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말약은 일생동안 정식으로 혼인한 것이 세번이다.
원배부인(元配夫人)은 장경화(張瓊華, 1890-1980)으로 1912년에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후 바로 버림받으나, 이혼하지는 않았고, 그녀는 곽씨집안에서 68년간을 독수공방한다. 자녀도 없다.
둘째부인은 안나(安娜, 원명 佐藤富子, 1893-1994)로 일본여자이다. 1916년 연애로 동거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버림받으며 5명의 자녀를 둔다. 해방후 중국으로 건너가서 부부장급의 대우를 받고 70년대말에는 정협위원을 지낸다.
셋째부인은 우립군(于立群, 1916-1979)으로 항전부인(抗戰夫人)이라고 부른다. 1938년부터 곽말약과 동거했으며 모두4남2녀를 낳는다. 1979년 3월 북경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외에 곽말약은 3-5명의 여자와 혼외관계를 가진다.
팽의란(彭漪蘭) 일명 안림(安琳)은 남창기의때 혁명의 파트너였다. 1927년 10월말, 남창기의실패후 상해로 돌아와서 내산서점의 누상에서 곽말약과 짧은 기간의 '밀월'을 보내나 나중에 버려지고, 행방불명이 된다.
우립침(于立忱, 1912-1937), 우립군의 언니이다. 그녀는 곽말약에게 버림받은 후 자살한다.
황정혜(黃定慧, 일명 黃慕蘭, 1907- ) 곽말약의 친밀한 친구. 대혁명시기의 풍류여인. 무한시장부의 부녀부장을 지냈다.
안나의 다섯자녀들은 장남 곽화부(郭和夫), 차남 곽박(郭博), 삼남 곽불생(郭佛生), 딸 숙자(淑子), 사남 지홍(志鴻)이다.
우립군의 여섯자녀들은 아들이 한영(漢英), 세영(世英), 민영(民英)이고 딸이 서영(庶英),평영(平英)이다. 가장 어린 아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중 셋째 민영은 문혁기간중에 자살한다. 둘째 세영은 1968년 북경농업대학에서 구타당하여 죽는다.
이 두 집안의 자녀들간에는 서로 왕개가 없다. 곽말약의 11명의 자녀중 딸 곽평영이 북경곽말약고거기념관의 부관장을 지내면서 약간의 문사에 관련되는 것이외에는 아무도 부친의 가업을 승계하지 못했다. 그들 특히, 안나의 자녀들은 곽말약과 친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고, 감정도 없다. 둘째아들 곽박은 일찌기 기자들앞에서 이렇게 부친을 평가한 적이 있다. "가정에 대하여 곽말약은 죄인이다"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곽말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곽말약은 확실히 가장혼인문제에 있어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가 많았다. 먼저 곽말약과 애인 우립침과의 관계를 보자.
우립침은 원적이 광서이고 민국초기에 정계요인 잠춘훤(岑春煊)의 외조카딸이다. 부친을 다라 천진에 공부하러 왔고, 나중에 "대공보(大公報)"의 기자가 되었으며 약 1934년경에 동경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동경에서 일찌기 알고 지내던 곽말약과 내왕이 있었고, 관계가 가까워졌다. 1937년 5월 그녀는 상해에서 돌연 자살한다. 그녀의 자살에 대하여, 수십년간 계속하여 수수께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우립침의 죽음은 동경에서 데모에 참가했었고, 반일구호를 소리높여 외쳤기 때문에 일본측에 의하쳐 추방되었으며, 귀국후에는 대공보의 주편인 장계란(張季鸞)이 쫓아다녔으며, 몸에 중병이 있어 절망끝에 자살한 것으로 본다.
사실은, 이런 주장은 그저 겉만 본 것이다. 고의로 곽말약을 위하여 진실을 가려준 것이다. 진상은 이렇다. 이 내용은 곽말약을 잘아는 여작가 사빙영이 얘기한 내용이다.
