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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곽말약)

곽말약은 왜 장개석을 욕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18.

글: 이종금(李鍾琴)

 

사람들은 곽말약이 문혁시기에 쓴 비굴하게 아부하는 시문을 읽으면서 왕왕 잘 납득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오늘의 장개석을 보라>>라는 격문을 썼던 그 곽말약이란 말인가?

 

곽말약이 장개석을 시원스레 욕해댄 것을 보면 약간은 선비기질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후안무치한 문인의 인격에 있어서 그래도 하나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곽말약이 어떤 배경하에서 이 글을 썼는지? 그는 도대체 왜 이 글을 썼는지? 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드물다.

 

1925년 3월 손중산이 사망하자, 왕정위(汪精衛)가 국민당내에서 손중산의 후계자로 추대된다. 그해 7월 7일, 국민정부가 광주에서 성립되는데, 왕정위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된다. 다음해 3월, <<중산함사건>>이 발생하는데, 왕정위는 당시 국민혁명군총사령관인 장개석이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고 마음대로 군사행동을 하는데 불만을 품고, 화가 난 나머지 사직하고 프랑스로 가버린다.

 

왕정위가 떠난 후, 장개석은 이종인(李宗仁)을 통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여,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북벌할 것을 결정한다. 당시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였으므로, 광동대학(지금의 중산대학)의 문학대학장인 곽말약은 출중한 글재주와 명망으로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선전과장 겸 행영비서장에 임명된다. 오래지 않아 장개석은 그를 총정치부 부주임에 임명한다.

 

장개석의 이번 북벌은 아주 순조로웠다. 반년도 되지 않아 이미 장강남안에 이르렀고, 무한(武漢), 남창(南昌)을 점령한다. 11월 11일, 광주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한다.

 

이때 ,장개석의 총본부는 남창에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국민정부를 남창으로 천도하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가 통제하기 쉬웠다. 그러나, 대다수의 중앙집행위원은 여전히 무한으로 천도할 것을 고집했다. 장개석과 광주국민정부간에 천도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1927년 2월 10일,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는 무한에서 전체위원회의를 개최하여, 왕정위, 담연개(譚延), 손과(孫科)등을 국민정부 상무위원으로 선임한다. 이때, 아직 왕정위는 외국에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 장개석은 상무위원에도 뽑히지 못한다. 1달후, 1927년 3월 10일, 국민당중앙은 무한에서 제2기 3중전회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반장개석의 기치를 내건다. 회의에서 장개석은 대권을 독점하고 일인독재를 하고자 하므로, 반드시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귀국길에 올라 있던 왕정위가 국민정부 주석에 선임된다.

 

이때, 장개석은 이미 남경을 점령했다. 그리고 북벌사령부도 남경으로 옮긴다. 국민당은 이로써 남경북벌사령부와 무한국민정부의 양대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장개석은 비록 북벌군총사령관이었지만, 그가 지휘할 수 있는 부대는 그의 직계부대인 제1군과 계계(桂係)인 이종인부대, 백숭희부대뿐이었다. 무한국민정부는 당생지(唐生智)의 제4집단군을 통할했다. 사람수, 무기장비에서 장개석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떤 학자는, 무한측의 실력이 장개석측보다 강했다고 본다. 무한국민정부는 당시에 공개적으로 "연아(聯俄), 용공(容共), 부조농민(扶助農民)"의 구호를 내걸었다(이 구호는 나중에 임의로 연아, 연공, 부조농공으로 고쳐져서 '신삼민주의'라고 말해지는데, 사실 이 여덟글자에는 '민'이라는 글자는 하나도 없고, 국민당측도 소위 '신삼민주의정책'이라고 인정한 바 없다). 이리하여 공산당조직의 공농무장의 지지도 받았다. 또한 계계의 이종인, 백숭희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장개석의 지휘에 복종하지만, 무한과 남경이 서로 싸우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제3세력인 풍옥상(馮玉祥)은 겉으로 충후하게 보이면서 속으로는 심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무한, 남경이 서로 쟁취하려는 인물이 되었다. 공산국제의 대표인 루이는 풍옥상에게 공개서신을 보내었다: "북경을 점령하고, 장작림을 동북으로 쫓아내는 임무로 인하여, 더욱 중요하고 더욱 절박한 혁명임무, 즉 남경반혁명중심을 소멸시키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이를 보면, 당시 무한정부와 공산당은 모두 장개석을 첫번째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무한정부는 중앙정통이라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천시, 지리, 인화의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장개석은 정부를 배반하고, 정부군의 토벌에 직면하여 있으며, 또한 북상하는 것도 좌절되어, 곧 패가망신할 것으로 보았다. 만일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반장개석을 외치고, 무한정부를 지지한다면, 장래 무한정부에서 입신양명하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1927년 3월 31일, 곽말약은 남창의 주덕의 집에서, 장개석토벌격문인 <<오늘의 장개석을 보라>>를 쓰고, 전국의 군민이 일어나서 장개석에 반대할 것을 호소했다. 곽말약은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무한의 <<중앙일보>>에 발표하고, 한편으로 남창에서 소책자로 인쇄하여 널리 배포했다. 일시에 곽말약의 명성은 크게 떨치고, 그는 공농무장의 대변인, 무한정권의 반장공신이 되었다.

