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명원(陳明遠)
요즘 매체에서는 자주 연예계에서 고관이 여자연예인과 관계가 있다느니, 어느 감독과 어느 배우가 애매한 관계니 하는 소식들이 폭로되고, 이러한 스캔들은 연예계의 잠규칙(潛規則, 드러나지 않은 규칙 혹은 관행등을 가리킴)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잠규칙은 현재만 있는 것은 아니고 고대의 연예계에도 있었다. 이런 잠규칙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다. 특히 원(元)나라는 잡극(雜劇)이 성행하면서 여자연예인이 늘어나게 된다. 관리들이 여자연예인과 관계를 가진다든지, 감독과 배우가 애매한 관계에 있다든지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여자연예인은 고대에 일반적으로 여령(女伶), 우령(優伶)으로 불리웠다. 스타급의 여령, 우령은 명령(名伶)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예계의 스타가 됙겠다. 현대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일거일동은 사회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대 문인들은 자주 그녀들의 생활스캔들에 관한 것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전하기도 했다. 원순제 15년 즉 1355년, 문인 하정예(夏庭藝)는 <<청루집(靑樓集)>>이라는 책을 써서, 원나라 대도(현재의 북경), 금릉(남경), 유양(維揚, 양주), 무창(武昌) 및 산동, 강절, 호광등지의 110명의 여자연예인 및 청루가녀(靑樓歌女)의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 여자들은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적 조예를 지녔다. <<청루집>>에는 그녀들이 잡극, 원본, 표창, 설화, 제궁조, 무도, 기악등의 재능을 기록했다. 특히 일부 잡극배우들의 장점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동시에 그녀들과 당시 고관대작, 문인재사, 희곡산곡작가들과의 접대와 교분도 기록했다. 관련된 사람들중 사대부가 50여명, 남자배우가 30여명이다.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 원나라때의 희곡의 번영상황과 원나라 연예인들의 생활상황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책은 이미 사람들이 연예계생활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 역할은 지금의 연예계소식을 담은 출판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루집>>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양원수(梁園秀)라는 여성스타가 있었다. 가무에 뛰어나서 당대에 유명했다. 그녀는 또한 서예를 잘했는데, 그녀가 쓴 해서는 아주 아름다웠다. 또한 시사를 가끔 쓰기도 했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소량주>> <<청가아>> <<홍삼아>>등의 산곡을 창작해서 세상에 유행시키기도 하였다. 그녀는 창작형의 여가수인 셈이다. 또 다른 연예계의 스타가 있었는데 이름이 장이운(張怡雲)이다. 시사에 뛰어나고 말을 잘했으며, 기예가 뛰어나서 경사에 이름을 널리 떨쳤다. 당시의 저명한 문단의 거두인 조맹부(趙孟頫), 요수(姚燧)등도 모두 그녀와 교분이 있었다. 그들은 자주 그녀의 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놀았다. 한번은 요수가 얘기하다가 ‘모추시(暮秋時)’라고 운을 떼자, 장이운은 그 자리에서 <<소부해아>> 1수를 읊었다고 한다: “모추시(暮秋時), 국잔유유오상지(菊殘猶有傲霜枝), 료각황화사(西風了却黃花事)….” 이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재능이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경사 연예계의 여자스타들은 많이 나타났다. 조아수(曹娥秀)라는 여자스타가 있었는데, 문인명사들과 연회에서 만나면, 그녀가 아주 재미있는 답변을 하여 좌중을 웃기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장 인기있는 스타로 떠오른다. 유연(劉燕)이라는 여자연예인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었다. 한 관리와의 전별 때 <<태상인>>을 한 수 불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고인별아출양관(故人別我出陽關) 무계쇄조안(無計鎖雕鞍) 금고별리난(今古別離難) 올수화연미원산(兀誰畵姸眉遠山) 일존별주(一尊別酒), 일성두우(一聲杜宇), 적막우춘잔(寂寞又春殘) 명일소루간(明日小樓間) 제일야상사루탄(第一夜相思漏彈)” 이는 당시 인구에 회자되는 노래였다. 예명이 순시수(順時秀)인 잡극배우 곽순경(郭順卿)은 자태가 우아하며, 규원극(閨怨劇)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유시중은 ‘금황옥관, 봉음난명(金簧玉管, 鳳吟鸞鳴)”이라는 말로 그녀를 표현했다.
당연히 이들 연예계의 여자스타들이 유명하게 된 것은 고관대작들과 풍류명사들이 띄워주었기 때문이다. 일부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은 집안에 용모가 뛰어난 처첩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연예인과도 빈번히 내왕했다. 이것은 당시에 재자가인의 풍류로 생각했고, 자질이 뛰어나고 수준이 높아야만 놀 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육욕때문이라기 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놀고 즐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연예계에는 미모와 재주를 모두 갖춘 대스타가 있었다. 조정의 관리이건, 재야의 명사이건 모두 그녀를 쫓아다녔고, 심지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도 나고,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당시에 곽순경이라는 대스타가 있었는데, 그녀는 원래 풍류명사 왕원정(王元鼎)과 가까운 사이였다. 한번은 그녀가 병이 들었는데, 마판장(馬板腸)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왕원정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자신의 타던 준마를 죽여서 그 요리를 해준다. 이 일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타고 다니던 BMW를 처분해서 먹고싶다는 요리 하나를 해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정의 참찬인 아로온(阿魯溫)도 곽순경을 마음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빼앗고 싶어했다. 그는 곽순경을 부른 다음 그 자리에서 이렇게 묻는다: “나와 왕원정을 비교하면 어떠냐?” 곽순경은 그에게 밉보일 수는 없어서 완곡하게 대답한다: “참정은 재신이고, 원정은 문사입니다. 조정의 경륜이나 임금을 모시고 백성을 보살피는데 있어서는 원정이 참정에 미치지 못하고, 음풍농뤌하고 석옥연향(惜玉憐香)하는 참정이 원정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아로온의 체면도 고려해준 말이어서 듣기에 싫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냥 웃고 넘기게 된다.
