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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몽골제국 굴기의 외부요인: 한족의 공성무기

by 중은우시 2011. 8. 22.

글: 정만군(程萬軍)

 

중세기는 '초원의 늑대'의 시대이다. 몽골제국을 최고봉으로 하는 초원부락의 무장세력이 세계를 종횡했고,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그들은 유라시아대륙에서 놀라운 전적을 창조했다.

 

인구가 100만에 불과한 초원부락이 무엇을 가지고 그들의 제국을 만들 수 있었을까?

 

몽골인들의 굴기를 얘기할 때마다, 주로 '전마(戰馬)'를 얘기한다. 맞다. 다른 부락민족과 비교하면, 몽골부락은 천연적인 우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량의 전마이다. 몽골민족은 말등에서 자란 초원의 유목민족이다. 거의 모든 성년남자는 그다지 훈련을 받지 않고도 우수한 기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마를 가지고, 기병을 가진 유목민족은 많다. 왜 그들은 몽골부락같이 확장하지 못했을가? 이를 보면, 전마, 기병은 그저 하나의 요소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내부와 외부환경에 '발효'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요인이다.

 

내부적인 '발효'는 더 말할 필ㄹ요가 없다. 세상이 모두 알고 있다. 이 부락에 뛰어난 우두머리 징기스칸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군사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천성적으로 군사에 대하여 깨달았고, '천호제(千戶制)'를 만든다. 부락편제를 타파하고, 모든 백성을 호구등기하며, 십호, 백호, 천호의 구조로 '군민합일'의 조직시스템에 포함시킨다. 이전의 부락귀족은 모두 백호장, 천호장의 신분으로 국가관리가 된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각급 '군사조직'은 무기, 마필과 식량을 휴대하고, 각급 지휘관의 통솔하에 전투에 참가한다. 70만의 '군민'은 바로 70만 몽골철기가 되는 것이다.

 

군사천재형의 우두머리와 군정은 몽골내부에서 '발효'한 주요 요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 '발효'도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이 '외부요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유목민족의 전투특징은 기동성이다. 그들은 처원과 평야에서 돌격작전을 잘한다. 그러나, 공성전은 잘 하지 못한다. 당시 송, 금 두 나라가 대치하고 있을때, 송나라가 수성을 잘했던 요인이 바로 이것이다.

 

'초원의 늑대'는 공격적이다. 공격할 때는 전쟁터를 그들이 고를 수가 없다. 그래서 공성은 그들이 반드시 넘어야할 관문이다. 금나라가 망하기 전에 몽골군과 전투를 벌일 때, 그들은 야전에서 돌격전을 벌이지 않고, 공성전으로 버텼다. 당시 금나라는 이미 '중원대국'이 되었고, 기본적으로 '유목상태'를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성안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런데, 왜 다시 초원으로 나가서 생활할 것인가.

 

징기스칸은 막 병력을 일으켰을 때부터 금나라를 가장 강력한 적수로 여겨왔다. 그러나, 거용관의 전투에서 몽골군대와 금나라군대가 맞부닥치자, 금나라군대는 궤멸하고 만다. 나중에 징기스칸은 금나라의 중도(북경)을 점령하고, 금나라사람들은 그저 납공칭신(納貢稱臣)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망국에 이르기까지 금나라는 그다지 흉맹하게 저항하지 못했다. 송나라보다도 훨씬 약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격도 할 수 없고, 수비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몽골군과 50년간 싸운다. 50년동안, 모두 3번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 앞의 두 번은 남송이 1승1무였다. 세번째는 남송의 완패였다. 애산을 마지막으로 남송은 멸망한다. 송나라가 몽골군과 지구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수성의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원요지를 치고 들어온 몽골군이 돌연 공성전을 벌인다. 그리고 그들은 공성전을 잘했다. 그들은 운제(雲梯), 강노(强弩), 화포(火砲)를 보유했다. 이는 수성하는 남송군에 골치거리였다. 그들은 깜짝 놀란다. 몽골군이 야전을 잘할 뿐아니라, 공성의 작전무기와 기술도 습득을 한 것이다.

