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기조(王紀潮)
오스만 투르크가 동서방의 교통을 차단한 후, 컬럼버스는 스페인의 군주 페르디난드 2세(Ferninand II, 1452-1516)에게 건의한다. 그는 해로로 동방으로 가서 새로 서방과 몽골 대칸과의 연결을 새로 건립하겠다고 한다. 컬럼버스가 새로 항로를 개척하려고 한 유인중 하나는 <마르코폴로여행기>의 영향이다. 그 자신도 제노바에서 선원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Jacob Burckhardt(1818-1897)는 그래서 유럽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것은 이탈리아인들의 사상이 가장 먼저 외부세계를 발견하는 것으로 향했기 때문이며, 즉 이탈리아는 몽골제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르코폴로여행기>의 전파로, 르네상스시기의 서방학자들은 동방문화 특히 몽골시대에 대하여 호감을 가졌다. 예를 들어, 베이컨(1214-1294)은 몽골인들이 성공은 과학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서(1340-1400)는 <시종의 이야기>에서 징기스칸을 아주 찬미했다. 그외에 <마르코폴로여행기>에는 동방의 문명과 부유에 대하여 가득 언급했고, 몽골대칸은 기독교에 가깝고, 일반민중들이 그리워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17,18세기의 서방계몽운동이후, 서방학자의 몽골제국에 대한 평가는 크게 바뀐다. 몽골인들은 심지어 모든 사악한 사물과 전제의 상징이 된다. 몽테스키외는 "달단민족의 노예성격은 그들이 피정복한 국가에 노예제와 전제주의를 건립하게 했다."고 한다. 볼테르는 그가 개편한 <조씨고아>에서 징기스칸을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묘사했다. 당시에, 이들 비판은 비록 프랑스국왕의 독재를 비유하는 것이었지만, 몽골인들을 사악한 세력으로 비유하는 기풍은 그후 서방학자의 몽골시대와 징기스칸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Rene Rrousset(1885-1952)는 이렇게 말한다. 징기스칸을 인류의 재난중 하나이다. 그는 공포를 일종의 정치체제로 하고, 도살을 일종의 고의로 규칙적인 제도로 만들었다.
몽골시대에 대한 평가는 중국에서도 바뀐다. 주원장은 반원(反元)으로 천하를 얻는다. 그러나 법통상 그는 여전히 원조(元朝)를 정통으로 삼았다. 그는 1366년에 반포한 장사성을 토벌하자는 <평주격>에서는 장사성의 주요죄상을 열거했는데, 바로 원왕조에 배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초기에 황급히 만든 <원사>는 여전히 징기스칸을 정통으로 삼았고, 몽골시대의 여러가지 건설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지 않았다. 명말청초때의 지식인은 몽골에 대한 평가가 이미 완전히 부정적으로 바뀐다. 내재적인 원인은 사상유례없는 황제의 독재이고 외재적인 원인은 변환(邊患)으로 한인의 강산이 주인이 바뀐 것이다. 황종희는 "고금의 변(變)은 진나라에 이르러 한번 끝나고, 원나라에 이르러 다시 한번 끝난다. 이 두번의 끝남이 있은 후, 고대 성왕의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경영하는 사람은 전혀 없게 되었다." 또한 "진정(秦政), 몽골이 흥하여 (천하가) 어지럽게 되었다."(명이대방록). 이런 견해는 사대부의 가운데 대표성을 지닌다. 오랫동안 이는 사람들의 몽골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 국내의 학자들이 몽골시대에 대하여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무역, 교통, 민족통합분야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긍정적인 평가는 농경사회 왕조교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징기스칸의 정복가운데 도살이나 경작지를 목자응로 바꾼 등의 정책에 대하여는 엄중하게 비판한다. 몽골통치자들은 사회정치분야에서 낙후된 영향을 미쳐 송나라시대를 역행했다고 본다. 이는 농경문화의 입장에 서면, 이들 비판은 문제가 없다. 일단 농경문화를 벗어나서 몽골문화를 보면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몽골시대를 평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문화적인 입장과 종족적인 편견이외에, 주요한 장애는 바로 몽골시대의 영토가 너무 넓어서, 각종 언어로 된 문헌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징기스칸의 후대들이 중국, 중앙아시아, 러시아와 유럽에 건립한 각 몽골칸국의 발전방향도 달랐고, 멸망시간도 달랐다. 예를 들어,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후, 북원(北元)은 새외(塞外)에서 29년간이나 더 존속했다. 몽골의 '북원'정권은 린단칸(1604-1634)이 죽은 후, 그 아들이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멸망한다; 원래의 킵차크한국의 아스크라칸한국, 시베리아한국은 각각 1556년, 1598년에 러시아에 멸망당한다; 유럽의 크리마아칸국은 1783년 러시아에 합병된다; 징기스칸의 가족중 마지막 군주들인 호라즘칸국의 세이드 압달라칸(?-1920)과 부카라칸국의 무하마드 알림칸(1881-1944)는 1920년이 되어서 침입한 소비에트러시아군대에 무너진다. 만일 중국전통의 왕조변천사로 몽골시대를 논한다면, 최소한 시야가 충분히 넓지 못한 국한성을 지니게 된다.
미국의 미네소타주 맥칼리스터 칼리지의 인류학교수인 Jack Weatherford는 최근 들어 <징기스칸과 현대세계의 형성>이라는 책을 내놓았다(2004, Tree Rivers Press). 그는 몽골시대에 대한 인식에서 전통사학자들과 차이가 있었다. Weatherford는 인류학의 관점에서 그리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몽골시대를 다시 말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정복사의 서사전통을 버렸다는 것이다. 서방에 의하여 "세계의 채찍"이라고 불리던 징기스칸을 현대화된 언어환경하에서, 그가 건립한 몽골제국을 오늘날 세계의 형성에 끼친 영향을 새로 평가했다. 그는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징기스칸의 성취는 인류상상력의 극한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의 성공은 소위 '야만'과 관련있다. 거의 모든 몽골인들에게 정복당한 국가는 처음에 야만적인 정복이 불러온 파괴와 공포를 맛본다. 그러나 문화교류, 무역 및 문화진보 방면에서, 금방 사상유례없는 상승태세를 나타낸다. 유럽인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몽골인의 영향으로 르네상스시기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인류학자들이 원시사회를 연구할 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계몽운동을 극복하고, 특히 19세기이후 서방세계의 몽골제국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것인지, 몽골시대의 복잡다단한 사건을 잘 얘기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다. 이전에 C. M. d'Ohsson(1779-1851)등의 저작은 이미 독자들이 고대사를 이해하는 경전이 되었다. 쉽게 넘어설 수가 없다. 그러나 작자는 유목민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이는 '현대성'을 전체 서적의 주선으로 하여 이야기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몽골초원제국의 낙후성을 얘기하는 서적과 많이 다르다. 어느 정도 뜻밖의 일이다. Weatherford의 이 책은 페이지수가 많지는 않다. 모두 3개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분은 징기스칸의 출생부터 몽골각부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 각종 요소를 이야기 한다. 제2부분은 몽골인들이 역사무대에 진입한 후 세계전쟁을 일으킨 시기이다. 시간은 50년(1211-1261)이다. 제3부분은 '몽골평화'(The Pax Mongolica, 13세기-14세기 몽골저옥으로 나타난 세계평화)과 그 뒤를 이은 전세계의 각성이다. 작자는 이러한 각성이 현대사회의 정치, 상업과 군사제도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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