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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세 황후: 뉴후루씨(鈕祜祿氏)

by 중은우시 2010. 8. 15.

글: 양진(楊珍)

 

강희16년(1677년) 팔월 이십일, 현엽은 조모의 명을 받아, 어비롱(必隆)의 딸 뉴후루씨(鈕祜祿氏)를 황후로 책봉한다. 동시에 퉁궈웨이(國維)의 딸 퉁자씨(佳氏)를 귀비(貴妃)에 책봉하고, 이씨(李氏)등 7명을 빈(嬪)으로 책봉한다. 이는 강희제 최초의 정식 비빈책봉이다.

 

뉴후루씨는 단지 6개월간 황후를 지냈다. 강희17년(1678년) 이월 이십육일 사망한다.

 

강희제가 처음에 황후를 책봉할 때, 뉴후루씨도 후보자에 들어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연령은 허서리씨와 비슷했다. 출신으로 보면, 그녀는 보정대신(輔政大臣)의 딸로서, 당시 선발명단에 들어있던 만주족 여자들 중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니의 손녀인 허서리씨보다 더 우월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을 보면, 그녀의 용모나 자질은 모두 허서리씨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정대신 아오바이(鰲拜), 수크사하(蘇克薩哈), 어비롱등은 모두 뉴후루씨를 황후로 밀고 있었다. 효장태후는 당시 상황기를 대표하는 아오바이집단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막고, 동시에 정황기의 대신인 소니와 그 가족을 묶음으로써, 양황기를 분화시켜, 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허서리씨를 황후로 결정했다. 동시에 뉴후루씨도 궁안에 받아들였다.

 

<<후비전고>>에 따르면 뉴후루씨는 "어려서 입궁하여 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는 입궁한 후에 정식으로 비의 봉호를 받지 못했다. 당시 현엽의 후비들 중에서 정식으로 책봉받은 사람은 황후 허서리씨 한 사람 뿐이었다.

 

부친대에서의 정치투쟁의 와중에 휘말려서, 뉴후루씨는 황후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나이가 어렸지만, 이것이 자신의 평생운명을 좌우하는 일이라고 잘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허서리씨를 황후로 한다는 유지가 반포되자, 어비롱, 아오바이, 수크사하는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되고, 함께 들어가서 진언을 올린다. 그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갈포라의 딸이 황후가 되다니,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 수하 만주인의 딸이 어찌 황후가 될 수 있는가?" "우리 친구의 딸이 황후로 봉해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영시위내대신 갈포라 및 그 딸을 경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불만정서는 뉴후루씨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비교적 억울하고, 억압된 심정으로 입궁한다. 이 점은 그후 십여년간 그녀의 궁안에서의 처세에 영향을 미친다.

 

강희16년 팔월 뉴후루씨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문에서 그녀에 대하여, "성품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예법을 잘 지키고, 모범이 되어, 궁안에 칭찬하는 말이 자자하고, 스스로를 잘 가꾸어서, 중국과 외국에 황후가 될 만하다" 이를 보면, 그녀도 태황태후, 황태후 및 현엽의 호감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3년 오월에 황후 허서리씨가 서거한 후, 그녀의 실제적인 지위는 점차 상승하여, 이미 후궁을 통할하는 지위에 있었다. 단지 현엽이 죽은 황후를 위하여 3년상을 치러야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뉴후루씨의 정식책봉은 계속 미뤄졌던 것일 뿐이다. 뉴후루씨는 입궁한 후 첫 10년간이 그녀에게는 우울한 시기였다. 허서리씨가 서거하기 전에, 그녀는 일생동은 허서리씨의 아래에 처하며,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힘든 운명이었다. 그리하여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조그만치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비교적 우울한 상황하에서 뉴후루씨는 태황태후, 황태후, 황제, 황후와 모두 잘 지냈으니, 그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뉴후루씨는 허서리씨와 마찬가지로 태황태후, 황태후를 잘 모셨을 뿐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도 어질게 대했다. 그리고 독서를 좋아하여 글재주가 있었다. 그녀의 사후에 시호를 내리는 책문에서도 그녀가 비교적 높은 문화적인 소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뉴후루씨는 현엽으 후궁중에서 자신의 장점을 잘 발휘했다. 그녀는 허서리씨를 이어 황후에 오르는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녀와 현엽은 서로 얘기를 나눌 것이 많았고, 서로간의 감정도 깊어갔다.

 

뉴후루씨는 황후가 되자, 즉시 현엽에게 이미 돌아가신 부친을 위하여 가묘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현엽의 동의를 받는다. 그러나, 가묘가 황제의 명을 받아 완공되었을 때는 이미 뉴후루씨가 사망한 이후였다. 강희18년 삼월 이십사일, 현엽은 친히 비문을 쓰고 이 일의 경위를 기록한다.

 

부친때문에 뉴후루씨는 입궁할 때 황후가 되지 못한다. 곧이어 부친에 연루되어, 묵묵히 말로 하기 힘든 압력과 고통을 견뎠다. 그러나 그녀는 부친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조건이 허락되자, 갖은 방법을 강구하여 가묘를 건립하는 방식으로 부친의 은혜에 보답한다.

 

뉴후루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가 입궁한 후 십여년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다. 어렵사리 황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강희17년(1673년) 이월 이십육일 사시, 뉴후루씨는 곤녕궁에서 서거한다. 나이는 약 25세였다. 관련사료에서는 그녀의 사인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병을 앓았다는 기록도 없다. 아마도 그녀는 지나간 세월동안 너무나 많은 심혈을 쏟았는지 모르겠다. 실현되지 못한 숙원을 위하여, 억지로 버티고, 억지로 웃었다. 일단 소원을 이루자, 긴장이 풀렸는지, 잠복되어 있는 질환이 발작해서 그녀의 젊은 생명을 빼앗아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