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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조조묘(曹操墓)의 고고학증명은 잘못되었다.

by 중은우시 2012. 1. 12.

글: 진경원(陳景元)

 

마르크스는 말했다. "역사는 왕왕 놀랍게도 닮은 점이 있다"고. 최근 들어 섬서의 '화남호랑이' 사건과 하남의 '조조묘'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더욱 깊어졌고, 철저해졌다. 자료를 대비, 분석, 사고 및 연구하면, 한가지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과거 '화남호랑이'사건에서 발생했던 모든 일이, 현재 '조조묘'논쟁과정에서 계속 발생한다는 것을. '조조묘'는 '화남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날로 발전하는 인터넷기술의 발전에 따라 여하한 구속도 받지 않고, 많은 네티즌들이 지헤와 역량을 발휘할 수있었다.

 

당초 섬서성 평현의 한 주씨성의 농민이 깊은 산에서 야생 '화남호랑이'의 최신 사진을 찍었다고 발표하고, 이 빅뉴스가 여러 매체에 공표된 후, 현지의 일부 부서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가졌던가. 국가는 야생동물보호에 사용할 경비를 금방 지방으로 내려보냈을 것이고, 화남호랑이를 발견한 당사자도 아마 적지 않은 보상금을 받았을 것이다. 중국의 네티즌은 확실히 대단하다. 그들은 현미경을 가지고 사진의 세세한 점까지 관찰했고, 호랑이무늬 하나, 들풀 하나까지도 살펴보았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형사감정전문가인 이창옥 선생까지도 진위판결의 대열에 가담했다.

 

거의 하룻밤만에, '화남호랑이'사진의 진위에 대한 의문과 공격의 목소리가 전체 중화대지를 휩쓸게 된다. 섬서의 일부 사람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고급전문가의 감정회를 개최한다. 회의후에는 '화남호랑이' 사진은 사실이라고 발표한다. 화남호랑이의 사진을 찍은 사람은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인격으로 담보하겠다고 말한다. 성급주무부서의 청급간부도 연설을 톻애서, 화남호랑이가 섬서에 나타났다는 것은 뒤집을 수 없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보기에, 그들은 작정을 하고 이렇게 한 것이다. 외부인들이 과거의 통상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써서는 절대로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기세였다.

 

"수재는 집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다 안다" 지금은 무소불능의 인터넷시대이다. 집안에 컴퓨터만 한 대 있으면, 네티즌들이 관심을 가지는 어떤 일이건 마우스만 한번 가볍게 클릭해도, 수천수만의 최신동태와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이런 정보는 찰나간에 보통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섬서성 진평의 화남호랑이가 나오자 마자 거의 힘도 들이지 않고, 섬서 변방의 농촌에서 '화남호랑이'의 사진이 든 연화(年畵)를 발견한다. 그리고 동부의 의오(義烏)에서는 연화를 인쇄한 공장을 찾아낸다. 연화의 '화남호랑이'와 섬서 사진상의 '화남호랑이'는 똑같았다. 섬서 '화남호랑이'의 진상은 천하에 그대로 밝혀진 것이다.

 

이런 일이 한번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남 안양에서 괴이한 일이 하나 발생한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눈에 띄지도 않는 고묘가 돌연 '조조묘'로 선포된 것이다. 거의 하룻밤만에 그 진위문제는 즉시 많은 네티즌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그 기세는 마치 폭풍우와 같았다.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하남의 일부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그래서 전문가감정회를 개최하여, 회의후에 '조조묘'가 맞다고 발표한다. 한 고고학계의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고고학을 모르는 사람들과 공통된 언어가 없다. '조조묘'를 논증하고 감정하는 것은 고고학계의 일이다. 외부인들은 간섭하지 말라."

