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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세 황후: 퉁자씨(佟佳氏)

by 중은우시 2010. 8. 15.

글: 양진(楊珍)

 

현엽의 세번째 황후 퉁자씨는 먼저 귀비에 봉해진다. 강희16년(1677년) 팔월 이십사일, 현엽은 예부에 유지를 내려, 퉁자씨를 귀비로 하고, 이씨를 안빈, 왕가씨를 경빈...등으로 임명한다. 이것은 현엽이 후궁을 정식으로 책봉한 첫번째이다. 이전까지는 뉴후루씨를 포함한 모든 궁인들은 정식으로 봉호를 받지 못했었다.

 

퉁자씨가 언제 입궁했는지는 불명이다. 그녀는 현엽이 처음 비빈을 책봉할 때 귀비가 되었다. 이는 그녀가 명문집안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부친 퉁궈웨이(國維)는 현엽의 생모인 효강황후의 남동생이다. 강희9년에 내대신이 되고, 21년에 영시위내대신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정대신이 된다. 그녀의 생모는 퉁궈웨이의 정실부인인 허서리씨이다. 청나라초기 퉁씨가족중에는 두명의 국구(國舅, 황제의 외삼촌) 이외에 관직이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적지 않다. 당시에 '퉁반조(半朝)'라는 말이 있었는데, 퉁씨가 조정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퉁자씨는 이러한 특수한 가족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현엽의 사촌여동생이면서, 퉁궈웨이의 적녀이니, 자연히 신분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강희20년(1681년) 십이월, 현엽은 조부의 명을 받아, 귀비 퉁자씨를 황귀비(皇貴妃)로 승격시킨다. 현엽이 책봉한 모든 비빈중에서 그녀는 유일한 황귀비였다. 청나라제도에서, "황후의 아래로 황귀비가 가장 높고, 육궁의 일을 통할할 수 있다. 즉 부황후라고 할 수 있다." 퉁자씨는 명목상으로는 황귀비였지만, 황후의 자리가 비어있으므로, 실제로 황후의 직책을 수행했다.

 

현엽의 앞선 두 황후와 마찬가지로, 퉁자씨도 온화하고 단정했다. 말과 표정에 법도가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당시 후궁중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였고, 비빈들에게도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녀는 사망하기전에 이미 30이 넘었다. 여자로서의 가장 좋은 시기는 지나간 것이다. 현엽이 그녀보다 젊고, 예쁜 비빈들에게 정을 줄 때도 그녀는 질투, 간섭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녀가 생각하기에 적합한 여인을 현엽에게 추천했다.

 

퉁자씨는 현숙하고 이치에 밝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 2세기이후 청나라말기에 관리를 지낸 하인호 선생이 쓴 <<청궁사>>의 주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성조의 세 황후는 효성 허서리씨는 갈포라의 딸이다. 효소 뉴후루씨는 어비롱의 딸이다; 효의 퉁자씨는 퉁궈웨이의 딸이다. 효의황후는 외가가 가장 현명하고, 예절이 뛰어났다."

 

