스(額爾齊斯)강 상류에 걸친 전체 서몽골지역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아수트부와 웨이라트부의 몽골중부와 동부에 대한 통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이리츠의 아들인 어서쿠(額色庫)는 다시 굴기하여, 아루타이와 마하무와 칸의 보좌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려 한다. 쌍방은 십여년간 전쟁을 치르는데, 어서쿠가 1425년 병사할 때까지 계속된다. 

 

어서쿠가 아루타이와 마하무와 최고종주권을 놓고 다투는 동시에, 1403년, 북원의 마지막 황제 어러보커의 아들인 번야스리(本雅失里)가 자신의 칸위를 되찾으려 하여, 자신이 몽골제국의 칸임을 선포한다. 황금가족의 후손으로써, 번야스리는 아수트부와 웨이라트부보다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얼마 후, 아루타이를 포함한 각 몽골부락은 이 정통대표자의 편에 선다. 힘들게 쿠빌라이가족의 쇠망을 앞두었던 명나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새로운 몽골칸을 적대시한다. 영락제는 번야스리에게 명나라의 신하임을 명확히 표시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조상의 업적을 되살리려는 번야스리가 자신의 가족을 중국에서 몰아낸 주씨가족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영락제는 친히 군대를 몰고 몽골로 쳐들어가게 된다. 징키스칸의 옛땅인 어넌(鄂嫩)강 상류평원까지 진격한다. 1410년-1411년 번야스리와 아루타이의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번 실패는 번야스리에게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때문에 그는 칸의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1412년, 웨이라트부의 수령인 마하무가 기회를 틈타서 번야스리를 공격하여 격패시키고, 칸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전에, 마하무는 명나라 영락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몽골제국의 칸이 되었다. 그래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명나라와 단교한다. 이로 인하여 영락제는 다시 몽골 친정에 나선다. 비록 마하무의 저항에 명나라군대가 심각한 손실을 입기는 하였지만,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마하무는 군대를 투라강의 서쪽으로 철수시켜 휴식을 취한다. 마하무의 위신은 이번 침입으로 잠시 손상된다. 그가 명나라군대가 몽골초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하무의 도주이후, 칸의 보좌는 다시 비어있게 된다. 이때, 흥안령 동쪽, 만주변경에 거주하던 넌강부근의 커얼친(科爾沁)부의 수령 아타이(阿台)가 몽골의 중동부지역을 점령한다. 바람부는대로 방향을 바꾸는 아수트부의 수령 아루타이는 이번에는 아타이를 지지하며 번야스리를 죽인다. 그리고 아타이를 몽골제국의 칸으로 옹립한다. 커얼친부족은 징기스칸의 동생 하사르(哈撤兒)의 후손이고, 황금가족에 속한다. 비록 영락제가 웨이라트의 배반을 용납할 수는 없었지만, 몽골인들중 숭고한 명망을 지니고 있는 황금가족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다시 웨이라트부를 지원한다. 자연히 이번 지원을 웨이라트부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영락제는 시종일관 황금가족을 타도하고 웨이라트세력을 키워주는 정책을 썼다. 이것은 그가 죽은 후에 효과를 발휘한다. 1434년에서 1438년 사이에, 웨이라트 수령인 마하무의 아들 토환(脫歡)은 군대를 이끌고 몽골동부로 진격한다. 칸 아타이와 그의 중요한 중신 아루타이를 죽이고 칸의 보좌를 차지한다.

 

비록, 황금가족인 쿠빌라이가족의 왕자이자, 어러보커의 아들이며 번야스리의 형제인 아잔(阿占)이 이때 정통수령들에 의하여 칸에 옹립되었음을 선포하였지만, 사실상, 몽골제국은 이미 황금가족 - 쿠빌라이가족에서 웨이라트 - 춰로스(綽羅斯)가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명나라황제에 있어서, 징기스칸의 황금가족은 이미 끝났다. 초원의 새로운 군주는 혁혁한 역사가 없는 민족이다. 그들은 몽골제국의 역사상 혁혁하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황금가족처럼 지고무상의 명망과 호소력을 지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몽골인들의 중원에 대한 위협은 이로써 끝났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다만, 웨이라트인은 그들이 승계한 것이 몽골제국의 칸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록 표면상, 그들은 자신과 다른 몽골인들 특히 황금가족과의 거리를 멀리 했지만, 그들은 시시때때로 몽골제국의 원래 영토를 되찾고 싶어했다.