 

보기에 그들은 작정을 한 것같았다. 외부인들이 과거의 통상적인 방법이나 수법으로 그들과 싸우려 하면, 그들은 절대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태세였다. 그들이 왜 이처럼 고집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가진 의견을 귓전으로 흘려듣는가? 원래 수십년동안, 고고학계의 내부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사람의 본거지에서 발견된 문화재는 그 사람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고학계의 태두인 서평방의 부정적인 의견까지 감히 묵살하였다. 하물며 예방육이나 다른 많은 네티즌들의 의견도 모조리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화남호랑이'의 진위를 다루는 문제에서, 절대적인 살상력을 지닌 의오의 연화를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조묘의 진위를 다루는 문제에서도 반드시 절대적인 살상력을 지닌 믿을만한 사료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안앙의 이 고묘가 한위시대의 진정한 조조묘와 연결될 가능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뒤집을 수 있다.  진실한 조조묘의 배경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하여야 진정한 조조묘의 역사적인 면목이 점점 수면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하남의 일부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고, 국내외에서 조조묘의 진위문제에 관심을 가진 많은 네티즌들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뱀을 잡으려면 심장을 때려야 하고(打蛇打七寸), 소를 길들이려면 코를 꿰어서 끌어야 한다" 즉, 문제의 핵심을 찔러야 한다. '조조묘'의 급소는 어디에 있는가? 원래 여하한 지하유적지, 지하무덤, 지하공사도 모두 건축학의 전문범주에 속한다. 과거의 고고학계는 건축학계와 의견이 다르면 모조리 배척했다. 이것은 원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역대이래로 큰 장인과 공부대신을 맡은 것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고대공사의 총건축사이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고대의 건축설계, 건축구조, 건축시공등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조조묘'의 연구의 주도권을 건축학자들이 빼앗아 와야 한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되는 유일한 길이다.

 

소위 '격항여격산(隔行如隔山)'이라는 말이 있다. 건축을 모르고, 건축도면을 그릴 줄 모르는 고고학자가 어찌 건축발전의 규율과 특징을 알아내겠는가? 건축학자들은 방을 보고 그 대들보와 기둥을 헤아려보기만 하고, 그 넓이를 계산해보기만 하고, 그 채색화를 살펴보기만 해도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 몇품관직인지를 안다. 고고학자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모두 비전문가이다. 과거 건축학자가 고고학을 논할 때, 자주 상대방에서 비전문가로 치부되곤 했다. 설마 고고학자들이 건축에 대하여 계속 얘기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비전문가의 말로 치부되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고고학자들이 건축학자의 앞에서 건축을 얘기한다는 것은 공자앞에서 문자를 쓰는 격이다.

 

중국에 있는 각종 유형의 건축은 원시사회부터 당송원명청을 거쳐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각각의 서로 다른 발전단계가 있다. 서로 다른 종족, 지역과 사람의 구분이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권력, 지위, 신분과 습속을 지녔다. 심지어 아주 엄밀한 국가기구와 사회집단에서 그들중의 모든 구성원들은 등급제도와 예의제도를 엄격하게 따졌다. 건축자체는 정권, 제도와 부의 상징이다. 그래서 지상건축이건, 지하건축이건, 반드시 엄격한 등급의 구분이 있다. 이는 바로 여하한 시기의 건축이든 모두 자신의 강렬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1년 12월 22일, 하남성 고고연구소의 반위빈 선생은 제249기 <중국사회과학보> 잡지에 <조조묘의 고고학증명>이라는 최신 글을 발표했다. 그는 글에서 특별히 한 가지를 강조했다: "묘장등급이 주로 나타나는 것은 묘장의 평면형태와 건축구조상의 차별이다. 안양의 이 묘장의 형태는 완전히 한위제왕능묘의 특징에 부합한다; 조조가 죽기 전에, 이미 제왕의 모든 특권과 예제를 취득했고, 그의 묘에서 출행의장 예를 들어, 노박(薄), 순거(車)등이 있었다. 이는 충분히 증명한다. 조조는 당시에 이미 천자의 규격으로 안장되었다는 것을."

 

안양의 이 고묘를 왜 반드시 조조와 긴밀하게 연결시키려 하는가? 그의 기본관점은 이 고묘에는 '사각찬첨(四角尖)'의 묘실 천정이 있는데, 이런 구조는 동한중기이후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한말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한전기의 여러 제후왕의 묘장에는 제주석장의 회랑다실묘이다. 그런데 동한말기가 되면 제후왕은 위진시기의 고급묘와 같이 단묘도, 전후실 및 사측실(혹은 耳室)을 가지고, 궁륭정전실묘이다. 동한말기에 이미 나타난 이런 묘실구조는 안양에서 발견된 이 묘가 동한말기의 조조묘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의문이 없다는 것이다.

