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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중국대학의 다섯가지 병폐

by 중은우시 2012. 1. 10.

글: 온유민(溫儒敏)

 

최근 10여년동안, 대학교육의 규모는 확대되어,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대학교육규모가 최대한 국가중 하나가 되었다. 엘리트교육에서 대중교육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젊은이들은 대학을 다닐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큰 성과이다. 다만, 많은 대학의 현실상황을 보면, 전진하는 과정에 새로운 문제가 있다. 심지어 '중병'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들을 다섯 가지로 개괄하여 '오병'이라고 칭해본다.

 

첫째 병폐는 "시장화(市場化)"이다.

 

이 추세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원인은 교육에 대한 투입이 여전히 심각하게 부족하고, 교육자원분배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매년 양회에서는 대표들이 제안을 하여 교육투입을 확대하도록 요구한다. 최근 들어 기초교육에 대한 투입이 확실히 증가했다. 그러나, 대학교육은 투입이 부족하다. 이것이 핵심문제이다. 국가의 투자가 부족하면, 학교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 적지 않은 대학들은 할 수 없이 학생을 늘려받아, 학비로 겨우 운영하고 있다. 다른 경우는 '수익창출'이라고 할 수 있는데(학교에 이런 단어는 옳지 않다고 본다), 각종 반(班)을 만들어 돈을 번다. 그러나, 분위기가 나빠지고, 사람들도 주목하지 않는다. 이래가지고야 교수들이 무슨 학생들을 가르칠 마음이 나겠는가? 현재 학교의 상업분위기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갈수록 세속화되고 있다. 시장화는 교육 특히 대학교육에 해를 많이 끼쳤다. 북대는 최근 몇년간 시장화, 상업화의 문제가 심각하다. 몇개의 단과대학과 학과는 계속하여 무슨 '반'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명목은 그럴듯하게 '사회에 서비스'하는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학교에 자금적인 도움은 어느 정도 되겠지만, 교풍이 흐려진다. 캠퍼스에 들어가서 한번 보라. 너무 시끄럽다. 도처에 무슨 광고플랭카드가 걸려있다. 어떤 과정이든 다 들어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무슨 CEO과정, 돈버는 과정이다. 누구든 돈만 있으면 북대에서 강의할 수 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은 입학하자마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조급하게 돈벌 궁리만 이리저리 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야 북대가 다시 '박아(博雅)'한 분위기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교수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살펴보자. 많은 교수들은 무슨 겸직교수이다. 어떤 사람은 학생을 가르치는데 시간을 별로 쓰지 않는다. 학생의 학습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중국에 이렇게 많은 좋은 젊은이들이 있는데, 왜 배양하지 못하는가? 현재 명교수들은 모두 본과에서 강의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수준은 이전보다 낮아졌다. 교수도 외부로 많이 유출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학교의 분위기를 망쳤다는 점이다. 북대의 어떤 단과대학, 학과는 교수의 수입이 매우 높다. 심지어 어떤 기초학과의 교수들보다 십여배, 수십배 높은 경우도 있다. 만일 외국교수를 데려온다면, 보수가 좀 높은게 당연하다. MBA와 같은 유형의 과정은 수익이 좋다. 학교에 수입을 많이 가져온다. 경비부족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중 하나이다. 그래서 일부분 교수들을 '먼저 부유하게' 만들어 조금 더 돈을 많이 가져가게 하는 것은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문제는 관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교수는 돈을 위하여 강의하고, 학교내에서 빈부격차가 나타나게 된다. 양극화현상이 나타난다. 학교가 시장이 되면, 사람들이 이익만을 쫓게 된다. 이것은 교풍건설에도 좋지 않고 학과건설에도 불리하다.

 

학교가 각종 과정을 앞다투어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중국대륙에 있는 대학의 한 현상이다. 세계각국에서 이렇게 이익을 추구하여 각종 과정을 만드는 것은 아마도 중국이 가장 심할 것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점이 있고, 이를 통해서 학교에 어느 정도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며, 교수들에게 수입을 늘려준다고 하더라도, 병폐가 너무 크다. 여기에 대하여 반드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학교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적당히 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가 철저히 시장화될 것이고, 병폐가 심각해질 것이다.

 

둘째 병폐는 "프로젝트화 생존"이다.