원나라때는 조정관리가 연예계와 관계를 맺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원전장>>에는 “악인(樂人)을 처로 들이는 것을 금한다”, “관직에 있는 자로서 차주시사(茶酒市肆) 및 창우지가(倡優之家)를 자주 드나드는 자는 단죄하고 파직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런 전장규정으로도 막을 수는 없었다. 적지 않은 권세가들은 여전히 출입했고, 여자연예인들을 강제로 첩으로 삼기도 했다. 사실, 젊고 예쁜 여자예인들의 생활은 청루여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녀들은 자주 권세있고 나이많은 자들의 측실로 거두어졌고, 어떤 사람은 바깥의 첩으로 거두어졌다. 이런 일은 <<청루집>>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여자연예인 취하수(翠河秀)는 석만호(石萬戶)가 별관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여자연예인 고산산(顧山山)은 화정현장 하라부화(哈拉不花)가 측실에 두었으며, 기주동지 달천산은 여자연예인 이진동을 첩으로 삼았고, 유석파는 감주감군 전보암발리의 첩이 되었다는 등등의 기록이 있다. 장자우라고 부르는 평장 한 명은 여자연예인 소아수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한때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이름을 날리던 희춘경을 첩으로 삼았다. 여자연예인들은 몸값이 비쌌다. 한 사람의 첩실이 되는 것 이외에, 여러 관리들의 임시정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남자가 죽고나면, 이들 나이든 여자연예인들은 새로운 곤란을 맞이한다. 예를 들어, 여자예인 왕련련은 열고백의 첩이 되었는데, 열고백이 죽고난 후 그녀는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다른 사대부들로 하여금 그녀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잡극’에 뛰어난 여자연예인 왕분아는 장총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장총관이 죽은 후, 그녀는 강호를 전전한다. ‘천성이 총명’하여 잡극 300여단을 외웠던 여자연예인 이지수는 장총관의 또 다른 첩이었는데, 장총관이 죽은 후, 그녀는 생활이 곤란하여 다시 연예계로 되돌아온다. 총관은 관청에서 그다지 높은 직위가 아니다. 그런데도 두명의 여자연예인을 거두었으니, 조정관리들이 여자연예인을 거두는 것은 아주 통상적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때 연예계의 가장 유명한 대스타는 주렴수(珠簾秀)이다 그녀는 원나라 대도 사람으로, 당시의 저명한 작가 겸 감독인 관한경(關漢卿)과 교분이 밀접했다. 다만, 주렴수에게는 또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는 조정의 한림학사인 노지(盧摯)이다. 한번은 노지가 외지로 나가서 지방관리로 있었는데, 그녀를 잊지 못하여, 산곡 한 곡을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제목은 <<별주렴수>>인데: “재환열(才歡悅), 조간별(朝間別). 통살호난할사(痛煞好難割舍). 화선아재장춘거야(畵船兒載將春去也). 공류하반강명월(空留下半江明月)”이었다. 이에 대하여 주렴수가 답사를 한 수 써서 보낸다: “산무수(山無數), 연만루(烟萬縷). 초췌옥당인물(憔悴玉堂人物). 의봉창일신아활수고(倚蓬窓一身兒活受苦). 한부득수대강동거(恨不得隨大江東去)”. 이 답사를 보면 그녀의 수준은 당대의 한림학사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관한경은 당연히 주렴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증주렴수>>라는 산곡 1수를 지어서 주렴수를 한껏 치켜세운 적이 있다.
주렴수는 개략 원나라 연예계의 수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을 뿐아니라, 여러 공경명가들과도 교분을 맺었다. 또한 만년에 제자를 받았는데, 제자들 중에는 재색을 겸비한 뛰어난 연예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20세기의 저명한 극작가인 전한(田漢)은 일찍이 <<관한경>>이라는 화극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렴수는 관한경과 뜻이 통하는 동지로서 함께 사우는 진보적인 예술가로 나온다.
만년에, 주렴수는 전당의 도사 홍단곡(洪丹谷)의 처가 된다. 죽기 전에, 그녀는 홍도사에게 자신은 가인이니 죽을 때 노래를 듣고 싶다고 말하고, 홍단곡은 새로 곡을 하나 써서 들려준다. 주렴수는 노래를 듣고는 웃으면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제자중에는 “새렴수” “연산수”등의 뛰어난 제자들이 많다. 후배들은 그녀를 “주낭낭(朱娘娘)”이라는 존칭으로 부른다. 그녀의 만년은 지금으로 치면 예술학교의 유명교수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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