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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고속철

장슈광(張曙光): 중국고속철의 총설계사

by 중은우시 2011. 12. 28.

글: 신쾌보

 

캘리포니아 월넛(Walnut)시 피에르로드(Pierre Road) 688호의 중국인 주인은 이웃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신비로웠다. 이 빌라는 부지가 근 3만평방피트(약2,793평방미터), 건축면적이 4100평방피트(약381평방미터)에 달하며 방이 5간짜리이다. 담장을 하나 사이에 둔 미국여성에 따르면, 자신은 이 곳에 수년간 거주했지만,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남자주인은 딱 한번 봤으며, 여주인은 개략 서너번 봤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보기에 중국인 같았고, 사십여세라고 한다. 마을활동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688호의 신비한 건물주는 바로 중국고속철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장슈광과 그의 부인 왕싱(王興)이다.

 

2011년 1월 중순, 산서성 진성(晋城)의 여상인 딩슈마오(丁書苗)가 체포된지 얼마 되지 않아, 장슈광은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원래 그와 왕싱의 공유로 되어 있던 이 빌라를 왕싱의 단독명의로 바꾸었다. 2월 28일, 장슈광이 정직되고 조사받는다는 소식이 공표되었다.

 

철도보 내부인사가 토로한 바에 따르면, 장슈광은 현재 제남에 갇혀 있고, 그에 대한 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슈광은 올해 55세이며, 조적(祖籍)은 강소성 율양(溧陽)이다. 어렸을 때 부친의 직장이동으로 가족을 따라 신강(新疆)으로 가서 생활했다. 1982년 난주철도학원(현 난주교통대학)에서 차량전공으로 졸업한 후, 장슈광은 상해철로국 방부분국 방부차량단에 배치되어 일했다.

 

장슈광의 한 동료에 따르면, 장슈광은 '하층에서부터 시작하여 십년의 시간을 들여 방부차량단 부단장"으로 승진한다. 1991년말, 장슈광은 철도부 기차차량국검수실에서 관리엔지니어가 된다. 이번 이동에서 직급은 둘 다 과장급이지만, 지방과 중앙은 어약용문(魚躍龍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슈광은 키가 180이고 당당한 용모를 지녔다. 그와 처 왕싱은 모두 난주철도학원에서 공부했다. 왕싱은 1960년생으로 장슈광보다 4살이 어리다. "비록 왕싱의 용모는 별로이지만, 부친이 당시 철도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철도부내의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앞에 말한 동료의 말이다.

 

또 다른 철도부의 내부인사에 따르면, 장슈광이 철도부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를 배치할 곳이 없었다고 한다. 1992년초에 차량국에 검수실을 설치한다. 1994년초, 장슈광은 사적으로 객차처로 옮기고 싶다고 하였다. 당시 객차처의 책임자는 "장슈광으로 하여금 객차처로 와서 3개월간 살펴보는데" 동의한다. 그때, 객차처에는 처장이 모두 5명이 있었다. 부처장의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1994년, 장슈광은 이 빈자리를 차지한다. 이때부터 그는 출중한 소통능력을 발휘한다. 1998년 장슈광은 객차처의 처장이 된다.

 

1990년대초, 객차처는 차량국의 실권부서이다. '접촉하는 곳이 많고 물도 깊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류즈쥔(劉志軍, 전 철도부장)이 심양국에서 국장을 할 때도 '철도부'로 여러번 와서 더 많은 예산을 받아가려고 했었다.

 

2001년 철도부의 기구개혁이전에, 객차처의 위치는 핵심이었다. 기차제조창과 지방철로국의 주무부서중 하나였다. 각 기차제조창과 철로국의 설비물자입찰에 발언권이 컸다. 그러므로, 국내의 중소기차부품제조업체에 있어서 철도부 객차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철도시장에 진입하는 첩경이었다.

 

장슈광와 객차처에 재직할 때의 한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장슈광은 교제에 능했고 일처리를 잘 했다." 많은 경우 대외적인 접대는 장슈광이 맡았다. 객차처는 자주 철도설비물자입찰과 전람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장슈광은 가기를 원했다. 어떤 때는 5만위안의 출장비를 요구했다. 장슈광은 객차처에 있는 동안, 철도부내부에 이런 소문이 있었다. 누군가 광주의 한 기차냉동기공장이 철도시장에 집입시키기를 원해서 장슈광에게 30만위안을 주었다는 것이다.