 

소위 '프로젝트화 생존'이라는 것은 현재 끊임없이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프로젝트를 말한다. 특히 그저 거품일 뿐이고, 학술적 가치가 별로 없는 프로젝트를 계속하여 추진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현재 이런 관리체계의 여건하에서 젊은 교수가 프로젝트를 신청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학술생산관리체제에는 이런 양적인 요건이 있다. 특히 이공계의 연구는 왕왕 프로젝트를 통하여 실행된다. 또한, 이익을 추구하는데 ,프로젝트는 모두 돈이 있다. 어떤 교수는 사실 돈을 노리고 프로젝트를 신청한 것이다. 이것은 기실 시장화의 병폐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학술부패는 심각한 수준이다. 가짜 성과, 가짜 학문이 온 천지에 깔렸다. 학술회의, 성과감정, 자격심사, 프로젝트심사과정은 각종 수단으로 통과한다. 마시고 먹고, 같이 놀고, 선물을 보내고, 꽌시를 동원하고,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실질적 내용으로 되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교수가 되지마자 '프로젝트화'생활로 하루종일 보낸다. 본과에서 강의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필자는 삼십년간 거의 매 1년마다 본과생들에게 수업을 했다. 지난 학기에도 1학년생들에게 기초과목을 강의했다. 이번 학기에는 산동대학에 왔다. 학교에서 나를 잘 보살펴 주어서, 나에게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이렇게 느낀다 스스로가 교수라면 강의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이번 학기에도 분학원의 본과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이것은 원래 당연히 해야하는 직무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뉴스거리가 되어 보도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를 보면 현재 '프로젝트화 생존'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현재 사회는 실용기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거둔다. 여론은 시장의 거품에 좌우된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하여 학습하고, 내재적인 사업충동은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을 다니는 것은 졸업후 인재시장에서 좋은 고용주를 만나기 위함이고, 좋은 가격에 팔리기 위함이다. 이런 단견적인 관념은 대학문화의 기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현대엘리트의 인격품질을 심각하게 부식시킨다.

 

셋째 병폐는 "평면화"이다.

 

대학은 가면 갈수록 특색을 잃고 있다. 즉, 평면화, 균질화되는 것이다. 원인중 하나는 모두 대형화, 업그레이드하려 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합병하는 것은 원래 좋은 일이다. 50년대 이래로 너무 잘게 쪼개어져 있었고, 체제상 폐쇄되어 있으며, 저수준의 중복이 많았고, 소규모종합대학의 모델을 취해 왔다. 특히 여러해동안 계속된 이익집단화, 소택화(沼澤化)를 타파애햐 한다. 많은 대학은 합병을 하고, 대형화를 꾀한다. 그러다보니 원래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 버렸다. 길림대학은 장춘의 주요 몇 개 대학을 거의 다 합병해버렸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 이제는 길림대학이 장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춘이 길림대학에 있다. 그래서 길림대학은 원래의 수준이 끌어내려졌다. 특색이 사라졌다. 무한은 원래 수리대학과 측회대학이 있었고 모두 특색이 있었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닐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한대학으로 합병되었다. 논문발표 지표는 올라갔지만, 특색은 보이지 않는다. 북대는 다행히 청화와 합병하지 않았다. 대학의 개성과 특색이 사라지는 것은 큰 문제이다. 현재는 모두 '평면화'하고 있다.

 

넷째 병폐는 관료화이다.

 

