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부동산

완커(萬科)의 내분: 누가 왕스(王石)를 몰아냈는가?

중은우시 2012. 1. 13. 18:47

글: 중국상인

 

부동산업계에 최근 큰 사건이 일어났다. 먼저 중국부동산업계의 제일인자인 완커(萬科)의 동사장 왕스(王石)이 조용히 미국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완커는 정식으로 상무부총재 쉬홍거(徐洪舸), 샤오난(肖楠)이 사직을 했다고 발표했다. 비록 완커는 두 사건이 순전히 우연이라고 밝혔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정은 절대로 완커가 선전하는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님을.

 

중국의 근삼십년의 기업발전역사를 돌아보면,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의 많은 유명기업의 풍운이 교차하는 성장과 내부투쟁사와 비교할 때, 완커의 발전은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고 평정했다.

 

완커와 같은 시기에 창업한 중국IT업계의 최대기업인 롄샹(聯想, Lenovo)은 니광난(倪光南), 쑨홍빈(孫宏斌) 사건이 있었고, 최후에 당사자들은 원수지간이 되거나, 감옥에 갇혔다. 가장 이상주의적 색채를 띈 민영기업인 신동팡(新東方)의 경우에도 격렬한 내부투쟁이 있었고, 그 결과 삼두마차로 불리던 사람중 2명인 쉬샤오핑(徐小平)과 왕창(王强)이 차례려 경영진에서 떠났다.

 

이와 비교하면, 완커의 발전과정에서 비록 일부 간부가 이직한 사건은 있었지만,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매번 이직하는 간부들도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완커의 각종 자료를 연구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완커의 발전사는 매체나 완커가 묘사하는 것처럼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내부투쟁이 멈춘 적이 없었다. 그저 이번이 완커의 사상 최대의 내부투쟁이었을 뿐이다. 완커는 지금까지 매체관계를 잘 처리했고, 위기PR에 능했다. 그래서 그의 발전사에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모두 조용히 해결되었던 것이다. 내부에서 어떤 투쟁이 발생했는지, 투쟁당사자들은 대외적으로 입을 꽉 다물어왔다.

 

각종 공개출판된 서적, 연보, 인터넷, 매체보도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완커의 발전사상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내분의 역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왕스는 자신의 배경에 대하여 비밀로 했다. 각종매체는 모두 왕스가 빈곤한 가정출신으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알고 있다. 실제 왕스의 출신은 평범하지가 않다. 어느 정도 휘황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의 부친은 일찌기 정주철도국 국장을 지냈고, 그의 장인은 광동성 부서기를 지냈다.

 

사실 왕스의 배경을 명확히 밝힌다고 하여, 왕스의 성과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명확히 왕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의 완커는 중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부동산기업이다. 그리고 전문화와 양호한 경영으로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창업초기의 왕스는 대다수 창업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는 것은 상품을 사고파는 일이었다. 왕스의 첫번째 자금은 옥수수거래에서 얻는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심천현대과교의기전시판매센터를 만드는데, 이것이 나중에 완커로 성장한다.

 

왕스의 직업생애에서 첫번째 권력투쟁은 바로 심천현대과교의기전시판매센터의 경리(사장)이다. 전시판매센터를 만들 때, 왕스는 원래 설립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총경리(사장)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결국 원래 정했던 총경리는 사직하고, 왕석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비록 이번의 권력탈취는 그가 마음먹고 한 행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직업생애에서 아주 중요하다. 바로 이 전시판매센터를 중심으로 왕스는 나중의 완커를 만들기 때문이다.