 

장슈광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는 그저 구두로 나타났고, 무슨 실질적인 증빙이 있는 제보가 아니었다. 철도부의 지도자들과 당조직은 장슈광을 '하급기관에 가서 단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잠시 떠나보낸다. 2001년 장슈광은 심양철로국의 국장조리로 이동된다. 이 경정에 대하여 당시 부부장이던 류즈쥔은 불만이었다.

 

장슈광이 당시에 이미 문제가 있었던가? 최소한 조사결과를 보면, 장슈광의 당시 재산이 이미 적지 않았다. 그의 정상수입을 초과했다. 그러나, 장슈광의 처인 왕싱은 이미 미국으로 가 있었고, Micropher(馬克夫)라는 집변기공장의 중국내 독점대리점으로 있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Micropher는 중국시장에 금방 진입하고, 2003년 한때 철도집변기의 주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일찌기 1999년 10월, 왕싱은 개인명의로 로스앤젤레스에서 34.6만달러의 단독주택을 구매한다. 그리고 다음 해 주택을 장슈광 부부의 공동명의로 바꾼다. 2002년말, 왕싱은 61.5만달러의 가격으로 이 주택을 매각하고, 다시 장슈광과 공동명의로, 86만달러로 본문의 첫머리에서 말한 688호 호화주택을 구매한다.

 

장슈광과 함께 일한 바 있는 철도계의 인사들은 이렇게 확인해준다: 장슈광과 전 철도부장 류즈쥔의 관계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류즈쥔의 핵심심복이었다. 장슈광이 나중에 승진을 계속하는 것도 류즈쥔이 적극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류즈쥔은 '업무에 적극적이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사람은 업무에서 말할 것도 없이 죽어라 일하는 사람이다. 자주 저녁 12시까지 사람을 불러서 회의한다. 새벽 3시까지 열곤 한다." 전술한 인사가 회고한 말이다. 당시의 객차처 처장은 은퇴할 때가 가까웠고, 한밤중에 회의하는데 참가하기 힘들었다. '몇번 고생한 후 객차처 처장은 장슈광을 보내어 류즈쥔을 상대하게 했다." 장슈광은 이때부터 류즈쥔의 눈에 들게 된다.

 

장슈광에 가까운 여러 사람들에 따르면, 장슈광이 류즈쥔의 핵심심복이 될 수 있었던 핵심은 그가 류즈쥔의 생각과 명령을 끝까지 집행하였기 때문이다. 류즈쥔은 밤샘을 좋아하고, 장슈광은 밤에도 류즈쥔과 함께 했다. 류즈쥔이 무슨 문제를 제시하면, 장슈광이 방법을 내놓는다. 류즈쥔은 여자를 좋아하는데, 장슈광이 어레인지 했다. 여기에 장슈광과 류즈쥔은 인간관계를 잘 처리했고, 여기서도 죽이 맞았다."

 

2003년 3월, 류즈쥔이 새로 철도부장을 맡은 후, 장슈광의 승진길로 열렸다.

 

2003년 4월, 장슈광은 심양철로국에서 북경철로국으로 옮겨, 북경철로국의 부국장이 된다. 그후 반년도 되지 않아, 철도부로 돌아와서 철도부 장비부 부부장 겸 고속철판공실 부주임이 되어, 고속철기술도입을 책임진다. 류즈쥔의 중용하에, 장슈광은 관례를 깨고, 1년여의 시간내에 세번이나 직위를 바꾸며 고속승진했다. 2004년에는 철도부 운수국국장 겸 부총공정사가 되어, "중국고속철기술제일인"으로 불린다.

 

2004년부터, 장슈광의 주요업무는 고속철을 둘러싸고 진행된다. 류즈쥔이 부임한 후, 전임자가 이미 시작한 '망운분리'개혁을 중단시키고, 선발전, 후개혁을 내놓는다. 철로의 현단계에서의 주요임무는 외국고속철기술을 도입하는 것이고, 철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며, 철로운송력부족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장슈광은 류즈쥔의 이 전략을 집행하는 제일인이다. 중국의 최근 고속철발전과정을 보면, 장슈광의 낙인이 깊이찍혀 있다. 그는 '중국고속철의 총설계사"로 불린다.