 

반위빈은 동한전후기묘실구조를 대비한 후, 안양의 이 고묘는 바로 조조묘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동한말기에 출현한 각종 전구조묘장과 한위시기의 고등급의 묘장을 연결하여 본 것이다. 당시 천자의 묘장제도와 함께 묶어버린 것이다. 이는 서로 섞어서 혼동이 되게 하였다. 아쉽게도 그의 모든 이런 '고고학증명'은 100% 잘못된 것이다. 그는 '반대파'를 공격하면서 항상 한위시기 묘장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공격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다: 진정으로 한위시대의 묘장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설마 반위빈이 감히 동한말기에 출현한 '사각찬첨' 묘실이 바로 한위시기 최고등급의 묘장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반위빈이 감히 이 동한말기에야 출현한 '사각찬첨' 묘실이 바로 한위시기 제왕과 왕실구성원이 반드시 채택할 지궁건축구조라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반위빈은 무엇을 근거로 동한의 전기제왕의 묘장은 여전히 제주석장과 회랑다실묘이고, 동한말기의 제왕묘장은 돌연 단묘도, 전후실 및 사측실, 궁륭정이 있는 벽돌구조라고 단언한단 말인가? 물어보겠는데, 동한의 어느 황제의 묘가 벽돌구조인가?

 

사실 반위빈은 <조조묘의 고고학증명>이라는 글에서, 이미 조조 생전의 신분, 지위와 권력을 모두 '천자'라는 두 글자에 맞추었다. 그는 말했다: 조조는 입조하여 헌헌제를 만날 때 찬배불명, 검리상전하여 지위가 제후왕보다 위였으며, 금새, 적불을 하사받았다; 조조는 위왕의 작위를 가지고 천자의 정기를 지니고, 출입했다. 왕관이 위에는 더더욱 12개의 옥류를 추가했다; 조조는 생전에 이미 제왕의 모든 특권과 예제를 취득했다; 그의 출행은 금근거를 타고, 육마를 몬다. 이런 모든 것은 천자가 누리는 최고규격과 동일하다. 이때의 조조는 위세가 대단했다.

 

만일, 반위빈이 조조를 천자의 예로 안장했다는 말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죽음은 산것과 같이 본다'는 이념으로 본다면, 조조가 서거한 이후, 한헌제는 당연히 천자의 규격과 예의로 그를 위하여 융중한 국장을 치러주고, 그를 위하여 최고등급의 능묘를 만들고, 조조가 생전에 여섯마리의 말로 하여금 끌게 했던 금근거, 최고권력을 상징하는 금새, 그리고 그가 머리에 썼던 금관옥류를 하나하나 모두 능묘 안에 넣었어야 한다. 그래야 상리에 맞는다. 그러나 반위빈이 조조묘라고 하는 그 묘에는 이런 천자의 장례와 관련된 기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조의 천자지위를 부인할 수 없다면, 왜 안양의 이 묘에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조조묘'가 한위시대 천자묘장의 여하한 특징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한위시대의 제왕묘장이 갖추어야 할 최고등급의 건축구조의 기본특징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실, 반위빈이 말한 '동한전기제왕, 제후왕이 묘장은 제주석장이고, 동한말기 제왕, 제후왕의 고등급묘장은 궁륭정전구조묘'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는다. 동한에서 조위시기까지, 천자의 최고등급묘장제도가 어떠했는지 지궁의 건축구조형식은 어떠했는지는 당시의 여러 사료에서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한말기 조조가 서거한 후, 한헌제는 최고등급의 천자예의제도로 융중하게 그를 안장하였다. <진서.예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능의 위에는 최고등급의 거대한 건축을 세우고, 구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한헌제가 즉시 자신의 황제위를 정식으로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선양했다. 조비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예의로 대하며, 한헌제를 산양공으로 모신다. 그의 신분과 지위는 모두 제후왕보다 높았다. 그는 조정에 나와서 아뢸때, 칭신할 필요가 없었고, 황제의 명을 받을 때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깥나들이할 때의 가마나 복장, 천지에 제사지내는 것도 예전과 똑같히 천자의 예우로 했다. 한헌제는 양위한지 14년후에 서거하는데, 위명제 조예는 천자의 예로 그를 안장했다.

