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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동교민항(東交民巷): 북경 최초의 대사관구역

by 중은우시 2009. 11. 9.

글: 홍촉(洪燭)

 

동교민항은 북경 최초의 공사관구역으로 유명하다. 명나라시기에 각국에서 북경으로 온 외교사절과 유학생들을 맞이하는 숙소는 모두 황성 정문의 남쪽에 있는 동강미항(東江米巷)에 있었고, 중앙각부의 아문이 집중한 업무구역과 이웃했다(외교사무를 처리하는 예부와 홍로사포함).

 

청나라때는 쇄국정책을 썼다. 그러나 2차 아편전쟁이후, 나라의 문은 강대한 대포에 의하여 강제로 열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등 제국주의국가는 앞다투어 동강미항 일대에 공사관을 설립했다. 이리하여 이 일대는 비교적 규모를 갖춘 외국공사관구역이 된다. 지역명칭을 좀더 우아하게 부르기 위하여, 동강미항은 발음이 비슷한 동교민항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다.

 

동교민항이 정식으로 공사관구역으로 정해진 것은 문자기록상으로는 의화단의 난이 실패한 후 청나라정부가 체결한 굴욕적은 <<신축조약>>이다. 여기에서 명문으로 '각 공사관의 경계는...공사관이 독자적으로 관리하고, 중국의 백성과 사람들은 모두 공사관경내에 거주할 수 없고,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구역의 청나라정부 아문과 토착주민은 모조리 이주를 하게 된다. 각나라의 공사관은 본국 군대가 주둔할 병영을 만들고, 권위를 드러내는 포대와 담장을 쌓았다. 이는 중국토지내에 처음으로 출현한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하는 금지구역이 된다.

 

의화단의 난 때 각국은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량의 병력을 북경에 보냈다. 동교민항의 각 길입구에는 '왕래주민은 경계를 넘어가지 말 것. 만일 이를 어기면 총으로 사살할 것임"이라는 포고문이 붙는다. 그리고 길을 지나던 백성들중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자도 나온다. 그리고 의화단은 공사관을 56일간이나 공격하게 된다. 동교민항은 이렇게 청나라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다.

 

1949년 북경이 해방되면서 동교민항은 국유로 회수된다.

 

신중국성립후에 세계각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는다. 새로운 (대)사관구역은 건국문 부근의 야바오루(雅寶路)와 산리툰(三里屯)의 두 곳에 건설된다. 산리툰지역의 대사관은 제3세계국가가 많았고, 미국, 영국등의 국가는 모두 야바오루에 두었다. 중소관계가 긴장되었을 때, 필자는 아직 북경이 아닌 지역의 학생이었다. 그때 첩보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시작은 항상 이러했다: "밤깊고 조용한 소련대사관의 큰 철문에서 조용히 신비한 볼가자동차가 나왔다...." 음삼한 이야기분위기는 청중이었던 나의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게 하였다.

 

어른이 된 후에 북경에 왔다. 우연히 소련대사관을 지나게 되었는데,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신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30년간 강동쪽이다가, 40년간 강서쪽이다. 현재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미국대사관이다. 매일 아침에 비자를 신청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고 한다. 출국붐은 갈수록 심해진다. 이십여년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바람을 맞아가며 미국을 갔다. 쇄국정책을 썼던 청나라와는 선명하게 대비가 된다. 그때 나라의 문을 부서지면서 열렸다(밖에서 안으로), 현재는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있다(안에서 밖으로). 이것은 문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