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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곽말약)

곽말약(郭沫若)은 왜 굴원(屈原)을 특별히 좋아했는가?

by 중은우시 2011. 12. 22.

글: 홍촉(洪燭)

 

 

 

 

중국인은 매년 단오절을 기념한다. 단오절에는 세 가지 일을 한다: 종자(粽子)를 먹고, 용주(龍舟)를 타며, 굴원(屈原)을 기린다. 중국인들은 '굴원'을 잊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다. 굴원은 단오절에 관련된 문화부호일뿐아니라, 그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크다. 중국에서 위기가 닥칠 때면, 내우외환 가운데 허덕일 때면, 비로소 굴원을 가장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굴원을 칭송하고, 제창한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원치않는 사람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로운 장성을 쌓자. 중화민족이 가장 위급한 때가 오면..."이것이 현재 중국의 국가이다. 바로 이 의용군행진곡이 탄생한 그 전쟁의 불꽃이 휘날리던 연대에, 굴원의 이미지는 다시 한번 부활하고 확대되었다.

 

이십세기 상반기, 중화민족은 굴원정신을 새로 세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장성을 잃을 위기를 막아낸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신시의 창시자인 곽말약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1942년 1월 2일부터 11일까지, 곽말약은 단지 10일의 시간을 이용하여, 5막짜리 역사극 <굴원>을 쓴다. 그는 실제로 고인의 술잔을 이용하여, 현재의 땅 위에 부었다. 강국 진나라의 능욕을 받던 초나라를 빗대어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중국의 현상을 비유했다. 국민당의 <중앙일보> 는 1월 24일부터 2월 7일까지, 매일 <굴원>의 극본을 연재한다. 문예계는 전력을 다하여, 금산(金山), 백양(白楊), 장서방(張瑞芳)등의 스타들을 총동원하여 <굴원>이 하루빨리 무대에 설 수 있게 하였다.

 

4월 2일, <신화일보>의 제1면에는 "4대공전(空前)" 광고가 실린다. <굴원>이 내일 국태(國泰)에서 공연된다: 중화극사의 공전의 공헌; 곽말약 선생의 공전의 걸작; 중경화극계의 공전의 연출; 음악과 희극의 공전의 실험. 4월 3일 <굴원>은 중경의 국태대극원에서 융중하게 공연되고, 큰 반응을 불러오고, 극장내외는 피가 끓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관중들이 운집했다. 국민당 당보는 이미 극본 전문을 실어 붐을 조성했다. <굴원>은 국통구에서 연속 17일간 공연되었고, 빈 좌석이 없었고,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매번 극장 밖에는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득했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관중들과 함께 흩어졌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일류의 광고, 일류의 극장, 일류의 극본, 일류의 효과, 일류의 배우가 하나하나 빛나게 등장했다.

 

중경의 각 신문에서도 속속 보도했다: "좌석이 꽉찬 것이 사상유례없었다." "절창이라고 할만하다" 주은래, 유아자, 동필무, 전한, 황염배등은 즉흥시를 지어서 찬미했다. 전체 항일전쟁기간동안 문예계의 큰 사건을 꼽는다면, 곽말약의 역사극 <굴원>은 크게 꼽아야 할 것이다. 담가빈의 <굴학문제종론>이라는 책에는 <곽말약은 굴원에 대하여 어떤 감정이었는가?>라는 글이 있는데, 이렇게 적고 있다: "<굴원> 사극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은 국민당의 문금(文禁)을 타파하였을 뿐아니라, 굴원의 애국정신을 가지고 전국인민의 항일투지를 북돋웠고, 국민당 반동파의 가짜 항일, 진짜 반공의 반동행동을 통열하게 비난했다...."

 

어찌되었건, 굴원이건 곽말약이건 시인은 항일전쟁에 대하여, 성벽이나 포탄보다 못지 않은 작용을 했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한 대시인 굴원은 다시 한번 국난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무대에서 부활하였고,  절창 <뇌전송>을 불렀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있다(國破山河在).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중국인은 굴원을 부르자. 호국의 신을 부르는 것처럼.

