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도굴역사상 4대문파: 모금파(摸金派), 발구파(發丘派)

by 중은우시 2011. 5. 21.

글: 문재봉(文裁縫)

 

문파(門派)라는 개념은 주로 무협소설에 나온다. 예를 들어, 고룡의 <육소봉전기>에서는 하나의 신비한 문파를 소개하고 있다. 즉, 십이연환오(十二連環塢)이다: 강호상 하나의 세력이 멀리는 새외에 미치는 문파가 있다. 그들은 모두 12채(寨)가 있는데,  겉으로 보면 보통의 산장이나 촌락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방어는 아주 삼엄하다. 조직도 아주 엄밀하다. 채의 요패(腰牌)와 호령(號令)이 없으면 누구도 들어가기 어렵다." 그외에 김용은 <소오강호>에서 주인공이 소재한 문파인 화산파(華山派)를 소개하고 있다: "화산파는 화산 옥녀봉에 있다. 악숙, 채자봉이 <규화보전>을 훔쳐본 이래 화산파는 기종(氣宗), 검종(劍宗)으로 나뉜다. 그리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옥녀봉의 대비검이 벌어지고, 기종이 화산을 독패한다. 가짜군자 악대군이 장문인이 된 후, 오악을 통채로 삼키려 한다. 그리하여 남도 해지도 자신도 해지며 화산파는 미약해진다."

 

그러나, "문파"는 마찬가지로 도굴에서도 나타난다. 도굴문파의 탄생근 아마도 중대한 역사적 사건의 영향을 받는 것같다. 예를 들어, 조조가 "모금교위(摸金校尉)"를 설립한 것은 이후 도굴범들이 자발적으로 어느 누군가를 스스로 조사로 인정하고, 그가 세운 도귤규칙을 지키는 자발적인 도굴문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굴문파는 일반적으로 어느 뛰어난 도굴범이 광명정대하게 문파를 개창한 것이라고 얘기되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도굴 자체가 그다지 정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역대이래로 도굴에 대한 단속은 아주 엄격하여, 이렇게 공공연히 내놓는 방식은 아마도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중국의 도굴사상, 주로 4개의 도굴문파가 나타난다. 즉, 모금파(摸金派), 발구파(發丘派), 반산파(搬山派) 및 사령파(嶺派)가 그것이다. 도굴문파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문파는 여전히 연원이 아주 길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문파의 제자들은 심지어 사제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신분관계도 가능하다. 그들은 각자 알아서 자신의 일을 하고, 각자 일을 한다. 심지어 서로 만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동의 도굴 '이념'은 인정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동일한 문파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무협소설에 나오는 문파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도굴문파의 '제자'들은 문파와 신분적인 관계는 없다. 그들은 자유롭고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도굴문파는 일부분 도굴범들의 사이버집단인 셈이다.

 

모금파: 간웅 조조가 '모금교위'를 둔 때로부터 시작되다.

 

동한 말기, 한 지방을 차지한 조조는 군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도굴을 하는 병종(兵種)을 둔다. 오늘날의 황금부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소위 황금부대는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에 속하면서, 1979년에 조직되는 경제건설부대이다. 국가재정의 일급예산단위로, 주로 국가의 황금광산조사업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국가와 군벌을 같이 볼 수는 없다. 광산자원과 골동문화재를 같이 비교할 수도 없다.

 