 

1987년부터, 왕스는 완커의 상장을 준비한다. 이것은 왕스가 앞날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기보다는, 권력투쟁의 필요때문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완커의 전신인 전시판매센터를 건립한 후, 왕스는 원래의 대주주인 심특발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왕스는 언제든지 완커를 쫓겨날 상황이었다. 완커를 상장시키지 않았더라면, 왕스는 계속 완커를 지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완커도 현재의 영향력과 지위를 누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동산에 전문적으로 종사한 후, 완커는 한때 자본시장에서 활약한 바 있다. 초기에 가장 주목을 끌었던 사건은 바로 선화(申花)에 참여한 일이다. 당시 완커는 상해에서 사업을 벌이고자 했다. 1993년을 전후하여 선화의 주식을 산다. 그리고 선화의 동사장과 선화를 인수하는데 컨센서스를 이룬다. 비록 나중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특히 1994년의 쥔완(君萬)사건으로 완커는 선화에서 철저히 빠져나온다. 그러나, 완커는 이로 인하여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주식시장에서 약간의 수익도 얻었고, 주식시장에서 이름을 드높였다.

 

이번 인수업무를 주재한 사람은 바로 나중에 완커의 후임자인 위량(郁亮)이다. 이것은 위량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다.

 

완커이건 쥔안(君安)이건, 두 회사의 다툼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2년에 성립된 쥔안증권은 당시 증권시장에서 첫손가락 꼽히는 회사였다. 1993년 귄안은 완커의 B주를 발행하는 주간사가 되었다가 1천여만주를 떠안게 된다. 주가를 올려서 이익을 늘이기 위해, 쥔안증권의 동사장인 장궈칭(張國慶)은 1994년 심천신일대기업유한공사, 하이난증권, 홍콩쥔산투자유한공사, 촹이투자유한공사들 회사와 연합하여, 완커의 경영전략에 불신임표를 던지고, 동사회를 개조하고자 한다.

 

왕스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신속히 반시간만에 13명의 완커 동사들과 통화한다. 그리고 관련수단을 써서, 완커를 연속 거래정지시켰다. 그리고, 상대방 진영의 누군가가 rat trading한 것을 잡아낸다.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장궈칭의 공격을 막아낸다.

 

90년대후반, 완커는 점차 다원화에서 전문화로 방향을 바꾼다. 점차 부동산이외의 산업을 매각하였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마지막에 팔아버린 완자(萬佳)수퍼마켓이었다. 완커의 선전자료에는 왜 완자를 팔고 전문화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그러나, 완자를 팔아버리기 전에, 완자의 경영지배권쟁탈전에서 간담이 서늘한 투쟁이 있었다.

 

주환량(朱煥良)이 이름을 날린 것은 나중에 세상에 유명해진 "여량(呂梁)사건"때문이다. 아마도 거의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환량이 일찌기 완커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주환량은 일찌기 완커의 주식이 폭락할 때, 완커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고, 주주총회에서 공개적으로 완커를 지지했다. 그리하여 왕스와 주환량은 한때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완커가 '합작'모델로 가던 시대에, 쌍방은 많은 지역과 업무에서 협력을 했었다. 주환량도 한때는 완커의 동사였다. 완커의 모델이 변하면서, 완커는 점차 주환량과 거리를 두고, 주환량을 버린다.

 

현재 완커는 여전히 중국부동산의 대명사이다. 왕스는 더더욱 중국부동산계의 "대부"격인 인물이다. 주환량은 그러나, 여량사건이후 타향으로 떠나야만 했다.

 

왕스가 즐겨 얘기하는 '해도(海盜, 중국에서 해적이라는 의미임)행동'은 실제로 상대방의 사람을 빼내오는 것이었다. 소위 '해도'이라는 것은 사실 '중하이(中海)'에 있는 사람을 훔쳐오는 것이었다. 해적행동으로, 완커는 중해에서 인재를 빼내왔다. 나중에 중량급인물이 된 류아이민(劉愛民)도 이때 중해에서 스카우트해온 인물이다.