 

친애하는 굴원. 존경하는 삼려대부(三閭大夫). 이 장면을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물 속에 몸을 던질 때 이런 장면을 생각했었는가? 당신은 비록 <이소>를 썼지만, 당신은 진정으로 떠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당신을 떠나게 버려두지 않는다. 모든 시대마다 당신을 붙잡았다. 매년 단오전리면 당신을 붙잡았다. 비록 항일전쟁중이더라도, 당신은 역시 조국과 인민들을 위하여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만일 누구든지 당신을 잊는다면, 그래도 중국인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의 조국을 잃는 것과 같다. 역사의 사람을 잊어버리면 현실에서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다. 역사는 굴원과 같은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힘이 있다. 심지어 현실의 곤란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극 <굴원>은 곽말약의 창작생애에서 두번째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다. 사회에 현실작용을 한 것으로 말하자면, 그의 초기 백화시집 <여신>에 못지 않다. <여신>은 "5.4"신문화운동의 봄바람이다. 중국시가사의 신천지를 열었다. 사극 <굴원>은 전체 중국문화계를 대표한다. 정신적으로 항일전쟁에 한 팔의 힘을 보탰다.

 

곽말약이 <여신>을 쓸 때 그 기세는 우주를 삼킬 듯했고, 격정에 넘쳤다. <굴원>을 쓸 때는 마치 시신이 몸에 붙은 듯했고,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으로 공전절후의 대시인의 화신이 되었다. 곽말약은 굴원의 마음을 최선을 다하여 대변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이 오막극 <굴원>을 썼는가?"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그 때의 체험을 회고한 바 있다: "각 막과 각 항의 이야기는 완전히 글을 쓸 때 솟아올랐다. 제일막이든 제이막이든, 바로 제1막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에 대하여 완전히 생각을 다해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상하다. 내 머리에서 파도를 가둬놓은 갑문이 열린 것처럼 계속 솟아 올랐고, 모두 다 솟아나고서야 끝이 났다."

 

곽말약의 사극 <굴원>은 사시(史詩)라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의 <여신> 기초위에, 한단계 더 올라선 것이다(更上一層樓). 대시인 굴원에 더욱 가까워졌을 뿐아니라, 그 자신이 대시인의 자리에 오르는데 더욱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곽말약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의 삶의 후반기를 어떻게 멸시하든, 아니면 그를 그저 반쪽짜리 대시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든, 본인은 <여신>에서 <굴원>으로 향하는 곽말약에 경의를 가득히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항일전쟁때 그는 총을 들고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붓을 들었다. 시인에 있어서 붓은 바로 총이다. 굴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붓은 그에게 검이었다. 역사를 뚫는 것이다. 이천여년후에 전국시대의 청동병기는 모두 녹이 슬었지만, 굴원의 필봉과 검봉은 여전히 차가운 빛을 쏟어내고 있다.

 

곽말약의 굴원에 대한 감정은 항일전쟁시기에 생긴 것이 아니다. 일찌기 1920년, 이십여세의 재자(才子) 곽말약은 극본 <상루(湘累)>를 썼는데, 굴원의 반전통정신을 소리높여 찬양했다. 1926년, 붓을 버리고 북벌전쟁에 참가한 곽말약은 호남의 멱라(汨羅)를 지나게 된다. 멱라강변에서 굴원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행하고, 그는 <과멱라강감회>라는 시를 지어 굴원을 추모한다.

 

1935년, 일본을 떠돌던 곽말약은 고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장편학술논저 <굴원>을 쓴다. 이 책에서는 "호난삼주년기념일(滬難三週年記念日)"('호'는 상해를 가리킴)로 되어 있고, 개명서점출판사에서 출판했다. 나중에 이 책은 곽말약의 30년대 굴원연구의 대표작으로 칭해진다. 곽말약은 이 책에서 이렇게 썼다: "굴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다. 어렸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1940년대는 곽말약의 굴원연구의 최고봉이었다. 연이어 <굴원에 관하여> <굴원고> <혁명시인굴원> <포검.용선.이치> <굴원의 예술과 사상> <굴원.초혼.천문.구가>, <굴원과 이왕> <굴원사상>등 일련의 글을 남긴다. 그중 <굴원은 농신(弄臣)일 수 없다> <시인의 날에 굴원이 농신인지 여부를 말한다>, <굴원의 행과 불행>등은 널리 학술논쟁을 불러왔다. 그는 또한 <포검집> <굴원연구>등 논저도 펴냈다.