현재 관료사회를 관리하는 방식대로 대학의 행정체계가 되어 있다. 학교에도 무슨 부부장급, 정청(正廳)급등등의 구분이 있다. 동기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마도 학교에서 자원을 쟁취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다. 학교의 관료분위기를 심화시켰다. 정부부서에서 진급하지 못하는 관리가 대학에 가서 총장이나 서기를 한다. 이것은 대학을 더더욱 관료본위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단과대학의 당위서기중에도 일부는 고도로 직업화되어 모두 외부에서 파견온 사람들이다. 업무를 모른다. 그러다보니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이 측면에서 북대는 좀 낫다. 단과대학의 당위서기는 거의 대부분 그 과의 교수들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서기직을 물러나면 다시 교수로 일한다). 현재 대학관료화는 누가 총장, 서기가 되느냐에 따라 ,누가 자원을 더 많이 확보하느냐가 달려있다. 그리하여 어떤 교수는 정부부처의 과장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이것은 슬픈 일이다. 과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풍이 학교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의 교육과 연구를 진행하는데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관리는 지휘감독과는 다르다. 오히려 수업과 연구를 위하여 서비스하는 것이어야 한다.(교수에게 서비스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를 잘하면 성과도 잘 난다. 그러나 관리하는 사람이 반드시 관료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일부 학교에 가보니, 단과대학의 지부서기의 권한이 매우 컸다. 원장, 과주임을 지배했다. 층층이 관료분위기가 농후했다. 각종 경우에 그들은 서로 직함을 부르고, 마치 행정기관 내에 있는 것같다. 필자는 중문과의 과주임을 여러 해동안 했는데, 과안에서 '온주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칭호는 나부터가 불편하다. 많은 대학의 관료본위는 이미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약간의 직위만 가져도, 교수, 스승, 학생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걸핏하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한다. 이런 체제하에서, 어찌 '사상자유, 경용병포(兼容幷包)'의 학풍이 형성되겠는가? 더욱 심각한 것은 많은 대학의 서기와 총장의 직분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당위가 영도하는 하의 총장책임제'라고 하는데, 그러나, 최고책임자가 2명이 있는 것이다. 당정이 분리되지 않았다. 누가 최종책임을 지는가? 왕왕 둘 중 더 강한 사람이 '일인자'가 된다. 이걸 잘못 처리하면 내부투쟁이 벌어지고, 업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 다만, 어쨌든 방법을 생각해서 개선해야 한다. 관료본위는 인신종속을 조성하고, 지식분자의 독립적인 사상과 판단을 상실하게 만든다. 두뇌를 잃고 영혼을 잃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법제도와 얼키고 설킨 인간관계망의 부리가 성장하여, 근대이래 형성된 중국대학의 정신을 부식시키게 된다.

 

다섯째 병폐는 "다동증(多動症)"이다.

 

과거에 무슨 운동을 한다고 계속하여 힘들게 하였다. 이것이 '다동'이다. 현재에도 '다동'은 있다. 계속하여 개혁, 혁신을 한다. 계속하여 무슨 '전략' 무슨 '공정'같은 것을 한다. 방식이나 종류가 다양하여 어지러울 정도이다. 의도는 분명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의심스럽다. 교육은 현실을 약간 뒤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바꾸어서도 안된다. 어떤 실험은 몇년을 해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북대에서 실험반을 했는데, 몇번 하고는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았다. 무슨 종합결론도 없었다. 우리는 이를 "무질이종(無疾而終,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이라고 부른다. 곧이어 무슨 '원배학원(元培學院)'이라는 것을 했다. 지금은 전국대학이 따라하고 있다. 북대의 본과교육은 비교적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왜 또 일을 만드는가. 실험이라고 하더라도 과정이 있어야 하고, followup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감이 없어하며, 계속 개혁만 생각한다. 즉 노력을 하여 기반을 닦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 대학의 교수들은 본과교육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 이것이 큰 문제이다. 상급주관부서는 왕왕 실적을 보이기 위하여, '교육의 GDP"를 추진한다. 그래서 '다동'이라고 부른다. 학교는 자신의 핵심이 분명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다동'을 억제해야 한다. 필자는 북대 중문과의 주임을 9년간 맡았다. 전국대학의 중문과는 거의 모두 '승급' 하여 학원(단과대학)이 되었다. 나는 그걸 따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학원으로 바꾼다고하더라도, 전국대학의 중문과가 모두 중문학원이 된 다음에 승급시켜도 늦지 않다. 지금 모조리 '승급'했다. 그래도 거기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는 과주임을 하지 않고 있다. 이후 북대 중문과가 문학원으로 승격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 '다동'에 대하여, 우리는 '수정창신(守正創新)'을 주장해왔다. 어려운 조건하에서, 교학과 연구 및 과정건설을 하고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이것은 북대의 관용 덕분이다. 학교측이 우리를 그다지 핍박하지 않았다.'수정창신'은 지금의 가벼운 학풍에 대한 것이다. (북대와 많은 대학들은 모두 좋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수성(守成)해야 한다. 걸핏하면 이를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매일 개혁하려 해서도 안된다). 많은 경우에, 개선은 개혁보다 훨씬 실질적이다. 교육은 공장과 다르다. 교육은 축적이 필요하다. 너무 자주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수정'을 '창신'의 앞에 두었다. 이것은 우량한 학술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중효하고, 기초적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가벼운 교육의 '대약진'은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문도덕정신을 굳게 지키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