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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조조무덤: 가설은 진실이 될 수 없다

by 중은우시 2010. 8. 26.

글: 임규성(林奎成)

 

소주회의 이후, 조조가 '위무왕(魏武王)'이라는 칭호가 존재했는지의 문제에 대하여, 전 하남성문물고고연구소 소장 학본성(本性) 선생과 안양시 고고대 대장 반위빈(潘偉斌) 선생이 즉시 반응을 나타냈다. 이는 아주 좋은 현상이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전제이다. 그러나, 두 선생의 회신글을 본 후에 느끼는 점은 두 선생이 모두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학선생의 주장을 보자:

 

"조조무덤에서 '위무왕'이 새겨진 석비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사서에는 위무왕에 관한 기록이 정확하게 나타난 적은 없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이다. 고대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망하면 모두 시호를 받는데, 이 시호는 최소한 당시에 한나라황제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등급이 높기 때문에, 민간에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수 있고,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조조가 사후 20여일만에 매장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고위층 권력변동이 있는 때여서, 역사배경이 비교적 복잡하였고, 시간도 너무 짧아서, 혹은 사서에 기록하지 못하였거나, 기록은 했으나 유실된 것이거나, 혹은 기록이 있으나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동시에 매장을 아무리 급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위무왕'이라는 석비를 새기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짧은 글에서 '가능성도 있다'라는 말을 두번이나 쓰고, '혹은'라는 말을 두번이나 썼다. 증거는? 하나도 없다! 학선생도 역사학의 기초는 배웠을 테니까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증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학술변론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기본법칙이다. 가설을 내놓을 수는 있고, '가능성도 있다'라든지 '혹은'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드시 증거를 내놓고 너의 '가능성'이나 '혹은'을 증명해야 한다. 증거가 없는 가설은 학술의 규범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런 가설은 내가 말할 필요도 없고, 공개평가를 받을 필요도 없이, 학선생 자신이 스스로 학술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더 잘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조에게 '위무왕'이라는 칭호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장제도의 각도에서 깊이있게 고찰한 것외에 265년 조위가 멸망하기 전후의 모든 사적을 뒤져보았다. 이러한 기초위에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현재 학선생은 이 결론을 뒤집고자 하는데, 물어보자. 상응한 작업을 당신은 했는가? 하지도 않고 그저 당신의 '가능성도 있다'라든지 '혹은'이라는 말로 나의 결론을 뒤집을 수 있는가?

 

사실상, 학선생은 논증에서 근거가 없다는 잘못을 저지른 외에, 사실을 기술하는데에서도 잘못을 저질렀다. 예를 들어, 학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조조가 사후 20여일만에 매장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고위층 권력변동이 있는 때여서, 역사배경이 비교적 복잡하였고, 시간도 너무 짧아서, 혹은 사서에 기록하지 못하였거나, 기록은 했으나 유실된 것이거나, 혹은 기록이 있으나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이 주장은 사실에 심히 어긋난다. <<삼국지.위지.무제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건안)25년 봄 정월....왕이 낙양에서 붕어하다. 나이 66세이다...시호는 무왕(武王)이다. 이월 정묘, 고릉에 매장하다." 조조의 사망시간, 사망장소, 매장시기, 매장장소, 그리고 더욱 중요한 시호까지 모두 명명백백하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 어찌 이런 사실을 놔두고서, 굳이 '사서에 기록이 없다' 혹은 '기재되었지만 이미 유실되었다' 혹은 '기재되었지만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삼국지>>에는 글자가 명백히 쓰여있는데, 학선생은 두눈뜨고 보지 못했단 말인가? 학선생은 하남성의 문화재 전문가로 박학다식한데, <<삼국지>>조차 읽어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마도 '위무왕' 세글자 때문에 고의로 '시호를 무왕이라 하다'는 것에 대하여 회피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가들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나는 학선생에게 학문태도를 단정하게 하기를 권고한다. 그후에 학술규범의 틀 안에서 문제를 토론해야, 나온 결론이 공신력을 얻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왕"의 앞에 "위(魏)"를 붙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대하여, 학선생은 당연히 '조조는 생전에 위왕이었으므로, 사후에 '무왕'의 시호를 얻었으니, 매장시에 '위무왕'이라고 하였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이상한 일이냐는 것이다. "만일 학선생이 진지하게 중국고대의 전장제도를 연구해보았다면, 나는 확신한다 그도 자신이 한 주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이 문제는 내가 <<위무왕상소용 석비는 위조되었다>>는 글에서 이미 분명히 설명했다. 학선생이 나의 글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 다시 얘기했으면 좋겠다.