 

많은 철도계통인사들은 장슈광의 업무정신과 능력에 대하여는 칭찬을 금치 못한다. 그는 "능력있고, 사고가 민첩하며, 회의때 말에 설득력이 있으며, 부하의 보고를 듣고 핵심을 잘 집어낸다" 그리고 업무에 적극적이어서, "자주 부하들과 밤을 새워 문제를 연구한다" 북차집단에 예속된 당산공사의 한 판매경리는 이렇게 말한다. 상사가 내려와서 검수검사할 때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류즈쥔이 아니라 장슈광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장슈광은 업무를 잘 알아서 한번 보면 문제를 집어냈다. "그의 눈이 한번 쓸고 지나가면, 우리는 바로 고개를 숙인다"

 

류즈쥔의 주도하에, 2004년에서 2006년까지, 철도부는 3번의 중요한 고속철입찰을 실시한다. 즉 두번의 동차합자입찰과 경진성제입찰이다. 세번의 입찰과정에서, 철도부의 담당자는 바로 운수국 국장이던 장슈광이다. "당시 담판때 장슈광의 배후에는 중국시장이 뒤를 받쳐 주었다. 그는 아주 전문적이고 강성이었다. 기술도입협상이전에 많은 시장조사를 했고, 외자기업의 제품가격도 아주 잘 알았다. 중국에 들어오려면 먼저 가격에서 시장가격에서 30%를 깍아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협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남차의 한 엔지니어의 말이다.

 

당시 기술협상에 참여했던 한 인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철도부가 당시에 채택한 협상전략은 칭찬받고 있다고 한다. 철도부에서 내놓은 선전책자에 따르면, 하룻밤만에 지멘스의 90억달러 입찰가격을 깍아버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장슈광이 협상에서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철도부 내부인사가 보기에, 가장 빠른 속도로 고속철네트워크를 발전시키는 것은 류즈쥔의 전략이다. 류즈쥔은 중앙에서 정책과 돈을 받아왔다. 집행자는 장슈광이다. 두 사람의 담량과 박력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짧은 5년내에 철도운영거리를 배로 만들었고, 최고시속 350킬로미터로 만들었다. 이는 국외에서도 선례가 없는 일이다."

 

이처럼 시간을 단축시키고, 속도를 따지는 식의 대약진은 장슈광에게 큰 압력을 주었다. "사적으로 장슈광도 압력이 아주 크다고 말했고,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깊이 들어갔다고 한탄했다. 이미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의 말이다.

 

2011년 1월 중순, 딩슈마오가 붙잡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슈광은 위험을 감지한다. 처음에는 재산관계를 정리한다. 2월 28일, 장슈광은 정직조사를 받는다. 장슈광을 잘 아는 한 인사에 따르면, 장슈광이 붙잡혀가서 조사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되었고, 등도 굽었다. 심각한 당뇨병을 앓고 있어서, 사람이 영 딴판이었다."

 

그의 정직기간동안, 그의 부패에 관한 소문은 비등했다. 소문에 따르면 관련금액이 20여억달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다. 초보적으로 알아본 상황에 따르면, 현재 확인되는 것은 장슈광의 미국에서의 부동산이다. 그리고 그의 처 왕싱의 열차집변기시장에 대한 조종이다. 철도부 내부인사에 따르면, 장슈광은 현재 제남에 갇혀 있고, 아직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장슈광을 동정하는 사람과 장슈광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장슈광의 이미지는 전혀 달랐다. 반대자는 그를 학식도 기술도 없이 아부를 잘하며, 명예만 쫓는 투기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철고건설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은 장슈광을 아쉬워한다. 그들은 한편으로 그의 업무능력을 인정하고, 고속철건설에서의 공로를 인정하며, 다른 한편 그와 가족들이 입찰을 좌지우지한데 대하여는 잘못했다고 본다.

 

아마도, 이 양면이 모두 진실한 장슈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