 

당연히, 명나라제국이 강대할 때는 웨이라트인들이 마음대로 호랑이수염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들은 조상 마하무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국을 회복하는 첫번째 칼을 동남쪽의 차카타이(察合台) 칸국으로 향한다. 토환의 아들 예센(額森, 也先)은 차카타이칸국의 웨이스칸(衛思汗)을 격패시킨다. 긜고 그의 여동생 하니무공주를 강제로 취한다. 웨이스칸은 황금가족이었으므로 이 혼인으로, 웨이라트인들은 모든 몽골인들을 부를 수 있는 혈통을 갖게 된다.

 

예센은 부친 토환의 칸을 이어받을 때, 몽골제국의 강역이 바르카스호수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넓어진다. 다시 바이칼호수에서 장성부근지역까지 확대된다. 정통을 상징하는 도성인 하라허린도 제국의 영토에 들어온다. 1449년, 그는 중국공주를 취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산서북부, 대동부근의 중국변경을 유린한다. 명나라의 영종 및 태감 왕진(王振)은 군대를 이끌고 맞이하여 토목보에서 전투를 벌인다. 예센은 명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명군 10여만을 섬멸하고, 영종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포위공성전에는 능하지 못하여, 예센은 방어시설이 되어 있던 대동과 선화는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리하여 영종황제를 포로로 잡고는 몽골로 돌아간다.

 

3개월후, 그는 권토중래한다. 북경서북부까지 진격한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의 명장 우겸의 저항에 부닥친다.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얼마후 명나라의 원군들이 각지에서 도착한다. 그는 수에서 밀리게 되어 거용관으로 철수한다. 1450년, 예센은 영종황제를 석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453년 중국과 화해한다. 자신이 중국의 신하임을 선포한다. 이런 행동은 그가 몽골제국의 종주권을 포기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독립된 칸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한 것은 총명한 행동이 아니다. 원래 그에게 신복하였던 황금가족의 부락과 칸국들은 다시 자립하게 된다.

 

1455년, 예센이 암살당한다. 예센의 아들 아마상츠타이지(阿馬桑赤台吉)는 부친의 칸을 이어받는다. 1456년 차카타이칸국을 침입한다. 이리강 부근에서 재위하고 있던 위누스칸(羽奴思汗)을 격패시킨다. 그러나 이때 황후 하니무(차카타이칸국 웨이스칸의 여동생)이 후방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그녀의 아들 이부라신과 예리야스의 두 형제가 아마상츠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 내란으로, 웨이라트의 실력은 심각하게 약화된다.

 

웨이라트인들의 실력이 약화될 때,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즉시 반격을 조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전쟁으로 서로 죽고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467년, 징기스칸의 제27대 계승자인 만두구러(滿都古勒)칸이 그의 조카손자 및 계승인인 보러후지농(博勒呼濟農)과의 전쟁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보러후지농은 칸을 칭하기 전인 1470년에 암살된다. 한때 사람이 많았던 황금가족에 지금은 겨우 5살된 사내아이만 남는다. 보허후지농의 아들인 다얜(達延)이다.

 

다얜의 운명은 아주 불행했다. 가족의 어른들은 모두 내분과정에 사망한다. 어린 아이 혼자서 외롭고 의탁할 데가 없었다. 그의 모친조차도 그를 버리고 개가한다. 이것은 마치 징기스칸이 어렸을 때의 처지처럼 쓸쓸했다. 다행히 만두구러칸의 젊은 미망인인 만두하이사이인커둔(滿都海賽音可敦)은 그를 자신의 보호하에 둔다. 만두하이사이인커둔은 대단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얜을 부양했을 뿐아니라, 1470년 그를 칸으로 선포한다. 가장 대단한 점은 만두하이사이인커둔이 여인의 몸으로 군대를 이끌고 웨이라트인을 물리친 것이다. 그들을 몽골중동부에서 철저히 몰아낸다. 다얜칸을 위하여 통치의 기반을 닦아주었다.

 

다얜칸은 몽골제국에서 통치기간이 가장 긴 칸이다. 1470년에서 1543년까지 꼬박 73년간이다. 1481년 친정한 이후, 다얜칸은 우익 투무터(土默特)인과 우량하(兀良哈)인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1497년에서 1505년까지 그는 요동에서 감숙에 이르는 명나라변경지구에서 아주 효과적인 일련의 공격을 진행한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웨이라트인과 연락할 수가 없었다.

 

1543년 다얜칸이 사망한 후, 그의 손자인 보디(博迪)가 칸에 오른다. 비록 광대한 영토가 다얜칸의 여러 자손들에게 나뉘어졌지만, 1544년에서 1634년까지 몰골제국의 칸의 지위는 다얜칸의 장남갈래 후손인 차하르(察哈爾)부에서 전승된다. 보디칸(1544-1548), 쿠등칸(庫登汗, 1548-1557), 두먼자사크투칸(圖們札薩克圖汗, 1557-1593), 처천칸(徹辰汗, 1593-1604)과 린단칸(林丹汗, 1604-1634).