 

이와 비교하면, 반위빈 선생의 회답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반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생전에 확실히 '위무왕'이라고 칭한 바가 없다. 만일 그 당시에 조조를 '위무왕'이라고 칭했다면 그것은 조조 본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동문서답이다. 지금까지, 조조가 생전에 위무왕이라고 칭해진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논쟁의 촛점은 조조의 사후에 매장할 때 어떻게 호칭하느냐의 문제이다. 조조의 생전칭호는 사서에 명백히 기록하고 있고, 오늘날도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다. 컨센서스를 이룬 것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해서 변명자료로 삼다니, 이는 가소로운 짓이 아닌가? 그런데, 곧 이어 반선새은 급전직하한다: "조조는 2월에 고릉에 매장된다. 조비는 8개월후에 한나라를 대체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고 조위정권을 건립한다. 그 부친을 무황제로 추존했다. 그후 사람들은 조조를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위무제라 칭한다. 그러므로, 위무왕은 바로 그가 사후에 조조가 황제를 칭하기 전의 짧은 8개월간 사용한 것이다" 조조가 '무황제'에 추존된 후 사람들이 '위무제'라고 칭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찌 돌연 '그러므로, 위무왕은 바로 그가 죽은 후 조비가 황제를 칭하기 전까지 짧은 8개월동안 사용한 것이다'라고 결론내린단 말인가? 양자간에 무슨 인과관계라도 있는가? 이것이 그 하나이다. 그 둘은 반선생은 말한다: "위무왕은 바로 그가 죽은 후 조비가 황제를 칭하기 전까지 짧은 8개월동안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으 대담한 가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학선생의 가설과는 같지 않다. 학선생은 여지를 남기는 '가능성이 있다' '혹은'이라는 것과 같이 확정적이지 않은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반선생은 대담하게 아주 확정적으로 '바로'라는 말을 썼다. 기세는 대단하지만 이치에 닿지는 않는다. 이 가설도 마찬가지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 완전히 주관적인 억측이다. 반선생이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려면, 반드시 '잛은 8개월동안' 조조가 '위무왕'으로 칭해졌었다는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반선생은 <<송서>>와 <<통전>>에서 조조를 '위무왕'이라고 칭한 두 개의 증거를 찾아냈다. 이것은 우스개이다. 당신은 손안에 '위무왕상소용'이라는 석비를 몇 개 가지고 있지 않느냐. 너는 이들 석비가 '조조무덤'에서 파낸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토론하는 것은 바로 조조무덤에 '위무왕'이라는 세 글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냐. 바꾸어 말하면, 내가 금방 강조한 것처럼 조조가 죽은 후 매장할 때 어떻게 칭호했느냐는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조위왕조때 조조를 어떻게 호칭했느냐의 문제이다. 알겠는가?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조위는 265년에 멸망한다. <<송서>>의 작자인 심약은 남조때의 양나라 사람이다. 그 사이에 2백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통전>>의 작자 두우는 당나라 사람이다. 중간에 500여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위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조조를 칭하는 것은 조위시대의 예의 범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위무왕'이 누구인지, 오해만 생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시대가 뒤진 증거를 가지고 앞의 사건을 증명하려는 것은 사가의 금기이다. 반선생이 이런 상식조차 갖추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때 전국에 유명했던 드라마중에 강희대제라는 것이 있다. 그 안에는 보얼지지터씨 황태후가 입만 열면 '나 효장은..."이라고 스스로를 칭하였다. 효장은 시호이다. 보얼지지터씨 자신조차도 자신이 죽은 후에 효장이라고 불릴지를 몰랐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스스로를 칭한단 말인가? 이처럼 황당무계한 칭호도 시청자가 헷갈리지만 않으면 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TV드라마라는 것은 오락이다. 시청자가 '효장'이 누구인지만 알면 되는 것이다.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엄격한 사실(史實)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반선생은 지금 이런 장난을 치고 있다. 역시 대답은 소대가리에 말주둥아리를 붙인 꼴이다.

 

'조조무덤'의 문제는 헛점투성이이다. 메꿀 방법이 없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증거가 확실하다느니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다니. '위무왕상소용'이라는 석비를 놓고 말하자면, '위무왕'이라는 것은 조조생전과 사후의 조위왕조때 아예 쓴 적이 없는 것이다. 억지로 가능하다고 말하려면 반드시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가설은 안된다.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만 가지고 어떻게 물밀듯이 밀려오는 의문들을 막아낼 것인가? '혹은'이라는 두 글자로 어찌 천하의 입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