 

동한시기, 한헌제는 먼저 최고등급의 천자예우로 조조를 안장한다. 나중에 조비의 아들인 한면제 조예는 역시 최고등급의 천자예우로 융중하게 한헌제을 안장한다. 이것은 모두 한위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누군가 물을 것이다: 이 역사시기내의 천자묘장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후한서.헌제기>의 관련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천자장(天子葬), 중황문(中黃門), 호분(虎賁), 각이십인집비(各二十人執緋), 사공택토조천(司空擇土造穿), 태사복일(太史卜日), 장작작황장(將作作黃腸), 제주(題湊), 비장삼십장(緋長三十丈), 위칠촌(圍七寸), 대행(大行), 행오십인(行五十人), 공경이하자제삼백인(公卿以下子弟三百人), 집사하명기(執事下明器), 사공장교복토(司空將校覆土)"

 

"택토조천"은 천자능묘를 짓는데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즉, 현장으로 가서 최후의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고, 그 후에 지궁의 설게에 따라 땅을 위에서 아래로 네모나게 파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황장제주의 지궁을 만든다. 그 후 영구를 여러 사람들이 들고서 서서히 내려놓는다. 제 자리에 들어가면 집사는 다시 여러 기물을 집어넣고, 네모난 나무조각으로 엄밀하게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목탄과 석고들을 넣는다. 그리고 다시 흙을 다져서 전체 지궁공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 후에 지상건축을 진행한다. 황장제주의 묘실에 찬첨의 천정은 없고, 궁륭정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비단으로 영구를 맨 사람들이 천자의 영구를 황장제주의 밑바닥에 집어넣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후한서.예의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대상(大喪), 태자즉일즉천자위어구전(太子卽日卽天子位於柩前), 사공택토조천(司空擇土造穿), 태사복일(太史卜日)....방석치황장제주(方石治黃腸題湊), 편방여례(便房如禮)". 그리고 <후한서.예의지>의 주석에는 이런 말이 있다: "천자즉위명년(天子卽位明年), 장작대장영릉지(將作大匠營陵地). 영용지칠경(用地七頃), 개장지내방(皆藏之內方)" 이를 보면, 동한후기의 천자능묘는 황장제주의 벽체를 지녔는데, 이미 원래의 황장목을 황장석으로 바꾸었고, 묘의 윗부분은 돌로 덮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천정은 편평했고, 그 방식은 광주의 남월왕묘실과 비슷하다.

 

<후한서.예의지>에 "장작대장영릉지"라는 말에서, 역대이래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는 자주 끝에 붙은 '지(地)'자를 빼버리곤 했다. 그 결과 천자가 즉위하면 볼 다음해부너 즉시 자신이 능묘를 건조한다고 해석하곤 했다. 사실, '영릉지(營陵地)'와 '영릉(營陵)'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영릉지'라는 것은 그저 '영릉'의 공사중 일부 전기업무를 의미한다. 그것은 주로 제왕을 위하여 한개 혹은 수개의 적합한 묘지용지를 고르고, 미래 건설의 준비방안을 마련하며, 영릉지점의 지형, 지질, 풍향, 일조, 수문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형의 공사이다.

 