 

대체로 완커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렇게 드러내놓고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회사에서 사람을 빼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완커의 교묘한 포장과 선전으로 원래 부그러워야 할 일이 완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완커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지금의 부동산은 중천에 뜬 해와 같고, 부동산업을 하려면 토지를 확보해야 하고, 토지만 있으면 잘하든 못하든 돈을 번다. 그러나, 초기의 부동산은 지금처럼 그렇지 않았다. 완커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북경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완커는 1994년에 일찌기 북경으로 진출했으니, 안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후 북경에서의 발전은 순조롭지 못했다. 인사변동도 빈번했고, 8번이나 총경리를 바꾸어야 했다. 최종적으로 왕스는 할 수 없이 소방대로 린샤오저우(林少洲)를 보낸다. 린샤오저우는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반년만에 국면을 전환시킨다.

 

그러나, 북경에서 완커가 궤도에 오르고, 린샤오저우도 야심만만하게 사업을 벌여야 할 때, 돌연 린샤오저우는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완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린샤오저우가 떠나겠다는 이유는 자신이 창업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해가 지난 후, 린샤오저우가 개인블로그에 <졸업이십주년기념문장의 풍우겸정이십년>이라는 글에서 비로소 그가 사직한 진정한 내막을 알 수 있게 된다.

 

상장을 계획한 후, 심특발은 완커의 지배권이 이미 상당히 약화된다. 그러나, 왕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심특발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한다. 화룬(華潤)이 완커에 지분투자함으로써, 왕스는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나중에 완커가 고속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화룬이 완커의 주주가 되는 과정에서, 화위안(華遠)의 런즈창(任志强)은 그 일을 주도했다. 그러나 화룬이 완커에 진입하므로서 최종적으로 런즈창은 화룬과 결별하게 된다.

 

90년대말기가지, 화위안은 중국부동산업계에서 떵떵거리는 회사였다. 그 지위는 당시의 완커보다 절대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런즈창은 화룬과 결별한 후에 할 수 없이 맨몸으로 시작해야 한다.

 

1999년이후, 왕스는 완커 총경리 직무를 사임한다. 첫번째로 총경리직을 물려받은 인물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뤼량이 아니었고, 당시 완커의 간장(干將) 야오무민(姚牧民)이었다.

 

그러나, 겨우 1년이 지난 후, 야오무민은 권한을 잃고, 2001년에 결국 완커를 떠난다. 당시 완커는 대외적으로 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후 야오무민은 국내의 여러 부동산회사에 재직하지만, 결과는 모두 이상적이지 못했다.

 

2001년이후, 위량이 완커의 총경리가 된다. 지금까지 이미 십여년이 되었다. 중국의 다른 회사와 비교하면, 완커의 후계자문제는 가장 잘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완커의 신구 두 대표의 얼굴은 계속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안했지만,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완커의 내부는 그다지 조용하지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위량이 2009년이후 상업부동산이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완커를 잘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왕스는 계속하여 전문화를 주장했다. 그는 상업부동산에 진출하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만일 어느 날, 완커가 주택전문화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설사 관 속에 누워있더라도, 손을 들어 반대할 것이다. 설사 어느 날인가 중국에 더 이상 주택이 필요없게 되더라도, 나는 도시의 마지막 주택은 완커가 짓기를 희망한다."

 

그후, 왕스와 위량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말한 내용에서 완커 내부의 미묘한 갈등을 드러냈다. 그러나, 왕스가 직접 발탁해서 끌어올린 위량이 감히 공개적으로 '대부'인 왕스와 대항하다니, 이를 보면 완커의 내부역량이 이미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량이 총경리가 된 후, 왕스의 설계하에, 쉬홍거는 지위가 위량보다 하나 아래인 상무부총재가 된다. 이 조치는 의미심장하다. 업무상 필요인지 아니면 권력균형의 문제인지. 심지어 언제든지 위량을 대체할 제3대 후계자인지...

 

지금 왕스는 멀리 타향으로 떠났다. 쉬홍거도 사직하고 떠났다. 이것은 위량과 왕스간의 암전이 위량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