 

이를 보면, 역사극 <굴원>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곽말약의 전반생에 정성을 쏟아 준비한 것이다. 그는 굴원에게 애정이 깊었다. "중국의 유사이래 첫번재 위대한 시인은 굴원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굴원은 첫째라고 깊이 믿는다. 둘째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저술을 돌아본 다음 "굴원에 관한 것을 지나치게 많이 쓴 듯하다." 그러나 작용을 발휘할 때는 많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찌 단 십일의 시간을 가지고, 조국의 첫번째 대시인을 극본 속에서 부활시킬 수 있었겠는가. 곽말약은 자신의 영혼을 일거에 굴원의 이미지에 쏟아부었다.

 

1941년, 굴원은 전한, 노사, 모순등의 문화명인들과 연합하여, 중경에서 창의한다. 단오절을 "시인절(詩人節)"로 하여, 굴원을 추모하자는 것이다. 이 거동은 문예계, 사학계, 교육계등 각계의 호응을 받았고, 성대한 기념활동도 열었다. 담가빈의 <굴원문제종론>이라는 책에서 곽말약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했다: "곽말약은 굴원을 숭상하면서, 굴원 및 그 작품에 대하여 대량의 연구와 검토를 했다. 그는 초사에 대한 저술이 풍부한 학자이다. 또한 굴원 및 그 작품에 대한 연구의 학술선구자이다...단오절을 시인절로 하여 굴원을 기념하는 것은 깊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전에 학술계에서는 굴원과 단오절이 관계없다고 여겼을 뿐아니라 심지어 굴원이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도 철저히 부정했다. <이소>등 작품이 굴원의 작품이라는 것을 부정했을 뿐아니라, 진나라때 박사들이 위조한 것으로 보고, 굴원의 존재를 부정했다. 대체로 신해혁명 및 '오사'운동을 전후하여 역사인물로서의 굴원에 대하여 회의의 시선을 보냈다. 굴원은 그저 전설, 즉 허구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곽말약은 <굴원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으로 첫번째는 사천의 요평(廖平)이다"

 

청말민초의 저명한 금문학자인 요평(1852-1932)은 앞장서서 "굴원부정론"을 퍼트렸다. 나중에 호적(胡適)이 그에 동조한다. 호적은 1921년 6월 어느 "독서회"에서 강연을 하고, 그 원고를 정리하여 1922년 제1기 <독서잡지>에 싣는다: "굴원이 누구인가? 이 문제는 아무도 제기한 적이 없다. 내가 지금 굴원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것은, 그리고 굴원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존재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사기>가 원래 그다지 믿을만하지 않고, <굴원가생열전>은 특히 믿을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한 <사기.굴원열전>의 '5대의문'은 굴원이 그저 전설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굴원은 복합적 인물이고, 일종의 전타(箭垛)식의 인물이다."

 

곽말약은 1935년에 상해개명서점과의 약속에 따라 장편학술논저 <굴원>을 써서, 이전에 호적이 바람을 일으켜 수면 위로 떠오른 굴원부정론을 반격한다. 그리고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요평과 호적의 견해를 공격한다. 특히 호적의 소위 "오대의문'에 대하여는 하나하나 반박한다. 호적이 <굴원>에 대하여 제기한 의문은 얼핏 보기에는 날카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검사해보면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30,40년대의 학술계에는 '굴원지키기'전투가 벌어졌다. 곽말약과 같이 글을 써서 굴원을 지킨 사람으로는 육간여, 유국은, 주이복, 요설은등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굴원이라는 사람과 굴원의 작품, 굴원의 평가들은 백가쟁명이라 할 수 있고, 여러가지 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곽말약은 시종일관 굴원을 보위했다. 일부 이설에 대하여는 곽말약이 널리 고전을 인용하고, 세밀하게 고증하여 근거를 내세우며 반박했다. 굴원의 사상을 보위하는 것은 시종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굴원은 곽말약의 사상에 깊은 낙인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담가빈의 말이다)