우립침은 아주 예쁘고 피부도 하얗고 고왔으며 말도 조리있게 하며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귀여운 인상을 주어 기자로서는 적격이었다. 하루는 우립침이 사빙영에게 병원에 가서 맹장염 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했으며, 사빙영과 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사빙영이 병원에 갔는데, 간호사에게 우립침이 산부인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유산시켜서 꺼냈다는 말을 듣는다. 사빙영은 산부인과 병실에서 우립침을 만났고, 우립침은 "곽말약이 이렇게 후안무치하고 비열한 인면수심의 사기꾼인줄 몰랐다. 삼년전에 그가 죽어라 나를 쫓아다녔고, 나에게는 안나와는 아무런 감정도 없고, 사랑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사항하게 된 이후 안나를 벗어나겠다고 결심하고 정식으로 이혼을 제안하였으며,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속아서 임신한 이후에 그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서 나에게 냉담해졌다. 뱃속의 아이가 이미 3개월이므로, 나에게 유산시키라고 하였다. 그 때서야 나는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곽이 얼마나 염치없고 부끄럼이 없으며, 인격이 바닥에 떨어진 사기꾼인지를. 나는 그가 죽도록 밉다. 언니, 나는 사람을 볼 면목이 없어서, 자살할 것이다. 부모님께 면목이 없고, 국가에 면목이 없고, 친구들에게 면목이 없다. 나는 모든 게 끝났다" 과연 그녀는 퇴원하여 상해로 돌아간 후 정말 자살하였다.
사빙영이 이야기한 이 내용은 우립침이 죽으면서 남긴 절명사(絶命詞)에 나오는 "여차가원, 여차사회, 여차자신, 무능위력의(如此家園, 如此社會, 如此自身, 無能爲力矣, 이런 나라, 이런 사회, 이런 자신, 어쩔 수가 없다)"는 내용과도 연결이 된다. 이런 나라라는 것은 나라가 망하고 민족은 위기에 처해있으며 백성들이 흩어지고 걱정스러운 상황이고, 이런 사회라는 것은 곽말약와 같은 유명산 시인, 혁명가, 청년들의 우상이 이처럼 더럽고 비열하여 사람을 실망시키며, 이런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겨우 23살의 젊은 나이에 속아서 몸을 버리고, 체면을 다 잃고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결국 철저한 절망끝에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우립침의 곽말약의 인간됨됨이에 대한 판단은 육십년후 둘째아들 곽박의 인식과 완전히 일치된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닐 것이다. 그들은 모두 친히 경험하고 근거리에서 관찰한 사람들이며 다른 학자들보다는 훨씬 잘 알 수 있는 사람드리다.
장경화는 부모의 명에 따라, 중매를 통하여 이루어진 봉건적인 결혼이었다. 그러니 곽말약이 장경화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더라도 이해되는 점이 있다. 장경화는 평생을 독수공방한다.
그러나, 안나는 달랐다. 안나와는 자유연애로 결혼하였으니, 책임을 다하여야 햇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혼인기간중에도 안림, 우립침등과 혼인외의 사랑을 가졌을 뿐아니라, 기원에 가서 기녀들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1937년부터 귀국한다는 핑계로 안나와 다섯 자녀를 완전히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를 찾았다. (당시 장남 화부는 20세, 차남 곽박은 18세, 삼남 불생은 15세, 딸 숙자는 13세, 사남 곽지홍은 6세였다). 이후 이들 모녀에게 편지한번 보내지 않았고, 돈 한번 부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내에서 전전하면서 겨우 생활했고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일본경찰에게 항상 감시당하며, 얻어맞고 살았으니, 그 고통을 이해할 만하다. <<개조일보>>의 기자인 육립지 선생이 1947년 동경의 안나의 거처를 찾아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참혹하였다고 한다. 집에는 그저 벽만 있고, 안에 아무 것도 없으며 식구들이 그저 약간의 마(芋)로 배고픔을 이기고 있었다고 한다. 안나는 중국기자앞에서 "정당(곽말약)이 이러면 안되었다. 그가 떠난 이후로, 우리는 나와 아이들은 항상 겁에 질려 살았다. 그는 소식하나 없었고, 이 식구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만일 전쟁때문이고,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핑계에 불과하다. 여기에도 중국으로부터의 소식은 많이 들어왔다. 나는 그가 귀국한 후 쓴 글도 보았다. 자기가 영광스럽게도 장개석을 만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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