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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역사상 존재했는가?

by 중은우시 2011. 3. 21.

 

: 문재봉(文裁縫)

 

칠종칠금(七縱七擒)”<삼국연의>에서 대서특필한 부분이고, 역대이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동한 말기, , , 오의 삼국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는데, 촉의 승상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자식을 부탁한다는 임종유언을 받아 북벌을 하여 한실을 부흥시키기로 결심한다. 촉한 건흥3(225), 제갈량은 후방을 공고히 하여, 위나라를 북벌할 때 뒷마당의 걱정거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방을 정벌하여 남중지구의 반란을 진압한다. 남중에 들어간 후, 연이은 승리를 거둔다. 그는 반군의 수령인 맹획(孟獲)이 현지의 이민족, 한족들에게 널리 존경받는다는 것을 알고는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생포한다. 제갈량은 그를 촉군의 군영으로 불러서 묻는다: “이 군대가 어떠한가?” 맹획은 승복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내가 촉군의 허실을 알지 못하여 패배했지만, 오늘 내가 촉군의 진영을 보았으니, 다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제갈량은 그를 풀어준다. 그로 하여금 되돌아가서 군마를 수습하여 다시 싸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렇게 일곱번이나 붙잡고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맹획을 풀어줄 때, 맹획은 말한다: “공은 하늘이 내린 위엄을 지닌 분이다. 남쪽사람들은 앞으로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 제갈량은 이렇게 그의 마음을 공략하여,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남방을 안정시킨다. 이렇게 하여 그는 후방의 걱정없이 북벌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일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학자인 배송지, 사마광등도 이에 대하여 찬미하는 말을 가득 늘어놓았다. 문인들중 조번과 같은 인물도 마음을 공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스스로 없애게 만들었으니, 예로부터 병법을 잘 아는 자는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칠종칠금의 계책으로 남만을 안정시켰다는 등 이에 대하여 찬미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소설 <삼국연의>는 더더욱 여러가지 전설과 이야기를 끌어모아, ‘칠종칠금을 널리 선전했고,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장편이야기가 되도록 하였다. 그 영향은 다른 나라에까지 미치고, 말에서 말로 전해졌다. 동남아의 버마, 태국에서 온 사람들도 제갈량의 이름을 감히 직접 부르지 못하고 공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국지>라는 권위있는 사서를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맹획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더구나 칠종칠금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사학자들은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일곱번 생포했다가 일곱번이나 풀어주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게 처신하는 제갈량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전쟁의 통상적인 규칙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역사상 맹획이라는 인물은 존재했는가? 제갈량은 정말로 맹획을 칠종칠금했는가?

 

먼저 역사상 맹획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는지를 살펴보자. <삼국지.제갈량전>에는 그가 남중을 평정한 것과 관련하여 단 12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 “삼년춘(三年春), 량솔중남정(亮率衆南征), 기추실평(其秋悉平)”(삼년 봄에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정을 떠났다. 가을이 되어 모조리 평정했다). 이외에 <삼국지>의 다른 곳에서도 남정에 관한 단편적인 언급은 있지만 맹획이라는 이름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를 근거로 하여, 역사상 맹획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역사상 정말로 맹획을 칠종칠금한 사실이 있으면, 이는 전쟁사상 드물게 보는 성공사례인데, <삼국지>에서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삼국지>의 기록은 지나치게 간략하며, 많은 진귀한 역사자료를 빠트렸다고 본다. 그리고 <삼국지>와 거의 동시대의 저작인 <한진춘추>에서 제갈량이 맹획에 대하여 칠종칠금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고, 작성시기가 조금 낮은 저명한 역사지리서인 <화양국지> <수경주>에서도 칠종칠금을 언급하고 있다.

