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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칭화대학 "오자반(五字班)": 2명의 국가지도자 3명의 장관을 배출한 학번

by 중은우시 2013. 3. 13.

글: 동남서북(東南西北) 

 

1959년 9월 11일, 17살의 청년이 가족과 친구들과 작별을 하고, 진포선(津浦線)를 타고 북상했다. 장강의 좌안인 타이저우(泰州)에서 경성으로 가는 것이다. 당시 아직 북경의 서교(西郊)인 청화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50년전의 이 중국공산당과 중국역사에 있어서 평범하지 않았던 여름에 전국 27개 성시의 751개 고등학교에서 온 2079명의 신입생이 칭화대학에 입학했다. 12개과의 33개 전공으로 입학하여 공부했다. 이들은 1965년에 졸업하였으므로, "오자반"이라고 불린다.

 

그들이 짐을 챙겨서 고등학교 선생님 친구 친척 이웃들과 헤어질 때, <인민일보>에서는 연속하여 '우경정서를 극복하자'는 사론이 실렸다. 국가사명감이 충만했던 청년들은 아마도 모두 그 글에서 화약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1개월여전의 7월 2일과 8월 16일, 중공중앙은 여산에서 정치국확대회의와 제8기8중전회를 개최하여, '좌'경착오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펑더화이(彭德懷), 황커청(黃克誠), 장원텐(張聞天), 저우샤오단(周小丹)의 소위 '반당집단'을 비판하고, <당의 총노선을 보위하고,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투쟁의 결의>를 했다는 사실을.

 

당시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의 이 "삼면홍기(三面紅旗)"는 중국의 상공에 휘날리고 있었다. 철강을 발전시키기 위한 불꽃과 연기가 하늘에 가득했고, 국민경제는 이미 문란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자반"의 신입생들은 이때 대부분 이런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그들은 열정에 불타 있었다.

 

"오자반"의 졸업쟁 중에는 3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전 성향건설부의 부장인 예루탕(葉如棠), 전 수리부 부장인 왕슈청(王恕誠), 전 사법부 부장인 장푸선(張福森). 그리고 적지 않은 각 분야의 전문가도 있다. 그중 3명의 중국과학원 원사와 4명의 중국공정원 원사도 배출했다. 동시에 2명의 당과 국가지도자도 배출한다. 1명은 우관정(吳官正)이고, 다른 한명은 이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그 청년이다. 그의 이름은 후진타오(胡錦濤)이다.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의 제16기대회에서 후진타오는 중공중앙 총서기가 된다.

 

소식을 들은 건오반(建五班, 토목건축과 1965년졸업생)의 루창(陸强)의 생각은 바로 1965년초의 큰눈이 내린 어느 오후로 돌아갔다. 당시는 "사청운동(四淸運動)"이 한창인 때여서 대학생인 루창은 허베이의 어느 농촌의 '사청'공작대에 참가했다. 당시 고등교육부 부장 겸 칭화대학 교장으로 있던 장난샹(蔣南翔)도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자주 칭화대학 학생들을 자신의 작은 집으로 불러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분위기는 아주 편안했다.

 

그 오후에 장난샹은 말했다: "한가지 구호가 있다. '칭화는 홍색공정사를 배양하는 요람'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전면적이지 않다. 당연히 우리는 홍색공정사를 배양할 뿐아니라, 우리는 당과 인민의 각 사업의 후계자를 배양해야 한다. 여기에는 미래 당과 국가의 지도자도 너희들 중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 말은 루창과 다른 동창들의 마음을 크게 진동시켰다. 교장의 작은 집을 떠나서 마을로 걸어가는 길에, 루창의 머리 속에는 그 교장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당시, 일반적으로 지식인은 자산계급의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듣기는 좋은 말이지만, 그저 일부 개조가 된 지식인만이 노동인민의 대오에 들어가도록 허용되었다."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되다는 것은 학생들이 당시에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이번 말은 루창에게 교장의 깊이있는 사고를 느끼게 해주었다.

 

"오자반"은 행운의 학번이다. 65년졸업생은 칭화대학이 스스로 학생을 선발했고, 순조롭게 6년의 교육전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6년의 기간동안 기초이념을 배우고, 전문기술, 교학실무, 과학연구실습을 배울 수 있었다. '학공,학농,학군', '진도진창필업설계'등 각 교육내용을 모조리 계획대로 진행했다. 그들은 1957년의 '반우파운동'과 1958년의 '대약진'의 피해를 받지 않았고, 이후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완벽하게 6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장난샹의 교육사상이 가장 완벽하게 교육된 학번인 셈이다.

 

전 칭화대학 당위제1부서기를 지닌 류빙(劉氷)이 보기에 당시 칭화의 성공은 교수, 관리에서 잘 한 것도 있지만, 장난샹의 교육사상이 가장 중요했다. 장난샹은 일찌기 청년운동의 지도자였고, 일찌기, "12.9"운동의 지도자중 한 사람이다. 칭화대학구국위원회으 <고전국민중서>에서 화베이학생의 공동목소리를 냈다. "화베이의 크기는 이미 평온한 책상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52년 12월, 장난샹은 칭화대학 교장으로 임명된다. 1963년에는 고등교육부 부장을 겸임한다. 부임하기 전에, 그는 동베이의 안산, 푸순, 하르빈, 선양, 다롄등지를 조사하고, 초보적으로 국가건설에 고급인재배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는다. <장난샹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선양 테시구의 한 길입구에서 노동모범 린종탕을 배우자는 표어를 본다(린종탕은 1949년 칭화대학 기계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행하던 동지가 '칭화는 린종탕과 같은 학생을 더욱 많이 배양해야 한다. 업무능력도 뛰어나고, 조직능력도 강하고, 정치표현도 좋은."

