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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조조의 무덤에 대한 역사상 10가지 기록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산첨자(山尖子) 

 

사람들은 조조의 묘를 '천고의 수수께끼'라 부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어디인지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조조묘가 원래는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기록상 이미 답이 적지 않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 10개는 된다.

 

1. 당나라때의 왕발(王勃, 649 혹은 650 - 676 혹은 675)의 동작기(銅雀伎)>에는 조조묘가 동작대(銅雀臺)의 '서북'에 있다고 하였다. "고대서북망(高臺西北望), 유체향청송(流涕向靑松)"(높은 동작대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며, 푸른 소나무를 향해 눈물을 흘린다)

 

2. 당나라말기 재상 이길보(李吉甫)는 "현서30리(縣西三十里)"라고 하였다.

이길보(758-814)가 쓴 <원화군현지(元和郡縣誌)>를 썼는데, 그중 업현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무제의 서릉은 현의 서쪽 삼십리에 있다"

 

3. 송나라때 조조묘의 수총호(守塚戶)를 업서(鄴西)에 설치한다.

<송사>에 따르면, 조광윤 건덕초년(963년), 역대황제의 묘에 수총호를 설치한다. 그중 위태조 조조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남송사람 왕명청의 <휘진록>에 따르면, "위무제는 고릉에 매장되었는데, 업현의 서쪽에 있다"고 적었다.

 

4. 송나라때 재상 왕안석(王安石)은 처음으로 "의총설(疑塚說)"을 내놓았다.

왕안석(1021-1086)년 <장차상주(將次相州)>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청산여랑입장주(靑山如浪入漳州), 동작대서팔구구(銅雀臺西八九丘)". 여기의 '팔구구'는 나중에 '칠십이의총(七十二疑塚)'으로 발전하고 이 설을 따르는 사람이 아주 많다.

 

5. 남송시인 범성대(范成大)는 조조의 무덤이 강무성(講武城) 밖의 고사(古寺)에 있다고 말하였다.

남송 범성대(1126-1193)의 <남비록>에 이런 말이 있다: "장하를 넘고, 조조의 강무성으로 들어갔다. 주변 수십리에 성밖에 조조의 의총 칠십이개가 있고, 수리에 걸쳐 흩어져 있다. 전해지기로 '조총정재고사중(操塚正在古寺中)'이라 한다."

 

6. 원나라때 사람 납신(納新)의 <하삭방고기>에는 업진의 서남30리에 있다고 하였다.

<하학방고기>를 기록한 때는 1345년이다. 그중에 이런 말이 있다: "위무고평릉(魏武高平陵). 업진의 서남 삼십리, 주위의 이백칠십보, 높이는 일장육척이다. 십이월 나는 동작대에 올랐고, 서쪽으로 황량한 교외의 연기와 나무를 보았다. 영녕사의 승려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조공의 서릉(西陵)이다'"

청나라때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에는 이런 견해를 전달한다: "고평릉은 서릉이라고도 부른다. 현의 서남 삼십리에 있다. 즉 조조의 능이라고 한다."

 

7. 청나라 저가헌의 <견호속집>에는 장하저(漳河底)에 있다고 한다.

청나라때 저가헌(1625-1682)의 <견호속집>에 "장하조조묘"편에 이렇게 적혀 있다: "국조가 처음 세워졌을 때, 장하의 물이 말랐다. 물고기를 잡는 자가 있었다. 강의 가운데 큰 석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곁에 틈이 있는데 들여다보니 어두었다. 그래서 그 속에 물고기가 많이 숨어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틈으로 들어갔다. 수십보를 들어가니 석문이 하나 있었다. 마음 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했다. 나와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을 불러서 들어갔다. 처음에 문을 여니, 그 안에 미녀가 가득 있었다. 혹은 앉아있고, 혹은 누워있고, 혹은 기대어 있었다. 각각 두 줄로 나뉘어 있었다. 조금 있으니 모두 재로 바뀌어 땅 위로 흩어졌다. 석상이 있는데, 상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다. 관복은 왕과 같았다. 가운데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어부중 글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가갔더니 조조였다. 여러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베었다. 여러 미인들은 산채로 순장된 것이었다. 땅의 기운이 응결되어 살아있는 사람같았다. 문을 열게 되니 기운이 누설되어 모두 재로 변했다. 오로지 조조만은 수은으로 염을 하여, 그 피부가 아직 부패되지 않았다. 그래서 말한다. 의총 이외에 임금의 시신을 매장한 무덤이 하나 있다."

 

8. 청나라 포송령의 <요재지이>에서는 허창성(許昌城)바깥의 강바닥에 있다고 하였다.

 

포송령(1640-1715)의 <요재지이> 권10에 "조조총"이 있다: 허창성바깥의 강물이 사납고, 언덕에 가까운 곳에는 깊고 어두웠다. 한여름때 누군가 들어가 목욕을 했다. 돌연 칼과 도끼로 친 것처럼 시신이 잘려서 떠올랐다. 나중에 한 사람도 또한 그러했다. 기괴한 일이라고 소문이 났다. 읍재(邑宰)가 이 말을 듣고, 여러 명을 보내어 상류를 막았고, 그 강물의 바닥이 드러나게 한다. 언덕아래에 깊은 동굴이 있었고, 가운데 바퀴를 놓아두었다. 바퀴의 위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서리와 같았다. 바퀴를 없애고 들어가니 가운데 작은 비석이 있었다. 글자는 모두 한나라때 전서이다. 자세히 보니, 조맹덕묘였다. 관을 부수고 뼈를 흐트렸고, 부장된 금은재보는 모두 취하였다.

 

9. 등지성의 <골동쇄기>에는 "팽성 서족 십오리"라고 되어 있다.

 

청나라의 등지성(1887-1960)은 <골동쇄기>에서 '조조총'이라는 편에 이렇게 기록했다: "임술 정월 삼일, 자현의 향민 최노영은 팽성진의 서쪽 십오리를 매장지로 삼아서, 우물을 파서 무덤을 만들었다. 지사(地圯)는 흑혈이고, 계속하여 석실이 있고, 넓고 깊었다. 석문으로 들어간 자는 모두 죽었다. 그래서 현령 진희현에게 보고하였다. 독공이 유황을 넣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들어가 보았다. 실의 사벽은 새것처럼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석관이 놓여 있고, 앞에는 돌에 지문을 새겨놓았다. 거기에 쓰여진 것은 위무제조(魏武帝操)였다. 이전 오십년간 석실 십여곳을 발굴했지만, 모두 관이 없었다. 이제 진짜 무덤이 나타난 것이다. 석지는 지금 현청에 보관되어 있다. 무슨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방분해봐야 겠다."

 

10. 업 지역의 민요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장하의 물이 삼대에 부닥치며(漳水沖三臺), 조조의 붉은 관이 드러났다"

 

"장하수(漳河水), 충삼대(沖三臺) 츙탑삼대노출조조적홍관재(沖塌三臺露出曺操的紅官材)" 이 민요는 하북성 임장현 업성 유적지 일대에 널리 알려져 있다. 업성 현지인들의 조조묘에 대한 일종의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전파된 시기는 개략 청나라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