 

<<오늘의 장개석을 보라>>를 발표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장개석은 남경에서 "4.12정변"을 일으키고, 남경국민정부를 만든다. 왕정위는 무한에서 국민당중앙의 명의로 전통을 보낸다: "장중정(장개석)은 민중을 도살하고, 당부를 망가뜨리며, 반동이 되었으니, 죄악이 크다. 이미 중앙집행위원회의 명의로 당적을 제명하고, 본인이 겸직한 각종 직위를 면직시킨다. 전국의 장병과 혁명단체는 중앙으로 붙잡아와서, 반혁명조례로 다스리자" 그리고 당생지를 동정군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무력으로 장개석을 토벌하고자 한다.

 

이때, 곽말약은 돌고돌아 무한에 도착하고, 왕정위정부에 투신한다. 그런데, 곽말약이 생각도 못했던 것은 반장개석의 공신인 그를 왕정위는 냉대한다는 것이다. 원래, 왕정위는 장개석과 "반공"에 대하여는 입장이 일치했다. 곽말약은 이미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그리하여 왕정위는 자기 편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오래지 않아 왕정위는 무한에서 "청당(淸黨)"의 명을 내리고, 공농무장을 해산시킨다. 곽말약은 머물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다시 머리를 돌려 남하하고, 남창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주은래, 주덕, 하룡이 이끄는 남창의거에 가담한다.

 

이후의 국면은 곽말약으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종인, 주배덕의 알선하에 장개석이 하야하고, 무한국민정부는 8월 19일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선포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영한합류(寧漢合流, 영은 남경을 한은 무한을 가리킨다)"이다. 남창의거도 실패한다. 곽말약은 1928년 2월 주은래의 안배하에 일본에 망명한다. 곽말약은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11일에 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마음 속에서 무한한 번뇌가 솟아오른다. 다시 표류의 길에 오른다. 어떻게 해도 불안이 느껴진다." 이때부터 10년에 이르는 해외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그리고 공산당과 연락이 끊긴다. 문혁때, 곽말약은 이때의 '탈당'경력이 '반당'으로 취급되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곽말약은 일본에서 귀국한다. 주양(周揚)은 그에게 연안으로 오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한다. 오히려 국민당 원로인 오치휘(吳稚暉)에게 장개석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장개석은 이전에 곽말약의 지명수배를 내린 바 있었으나, 이미 10년이 지났다. 이제 전민항전의 시기이므로, 10년전의 사소한 일은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37년 9월 24일, 장개석은 진포뢰(陳布雷)를 배석시키고 곽말약을 만난다. 곽말약은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공손하게 장개석위원장에게 지난날의 죄과를 참회하고, 장개석위원장에게 그를 용서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당과 국가에 헌신하겠으며, 앞으로 공을 세워 죄를 씻겠다고...." 하였다. 회견을 마친 후에 곽말약은 즉시 <<장위원장회견기>>를 써서 신문에 발표했다. 글에서는 장개석은 대거 칭송하였다. 그중에는 세번에 걸쳐 장개석의 눈을 형용하고 있는데: "눈이 아주 밝았다" "눈이 아주 기운넘쳤다" "눈빛은 항전의 결심을 나타냈다"

 

사람들은 곽말약이 <<오늘의 장개석을 보라>>를 썼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가 또한 <<장위원장회견기>>도 썼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위원장회견기>>는 대륙에서 이미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곽말약전집>>에도 당연히 수록되어 있지 않다. 만일 무한-남경분열시기의 역사적사실을 모른다면, 사람들은 곽말약이 장개석통치하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이런 글을 썼다고 생각하고, 아주 혈기있는 사람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곽말약은 무한측에 속해 있었고, 절대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한 것이 아니다. 1937년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장개석의 통치아래 놓인다. 이때의 장개석은 그저 <<장위원장회견기>>나 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