조조의 이 부대를 주관하는 직위는 바로 모금교위이다. 통속적인 말로 하자면, 모금교위는 바로 관방(지방군벌)이 발급한 도굴허가증을 지닌 도굴범두목인 셈이다. 한나라대 진림의 <위원소격예주>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이있다: "조조는 특별히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 모금교위를 두고, 지나가는 곳에는 파헤쳐지지 않은 유골이 없었다." 심지어 조조는 친히 양효왕묘의 도굴을 조직, 지휘한 바 있다고도 한다. 조조를 완전히 하류배로 취급한다. 나중에 원소의 병사들이 패배하면서 진림은 조조의 휘하에 들어온다. 조조는 그가 쓴 격문중에서 자신의 조상을 모욕한 것에 대하여는 아주 불만이었다. 그러나 도굴에 대하여는 묵인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외에 노신도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조조는 모금교위와 같은 류의 공무원을 두어 전문적으로 도굴에 종사하게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조는 난세의 효웅이고, 치세의 능신이며 정명(精明)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예의염치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그렇게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규범을 해치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조조가 도굴범의 오명을 뒤집어쓴 것은 그의 부친 조숭(曹嵩)이 서주를 지날 때 도겸의 부장에게 피살되어, 조조가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물으며 대거 보복을 한다. 그의 대군이 지나간 곳은 방화약탈, 도굴이 있었다. 조조는 이에 대하여 방임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조조 자신도 도겸의 조상묘를 파헤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일부인들은 이점을 가지고 견강부회하여, 포풍착영(捕風捉影)하여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조가 도굴부대를 조직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불문하고, 후세에 모금교위는 점차 도굴범을 지칭하는 단어가 된다. 심지어 도굴범중에서 '모금파'라는 도굴유파가 생겨나서, 발구, 반산, 사령의 삼문과 나란히 서게 된다. 그러나, 이 세개 문파는 송,원시기까지는 제자가 끊기면서, 인재가 결핍되며, 거의 제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왕왕 문파의 전승이 단절되게 된다. 그리하여 단지 모금일파만이 살아남게 된다. 모금파의 제자들을 모금교위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도굴범둥 반산도인, 사령역사, 발구장군과 나란히 불리는 명칭이 된다. 모금교위와 다른 도굴유파와의 구별은 주로 문규와 일처리수법에 있다. 모금교위는 단독행동을 좋아한다. 혼자서 처리하게는 곤란한 경우라면 자신이 아주 신임하는 파트너와 5인이하의 도굴팀을 만든다; 모금교위는 조사가 만든 계명불모금(鷄鳴不摸金)의 원칙을 지켰다. 모금교위는 묘실에 들어갈 때면 반드시 묘실의 동남쪽에 유등이나 촛불을 켜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취등(鬼吹燈)'을 겁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취등'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주인공중 하나인 뚱뚱이가 촛불이 꺼진 것을 보고, 주인공인 노호에게 초를 하나에 얼마씩 주고 샀는지 묻는다. 그리고 싼 물건을 산 것을 알고, 그들은 작은 말다툼을 벌인다. 사실 '귀취등'으로 인하여 긴장된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후에 그들이 고민한 것은 얻은 보물을 가져갈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였다.

 

모금교위는 풍수성상의 지식을 잘 이용했다. 예를 들어, '심용결'과 '분금정혈'의 재주와 기술이 있었다. 묘지의 정확한 소재를 알아내는 것이다. 묘금교위는 그저 대형 묘에만 손을 쓴다. 일반적인 백성의 묘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 모금교위는 일을 하면서 너무 심하게 하지는 않고, 자신이 도망칠 길을 마련해둔다. 비록 모금파에서 정식 사제관계는 없지만, 전문용어를 알아들어야 하고, 행동할 때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동문으로 인정받는다. 모금파는 자신의 신분인증시스템이 있는데, 모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符)를 차고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모금파의 문인이 된다.

 

발구파: 도굴시 대체할 수 없는 동인(銅印)을 지녀야 한다

 

발구파는 도굴역사상 모금파보다 늦게 나타난다. 동한시기가 되어 비로소 나타난다. 문인들은 자칭 '발구장군'이라고 한다. '발구천관(發丘天官)' 혹은 '발구영관(發丘靈官)'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발구장군과 모금교위는 두굴의 수단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주로 성상과 풍수를 이용하여 묘와 묘실의 위치를 확인하고 도굴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에서는 모금파에 비하여 약간 떨어진다. 다만, 발구장군은 모금교위와 다른 일처리품격과 문규를 가지고 있다. 발구장군은 왕왕 점포주인 혹은 골동품상인의 신분을 지니고 진정한 신분을 감춘다. 일반적으로 쉽게 손을 쓰지는 않고, 대형 능묘가 있어야 흥미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외에 발구장군은 협력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을 모아서 공동으로 행동한다. 단독으로 일하기 좋아하는 모금교위와는 완전히 다르다. 발구장군은 일처리가 온건하고,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단의 역량을 이용하고, 여기에 더하여 사전에 정교한 계획을 세워서 각종 응급사태에 대비한다. 일처리는 질서있게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이렇게 하여 도굴의 성공률과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다. 비록 발구장군의 도굴은 난이도가 낮기는 하지만, 위험성도 크게 낮아지낟. 다만 사후의 분배나 기밀유지에서 여러가지 골치거리가 생긴다. 얻는 것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발구장군은 여러 가지 문규가 보두 장물분배와 비밀유지에 관한 것이고, 외부인들은 알기가 어렵다. 전해지는 바로는 발구파에게 발구동인이 있는데 역량이 비범하다고 한다. 위에는 '백무금기(百無禁忌)'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발구파내에서 숭고한 지위를 가지고 잇는 발구동인이 나중에 불행히도 훼손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발구장군은 도굴4파중 유일하게 관청과의 협력을 꺼리지 않는 조직이라고 한다. 이는 다른 도굴문파들이 멸시하고 욕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관청과 협력하는 발구장군은 청나라때 외족의 박해를 받아, 부득이 해외로 망명해서 동남아와 미주지구를 떠돌게 된다. 당연히 그들은 기술을 쓸 곳이 없게 되지는 않았다. 여러가지 대형능묘의 고고발굴과정에서 그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동시에, 극내의 외적박해중에서 살아남은 발구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고고학자가 되거나 정부의 고고분먀에서 임직하게 된다. 이렇게 발구장군은 아주 강한 적응능력과 변신능력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