 

"굴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곽말약은 <이소>의 시구에 근거하여,  굴원이 기원전340년(초선왕 삼십년)에 하력 정월초칠일에 태어났음을 고증했고, 또한 <애영>에 근거하여 굴원이 기원전278년(항양왕이십일년) 오월 초닷새에 사망했음을 고증했다. 또한 굴원의 탄생지도 확인했다: "굴원의 고향은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강수주>에 따르면 자귀현(秭歸縣) 경내이다....마을의 이야기도 대체로 정확하다." 지금도 굴원의 생졸년과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 그러나 곽말약의 견해가 항상 주류를 형성했다.

 

"굴원은 열정적인 인민의 시인일 뿐 아니라, 동시에 원대한 포부를 품은 정치가였다." 이것이 바로 곽말약의 마음 속에서의 굴원이었다. 동시에 아마도 그 자신의 이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1953년, 중국은 프랑스 파리에서 거행된 세계평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다. 중국대표단의 단장으로서 곽말약은 회의기간동안 대거 굴원을 선전한다. 마지막으로 세계평화회의는 중국대시인 굴원과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프랑스의 문학가 라블레, 쿠바의 작가 겸 민족운동지도자 호세 마르티와 함께 세계4대문화명인에 선정되어 세계적으로 기념하자고 호소한다. 굴원이 세계적인 대시인이 된 것은 곽말약의 덕분이다. 확실히 말해서, 곽말약은 위대한 중국을 대표하여 전세계에 내세울 위대한 시인으로 굴원을 꼽았다. 세계4대문화명인의 반열에 오른 굴원은 이제 그 자신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연원이 긴 중화문명의 한 상징이 되었다. 중국은 굴원을 자랑스러워하게 되었다.

 

1965년, 호북성 자귀현은 성 동쪽의 굴원묘 및 귀주성내의 굴원패방을 수리하기로 하고, 곽말약에게 제자(題字)를 요청한다. 곽말약은 열정적으로 "굴원묘(屈原廟)", "굴원고리(屈原故里)"라는 휘호를 써준다. 그는 자신의 글씨를 굴원의 고향에 남기게 된 것을 기뻐했다. 1977년, 곽말약은 중병에 걸렸는데도, 자귀현에서 굴원기념관을 수리한다는 말을 듣고, 병구에도 불구하고 "굴원기념관(屈原記念館)"이라는 휘호를 써서 준다. 그리고 부인 우립군(于立群)으로 하여금 자귀현 낙평리를 위하여 "초대부굴원탄생지(楚大夫屈原誕生地)", "낙평리(樂平里)", "독서동(讀書洞)", "조면정(照面井)", "옥미전(玉米田)"등 굴원유적지의 비명을 쓰도록 위탁했다.

 

1978년 봄, 곽말약은 북경의원에서 치료받는 기간동안 굴원이 생각나서, 특별히 부인 우립군에게 그의 초기 <굴원> 극본을 병상으로 가져오게 하여 한번 또 한번 다시 읽었고, 손에서 떼지를 못했다. 그는 굴원을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굴원을 우삼으로 삼은 자신을 생각한 것일까? 자신이 급히 쓴 사극 <굴원>을 쓴 그 생명력과 창조력이 풍부했던 십일밤낮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우립군에게 말한다: "나는 수십년간 비바람을 맞아왔고, 이제 곧 나무처럼 굳어질 사람이다. 나는 광명스럽게 살고, 깨끗하게 죽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립군에게 <이소>의 글을 모아서 만든 대련을 기록하게 한다: "집부용이위상, 우수혜지백무(集芙蓉以爲裳, 又樹蕙之百畝). 수운예지내어, 장왕관호사황(帥雲霓之來御, 將往觀乎四荒)" 담가빈은 곽말약이 남긴 이 집구대련이야말로 그가 일생동안 남긴 절필이며, 이를 보면 그가 굴원을 얼마나 사랑했고, 숭배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해 6월 21일, 곽말약은 세상을 떠난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낮은 목소리로 굴원의 <이소>를 읊었다고 한다. 그는 굴원의 <이소>를 가지고 이 세상에 하직인사를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