 

비록 다얜칸의 장기통치가 몽골제국의 칸의 지위계승을 안정시켰지만, 몽골민족의 최대약점인 가족이 유산을 분할하는 관습법을 실행했다. 제국의 창건자가 죽은 후, 제국은 연방식의 가족국가로 된다. 국내의 각급 수령은 모두 형제 내지는 당형제이다. 그들은 비록 차하르부의 최고권리를 인정하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상태에 놓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하르부의 칸계승자들은 점차 전체 몽골을 통치할 역량을 상실한다. 서쪽의 웨이라트인과 동쪽에서 흥기하는 퉁구스(通古斯)인(만주족)은 모두 그들에게 두려운 적이었다. 다만 이 때, 웨이라트인은 카자흐칸국, 제정러시아국 및 내부의 춰로스가족과 허슈트(和碩特)가족의 권력쟁탈전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끝내는 것은 퉁구스인이 건립한 후금제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1604년, 린단이 칸의 지위를 승계한다. 황교(黃敎) 사르바후투크투의 가르침을 받아 린단투크투칸(林丹庫圖克圖汗)이라고 칭한다. 린단칸은 무능한 칸이 아니었다. 그는 일찌감치 후금제국의 몽골에 대한 야심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칸의 지위를 이어받은 때로부터 각부를 새로 통일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사십만 몽골민중을 통치하는 바투루칭기스칸"이라고 칭한다. 1627년, 우익 어얼도스(鄂爾多斯), 카라친(喀喇沁), 토무터등 각부의 항복을 받아낸다.  카르카(喀爾喀)부 췌투칸과는 연맹을 맺어 명성을 널리 떨친다. 관할지역이 동으로 요동에서 서로는 감숙에 이른다. 다만, 다음 해, 도얜우량하의 수부타이, 카라친의 다라이타이지, 투무터의 부스투칸, 어얼도스의 어런친지농 및 용세부, 아수티, 아바가, 카르카등 부족이 10만의 연합대군을 결성하여, 투무터의 소성(召城)에서 일전을 벌인다. 이때 린단한은 정예병력 4만여명을 잃는다. 그리하여 린단칸의 실력은 대거 약화된다. 그의 적은 몽골인의 용맹함과 한인의 모략을 고루갖춘 후금황제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이다. 그저 용맹하기만 하고 계교를 쓸 줄 모르는 그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누르하치때, 커얼친부, 자루트부는 혼인관계를 통해 후금에 붙는다. 투무터, 카라친, 우량하등의 부는 린단칸의 보복을 피해, 역시 후금에 의탁한다. 1625년, 린단칸은 넌강으로 출병하여, 커얼친부를 공격한다. 후금은 병력을 보내어 커얼친을 지원하고, 린단칸은 패주한다. 홍타이시가 즉위한 후, 린단칸을 주요 적으로 삼는다. 1628년, 패륵 아지거를 보내어 노하강 상류에서 린단한의 통치를 받던 카라친부와 연맹을 맺고, 린단칸을 함께 공격한다. 9월, 홍타이시는 친히 대병을 이끌고 춰로고르에 도착한다. 차하르부의 통제하에 있는 아오한, 나이만, 하르카, 자루트 및 카라친등 부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수령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린단칸은 칸의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이미 고립된다. 할 수 없이 시라무룬강 유역으로 물러나고, 귀화성(歸化城, 후허하오터)를 고수한다.

 

1632년 4월, 홍타이시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서진한다. 도르곤이 참전한다. 사라무룬강변에서 몽골의 여러 부의 병사들이 모여들어 린단칸을 함께 공격한다. 자신보다 세력이 훨씬 큰 적군을 보자 린단칸은 귀화성에서 사람과 가축 10만을 몰아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자 칸의 부하들 중 십중 칠팔은 도중에 흩어진다. 린단칸은 청해로 도망간다. 2년후 청해 타초탄에서 병사한다. 그는 죽기 전에, 아마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마찬가지로, "짐은 망국의 군주가 아니다"라고 탄식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재능은 그들이 조상의 영광을 재현할만큼 크지 못했다. 명나라제국은 몽골제국과 이백여년을 싸운다. 누구도 상대방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마지막에 10년도 간격을 두지 않고 차례차례 만청에 멸망한다.

 

1635년, 도르곤과 웨퉈등은 병력 만명을 이끌고 강을 건넌다. 린단칸의 부하, 처자식의 투항을 받아낸다. 린단칸의 처는 칸의 도장을 바친다. 전체 막남몽골은 완전히 후금제국의 판도에 들어간다. 몽골제국의 칸의 자리는 이로써 단절된다. 몽골제국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