 

초원부락이 돌연 공성의 운제, 화포를 보유하다니, 군사과학기술이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하다니. 도대체 이런 역량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신비한 외부요인은 바로 중원내부 한인의 기술지원이었다. 이런 기술지원은 몽골이 굴기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역사는 중세기 몽골민족을 아주 잘 보살펴주었다. 당시 여진족의 금나라는 중국의 북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화하족의 문명중심에서 한족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그러다보니, 한족들은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싶어했다. 많은 한인기술자들은 운제, 강노, 화포를 만들어 몽골군영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몽골기병들은 야전의 기술을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공성무기도 모조리 보유하게 된다.

 

여기에는 남송지도자들의 전략적인 안목도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전략적인 안목이라는 것은 '늑대를 길러' '늑대를 죽이는' 것이었다. 오랑캐인 금나라로부터 오랫동안 당해왔던 그들은 여진을 먹여살리며 키우다가, 몽골군이 나타나자 몽골족을 도와서 여진을 멸망시킨다.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남송은 몽골에서 돈을 달라면 돈을 보내고, 물건을 달라면 물건을 보냈다. 남송이 군사적으로 새외4국을 앞섰던 것은 바로 무기와 기술이었다.

 

군사기술로 말하자면, 송나라는 거액의 군비와 강대한 과학연구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과학기술에서 당시에 선진적이었다. 송나라군대의 당시 장비는 가장 선진적이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최초로 대량의 화기를 보유한 군대였다. 1044년에 편찬한 <무경총요>에는 3가지 화약배합법이 실려 있다. 그리고 많은 수량의 각양각색의 화약무기가 있었다. '보창'에서 '지뢰''까지 모두 있었다. 심지어 '수류탄' '화염방사기'같은 것까지 보유했다.

 

송나라군대와 몽골군대가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 몽골군의 화기는 송나라군대에서 제공해주엇다. 만일 송나라지도자들의 전략적인 안목이 없었다면, 즉 늑대를 길러 늑대를 죽인다는 전략이 없었다면, 거란, 여진이 차례로 멸망하고, 몽골이 굴기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한인기술자들은 왜 자원하여 몽골기병을 도와주었을까? 이는 확실히 여진족으로부터 오랜 기간동안 탄압을 받아온 그들은 몽골군을 '정의의 군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금나라통치를 종식시켜, 그들을 민족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았으랴. 늙은 늑대가 물러나자, 배고픈 늑대가 나타날 줄은. 몽골기병이 금나라를 짓밟은 후에도 중원한인의 처지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배고픈 늑대의 통치하에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금나라통치하의 한인은비록 민족탄압을 받았지만, 국가법률상으로 어쨌든 공공연히 '하등민족'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몽골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건설하면서, 공공연히 법을 만들어, 중원한인을 '삼등민'으로 규정했다. 몽골기병을 도와서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줬던 한족기술자들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자신 민족들이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될 줄은.

 

당연히 원나라통치자들은 야만적이기는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신비한 외부지원'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한족 독서인들은 경멸했지만, '기술'을 가진 한족은 잘 대해준다. 그들이 중원을 차지하고나서, 한때 과거제를 폐지한 바 있다. 독서인을 '취노구(臭老九)'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한족시술자에 대하여는 관직을 주었다. 원나라의 중하층관리에 대량의 한족이 있었는데, 이들 한족관리는 통일적인 과거시험을 거친 문관이 아니라, 대부분이 '기술관료'였다. 이를 보면 몽골족의 기술자에 대한 중시를 알 수 있다. 당연히 전체적으로는 민족압박의 환경하에서이므로 이들 기술관료의 발언권은 약했다. 이들 기술자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할 뿐이었다.

 

당시 몽골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아니든간에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다. 판도라의 상자가 한번 열리자 다시 병 속으로 집어넣을 수 없게 되었다.

 

중원의 군사기술을 얻은 몽골인들은 날개를 달았다. 세계에서 군사적 최강자가 된 것이다. 13세기, 떠오르는 해와 같던 몽골군은 이미 간단한 초원의 경기병이 아니었다. 한족의 화약무기, 우수한 아랍말, 여진족의 중갑기병을 하나로 모아서 몽골제국의 군사력을 세계가 깜짝 놀라게 할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