강희22년(1683년) 육월, 퉁자씨가 딸을 하나 낳는다. 현엽이 조모를 모시고 새외로 피서를 가 있었기 때문에, 내무부 총관 투바(圖巴)는 붉은 종이에 글을 써서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육월 십구일 사시 황귀비가 공주를 낳았다. 환관, 어의에 다르면, 황귀비는 몸이 건강하고, 공주고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공주는 부친이 얼굴을 보기도 전에 1개월후에 사망한다. 이는 퉁자씨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후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전의 두 황후와 비교하여, 퉁자씨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즉 현엽의 자식들과 잘 지내는 문제였다. 허서리씨, 뉴후루씨가 살아잇을 때는 황자, 공주들 중에서 요절한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몇몇은 모두 나이가 어렸거나 강보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퉁자씨가 사망하기 전에 황장자 윤지는 이미 18세이고, 이공주(황삼녀)는 이미 17세였다. 이들 둘 아래에는 십여명의 서로 나이가 다른 동부이모의 자매동생들이 있었다. 퉁자씨는 이들 황자, 공주를 자신의 자식처럼 길렀다. 그녀는 아이를 아주 좋아했고, 아이들을 아꼈다. 이를 보면 그녀의 선량하고 온화한 성품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퉁자씨가 황사자(皇四子) 윤진(胤, 나중의 옹정제)을 친히 부양했다. 윤진은 강희17년(1678년)에 태어났고, 생모는 당시 아직 작위를 받지 못했던 우야씨(烏雅氏)였다. 윤진이 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퉁자씨가 길렀는데, 십년후에 그녀가 사망한다.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해서, 다른 비빈이나 궁녀가 낳은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데려와 기르곤 했다. 이는 강희제때 보기 드문 일이었다. 퉁자씨는 어린 윤진을 아주 아꼈고, 잘 보살펴 주었다. 그녀는 친아들이 없고, 친딸은 1달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을 다른 비빈들이 낳은 자녀들에게 충분히 쏟았다. 특히 황사자 윤진을 많이 아꼈다. 생모는 당시에 겨우 비의 작위밖에 받지 못했는데, 황귀비의 사랑을 어려서부터 받은 것은 윤진에게 행운이었다. 그 자신과 자손들도 이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했다. 퉁자씨의 10년간의 양육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것 이외에 자랑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뉴후루씨가 죽은 후 중궁의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 있게 된다. 이치대로라면 일찌기 강희20년, 귀비 퉁자씨가 황후가 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한단계 올라 황귀비가 되었을 뿐이다. 또한 이 자리에 8,9년간 머물게 된다. 강희28년 칠월초에 그녀는 중병을 앓아서,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칠월 초여드레, 현엽은 비로소 예부에 유지를 내려, "황태후의 유지를 받들어, 황귀비 퉁자씨를 황후에 책봉한다'고 하게 된다. 칠월초아흐레, 현엽은 퉁자씨를 황후에 봉하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한다. 초십일 신시에 퉁자씨는 사망한다. 여러해동안 미뤄왔던 황후책봉도 그녀의 목숨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책봉식은 장례식으로 바뀐다.

 

강희28년 육월상순, 현엽은 황태후의 명을 받아 창춘원으로 가서 거주한다. 칠월 초이레 깊은 밤, 그는 돌연 궁으로 돌아온다. 이는 심상치않은 일이었다. 그는 황귀비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되돌아온 것이다. 황태후는 초여드레에 궁으로 돌아온다. 이를 보면, 퉁자씨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효혜황태후는 퉁자씨를 황후로 세우도록 명한후, 그녀는 퉁자씨를 매우 좋아했고, 일찌감치 황후로 책봉할 뜻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효도를 다했던 현엽은 적모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지 않았고, 신하들이 여러번 황후를 책봉해달라고 요구해도 미루기만 하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태자를 폐위했던 기간동안 현엽은 일찌기 황태자 윤잉이 "태어나면서 모친을 죽였다(生而克母)"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실제로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에게 극후(克后)의 운명이 있지 않은가 걱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황후도 그와 함게 있은지 10년만에 죽었고, 나이가 겨우 22세였고, 두번째 황후는 책봉전 10여년간 아무렇지도 않다가, 일단 황후가 되자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현엽은 세번째 황후로 책봉된 여인이 다시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같다. 그리하여 퉁자씨에 대하여 그는 만족하면서도, 그녀를 황귀비의 지위에 머물게 했고 황후에 책봉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황태후와 대신들이 간언함에도 생각을 한 후에 미루고 허락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퉁자씨의 병세가 위독해졌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책봉에 대한 일을 꺼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사망을 앞당길까 우려했던 것이다. 황태후가 말을 꺼내자 비로소 그 뜻에 따라 책봉한다.

 

퉁자씨가 사망했을 때, 현엽은 36세였다. 한창 때였는데, 이후로 그는 황후를 책봉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황후'의 지위라고 볼 수 있는 황귀비의 자리마저도 계속 비워두게 된다. 봉건사회에 황제와 황후는 지고무상의 군권을 상징한다. 한 자리라도 비어서는 안된다. 황후는 백성들이 존경하는 국모이고, 그녀의 품행은 천하여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당시의 도덕기준으로 보자면, 나라에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황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는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의 이웃나라에서는 이 일을 오랫동안 주목하여 왔다. 강희58년(1719년) 조선의 사신은 북경에서 돌아간 후에 이렇게 말했다: "저 나라는...황후와 태자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 지금도 세울 생각이 없다" 황후의 자리와 태자의 자리를 나란히 언급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엽은 여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여전히 황후를 다시 두지 않는다. 그 속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말못할 점이 있을 것이다. 만일 비빈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