 

1958년, "대약진" "대련강철(大煉鋼鐵)"의 풍조가 대학캠퍼스에도 불어닥쳤다. 당시의 신문잡지의 선전에서 대학생이 보통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할 때였다. 장난샹은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보통노동자가 되라는 것은 정신상태를 말한다. 배양목표가 아니다. 학생은 노동해야 한다. 그러나 책의 지식도 익혀야 한다. 교실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장난샹은 칭화대학의 담장을 높이고 싶어했다. 학교가 담장밖의 정치풍랑의 영향을 가급적 적게 받기를 원한 것이다. 학생들에게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류빙의 말이다.

 

1961년, 당중앙과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아, 장난샹은 고등학교공작조례(중국의 고등학교는 한국의 대학교임)를 기초한다. 이는 "고교60조(高校60條)"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학교는 반드시 교학을 위주로 하고, 교학의 질을 제고하는데 노력해야 하고, 사회활동과 생산노동에 참가하는 것은 적절히 안배해야 하며 지나치게 많아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과거교육노선에 대한 일종의 시정이었다.

 

"고교60조"에는 이런 규정도 있었다. "학생의 사상정치공작을 잘하여, 홍(紅)과 전(專)의 관계를 정확치 처리한다."

 

1958년부터, 전국에서 홍전문제에 대한 대변론이 벌어진다. 전기공정과 s반의 왕신펑(王心豊)은 이렇게 회고한다. 1959년이전에, 누구든지 '백전(白專)'의 모자를 쓸 수 있었다. 몰래 전공서적을 보면서 <홍기>잡지로 가리곤 했다.

 

전 성향건설환경보호부 부장이며 건오반인 예루탕은 입학후 첫 겨울에 '홍전대변론'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을 '입학세례(入學洗禮)'라고 불렀다.

 

당시의 캠퍼스에는 "선홍후전(先紅後專)", "선전후홍", "홍전분공(紅專分工)"의 각종 서로 다른 견해가 떠돌았다. "이것이 바로 이번 변론이었다." 전 교육부장 허동창(何東昌)의 부인이며, 당시 칭화대학 기초과위원회 주임이었던 리줘바오(李卓寶)의 회고이다.

 

고등학교단계에서 계속 반간부를 맡다가, 대학에 들어와서는 아무 직도 맡지 않게 된 예루탕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전체 반 90명의 앞에서 자신의 진실한 생각을 말한다: "정치적으로 조직에서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있지만, 나는 전공에서 더 노력할 것이다. 장래 마찬가지로 국가를 위하여 여러가지 공헌을 하겠다. 그 때가 되어서 다시 '홍'이 되어도 늦지 않다."

 

예루탕인 이로 인하여 당시의 동창들에게 '백전(白專)'이라는 인상을 먼저 남겼다. '문혁'초기인 1966년, 예루탕은 대자보 하나에서 그가 있던 건오반이 장난샹이 배양한 수정주의의 전형이라고 분석한 글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와 같은 '백전'전형이 바로 그 사례였다는 것이다.

 

변론의 결과는 장난샹이 나서서 결론을 내린다. 고등학교는 "우홍우전(又紅又專)"의 노선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교장은 '홍'애 대한 논술은 단칼로 자르는 식이 아니었다." 왕신펑의 말이다. 장난샹은 '홍'의 단계를 '상삼층루(上三層樓, 3층건물을 올라가는 것)'에 비유했다: 애국주의- 공사겸구(公私兼顧): 사회주의 - 선공후사(先公後私); 공산주의 - 대공무사(大公無私).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100% 단결하는 교사를 구하여, "각각 자신의 발걸음에 따라, 공동으로 전진한다."

 

장난샨은 '전'을 아주 강조했다. 그는 말했다. 만이 루이가 응용수학대가인 린자챠오(林家翹)와 같은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한다면 혁명교육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리줘바오의 말이다.

 

시간이 흘러 반세기가 지났다. "오자반"의 졸업생은 칭화의 가장 우수한 졸업반이 되었다. 왕신펑은 말한다. 칭화6년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것은 지식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방법이엇다. 그는 지금도 장난샹이 "건량(乾糧)과 엽총"의 비유를 잊지 못한다. "그는 학생을 사냥군에 비유했다. 학교의 교사가 주는 지식을 건량에 비유했다. 스스로의 학습능력을 엽총에 비유했다. 만일 학교가 사냥군에게 건량만을 준다면, 건량은 언젠가 떨어진다. 사냥군은 건량을 다 먹고 나면 생존의 희망을 잃는다. 만일 학교가 사냥군에게 엽총을 준다면, 그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서 야외에서의 생존방법을 가르친다면, 사냥군은 계속하여 먹을 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고, 계속하여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칭화에서 준 '엽총'을 가리고, 업무에서 아무리 복잡한 프로젝트설계라도 그는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