영릉지의 전기업무는 아주 길고 변화도 많다. 진정한 '영릉'공사의 공기는 아주 짧다. <예기.왕제>에는 "천자칠일이빈(天子七日而殯), 칠월이장(七月而葬)"이라고 되어 있고, <예기>에는 '천자붕(天子崩), 칠월이장(七月而葬)"이라고되어 있으며, <순자.예론>에도 "천자칠월(天子七月), 제후오월(諸侯五月)"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모두 천자가 사망한 날로부터 매장되기까지 넘겨서는 안되는 '장례기간'이다. 즉, 땅을 파고, 황장제주를 쌓고, 내부를 정리정돈하여 천자를 매장하는 과정에서 지켜야할 총 기일이다. 황장제주의 공기는 7개월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제왕이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미리 공사를 시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위나라까지, "의산착석(依山鑿石)"의 방식을 채택하여 은폐성이 좋고, 공기가 긴 지궁을 만든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천자 및 제후왕의 능묘는 모두 황장제주라는 지궁구조를 채택했다. '황장제주'는 비록 황제 특유의 최고등급의 묘장이지만, 다른 사람이 사망한 후, 만일 천자의 특별허가를 받으면 채용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서.곽광전>에는 곽광이 죽은 후 황상 및 황태후가 친히 장례식에 참석하고 황장제주 1구를 하사했다고 되어 있다. <한서. 동현전>에도 한애제는 동현을 위하여 황장제주를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장제주는 제왕, 제후왕이 사망한 후, 채택하는 최고등급의 지궁구조이다. 그렇다면 조정의 대신이나 다른 왕족구성원의 묘장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처음에는, 그저 목곽분을 건조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으로 묘실의 벽체를 삼고, 묘천정과 사방에서 밀려오는 흙의 압력을 견디는 것이다. 소형벽돌을 사용하여 소형전실묘가 나타나기도 했다. 한위시기에는 심지어 왕공귀족들이 각종 형식의 벽돌구조묘를 취한다. 그러나, 반위빈이 자신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단지 당시의 고등급의 묘장일 뿐이다.

 

반위빈이 왜 감히 벽돌구조묘가 당시 최고등급의 지궁구조라고 말하지 못한 것일까? 고등급묘장과 최고등급묘장은 비록 한글자 차이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최고등급의 황장제주가 주요 표지인 지궁은 제왕만이 채용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급의 벽돌구조가 주요표지인 지궁은 그저 '이등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다. 충분한 자료가 설명한다. '1등귀족'인 황제가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벽돌구조의 묘에 묻힐 수는 없다; 그리고 2등귀족이 예제를 무시하고 고귀한 황장제주에 묻힐 수도 없다.

 

황장제주 지궁은 어떤 상황하에서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는가? 황장제주는 처음에 최고급 목재를 썼다. 네모난 나무조각으로 만든 다음에, 아래에서 위로 쌓아서 벽체를 만들고, 영구가 묘에 들어간 후에 다시 천정을 덮는다. 그 특징은 묘실의공간이 크고, 밀폐성이 좋다. 결점은 목재소모량이 많아서, 큰 나무를 많이 벌채하기 어려운 점에 있다. 그래서 황장목은 점차 황장석으로 대체된다. 석재가공기술이 진보하면서, 황장석 벽의 기초위에 벽돌을 둥글게 쌓는 묘천정이 점차 최고등급의 제왕지궁구조로 된다. 그러나, 한위시기에는 여하한 벽돌구조의 지궁도 천자의 황장제주를 대체한 적이 업삳.

 

반위빈 및 그 지지자들은 한편으로 조조가 천자의 예로 안장되었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안양의 조조묘는 '고등급'의 벽돌구조라고 떠벌린다. 사실 양자는 그 자체로 모순되는 것이다. 조화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반위빈 및 그 지지자들이 만일 믿을만한 자료를 낸호아 한위시기의 제왕릉에 확실히 이미 황장제주라는 최고등급 지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거나, 한위시기의 벽돌구조묘가 바로 천자의 최고등급묘장이라고 증명하지 않는다면, 네티즌들은 '그들의 창으로 그들의 방패를 공격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안양의 묘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미전혀 다른 두 개의 견해와 관점이 있다. 논쟁의 쌍방은 얼마나 많은 지지자가 있던간에, 학술쟁명의 논단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질문자이건 질문을 받는 자이건, 운동선수가 심판을 겸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심판은 상방이 모두 말을 마친 후에, 진지하게 살펴보고 감정하는 많은 네티즌들이다. 이것은 아주 엄숙한 학술도덕문제이다. 백가쟁명은 중앙이 견지하는 학술방침이다. 그런데, 질의를 받는 자들은 지금까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상대방과의 평등한 교류를 거절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없다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