 

현재 운남 소통제3중학에는 유명한 한나라때의 맹효거비(孟孝)”가 있는데, 이는 청나라 광서27(1901) 소통현 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백니정에서 출토한 것이다. 이 비에는 한나라때 맹씨성이 역사상 남중의 가장 저명한 양대성중 하나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맹획을 제사지내는 역사는 아주 길다. 현재 발견된 실물자료에 따르면, 당나라때와 송나라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서남의 여러 성에서는 사당이나 묘를 짓거나, 혹은 토지묘에서 맹획을 제사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서창현 석주자토주묘, 청룡사, 오현묘에는 그의 상을 만들어 제사지냈다. 민간에서 모시는 오현식신(五顯埴神)중에서 그림의 왼쪽 세번째에 맹획상이 있고, 속칭 소단만왕(掃壇蠻王)”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사학계에서는 대다수가 맹획의 생졸년을 알 수는 없지만, ‘맹획이라는 인물은 확실히 역사상 존재했다고 본다.

 

맹획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면 제갈량의 칠종칠금도 있었단 말일까?

 

시간적으로 보자면, 사서의 기록에 따를 때, 제갈량은 맹획을 칠종칠금한 후, “전지에 이르렀다(遂至)”고 되어 있다. 시기는 그해 가을이다. 그가 오월에 노강을 건넜다(五月渡瀘)”하였으므로 개략 4개월가량의 시간을 들여서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稱兵倡亂)” 2,3년이나 된 반란세력을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其秋悉平)’ 혹은 가을에, 마침내 4개 군을 평정했다(, 遂平四郡)”.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제갈량은 한편으로 성을 공격하고, 산채를 무너뜨리고, 변방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양식과 풀을 끌어모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험준하고 열악한 자연조건을 극복해야 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이렇게 많은 일을 이루려면, 당시의 과학기술이나 교통발달정도를 볼 때 어떻게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다. <통감집람>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당시 제갈량은 마음이 급했다. 남쪽을 빨리 평정한 후 북벌을 하고 싶었다. 어찌 계속하여 잡았다 풀어주면서 시간을 늦출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리위치상으로 보면, 남중은 삼국시기에 현재의 운남, 귀주 및 사천의 서남부를 가리킨다. 당시에 촉국의 일부분이고, 자고이래로 이월지지(夷越之地)”라고 불렀다. 즉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제갈량은 건흥3 3월에 성도에서 출발하여, 4월에 월준(지금의 사천 서창 동남쪽)을 평정하고, 5월에 노강(지금의 금사강)을 건너고, 가을이 되어, 4(월준, 건녕, 장가, 영창)을 모두 평정하며, 운남성의 동북길을 뚫어서, 겨울에는 한양(사천 경부)에 이르고, 12월에 성도로 돌아온다. 이상의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시킬 때 전서(운남서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아주 기괴한 것은 전서에 제갈량의 남정과 관련된 유적과 민간전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운기략>에는 맹획의 칠종칠금은 일획은 백애로 지금의 조조 정서령이고, 일획은 등여호저동으로 지금의 등천주이며, 일획은 불광채로 지금의 낭궁현 순검사 동쪽 이리이며, 일획은 치거산이고, 일획은 애전으로 지금의 순녕부지이고, 일획은 노강변으로 지금의 보산현 등월주 사이이다. 한번은 화공으로 산골짜기에서 붙잡았으니, 노강의 반사곡이다.” 이들 지역의 분포로 보면, 거의 모두 지금의 운남성 서부의 대리, 보산 일대지역이다. 제갈량이 어떻게 하여 자신이 가보지도 않은 지역에서 칠종칠금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칠종칠금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민간전설에서 제갈량이 칠종칠금했다는 것은 제갈량이 남쪽 이민족을 안정시킨 정책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혔기 때문이고, 현지 백성들이 제갈량을 크게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인물의 사적을 제갈량에게 가져다 붙였을 수 있다. 심지어 일부 호사가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제갈량에게 얹었을 수도 있다. 이들 이야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와전되어, 사학자들도 밎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