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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나라말기 몽골귀족의 적계부대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by 중은우시 2010. 3. 28.

글: 강호객(江湖客)

 

1. 몽골귀족의 적계부대

 

몽골의 원나라는 무력으로 남송을 멸망시켰고, 전체한족이 이족에게 통치받는 선례를 만든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원나라의 군대에는 몽골군(蒙古軍), 탐마적군(探馬赤軍), 한군(漢軍), 신부군(新附軍). 몽골군은 몽골인을 주력으로 구성한 군대로 몽골통치자의 적계이다; 탐마적군은 몽골의 각 천호(千戶), 만호(萬戶)중 뽑아서 선봉(先鋒), 진수(鎭守)등의 임무를 맡는 군대이다. 그 구성원은 색목인과 한인도 포함된다; 한군은 주로 중국북부, 사천일부지역, 운남등의 지방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신부군은 주로 남송에서 투항한 군대를 재편한 것이다.

 

원나라의 통치집단은 몽골족을 핵심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원나라의 군대도 몽골군을 핵심으로 한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군권(軍權)을 특히 중시했다. 전국에 체계적인 방위체계를 구축한다. 몽골통치자의 적계군대인 몽골군은 권력중추인 한정(汗廷)을 보위하는 임무와 전국각지의 진수(鎭戍)를 진수(鎭守)하는 임무를 맡았다.

 

몽골군이 전국각지에 둔 진수(鎭戍)는 <<원사.병지이>>에 따르면, "세조때 천하를 통일했다. 그 후에 종왕장병에게 변방의 요지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하락(河洛), 산동(山東)은 천하의 중심이므로 몽골, 탐마적군을 큰 부(府)에 주둔시켰다; 회하(淮), 장강(江)이남에서 남해에 이르는 곳은 한군 및 신부군으로 하여금 주둔하게 했다." 이는 몽골군이 전국에서 중요하게 지키는 곳은 북방임을 알 수 있다. 남방은 주로 한군과 신부군이 지켰다.

 

몽골군이 북방에 주둔한 곳으로는 4대 도만호부(都萬戶府)가 있다. 각각, 산동하북의 몽골군도만호부는 복주(濮州)에 두었고, 하남회북의 몽골군도만호부는 낙양(洛陽)에 두었으며, 사천의 몽골군도만호부는 성도(成都)에 두고, 섬서의 몽골군도만호부는 봉상(鳳翔)에 두었다.

 

이외에 원태조 징기스칸은 가족재산을 분배하는 몽골족의 관습에 따라, 대거 아들과 동생들에게 땅을 분봉해준다. 분봉받은 아들, 동생이 9명에 이르렀고, 1사람당 모두 왕국 하나씩을 수여받는다. 여러 왕들은 자신의 개인부하를 관리했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계승자들도 이 정책을 계승한다. 다른 한편으로, 몽골제국이 다른 나라를 계속하여 정복하고 영토가 계속하여 확대됨에 따라, 몽골귀족의 재산분배전통에도 새로운 발전이 나타난다. 몽골의 이성(異姓) 관료들도 분봉받아 왕이 된 자가 있다. 이렇게 하여 종왕출진(宗王出鎭)제도가 형성된다.

 

소위 종왕출진제도라 함은 원나라황제가 분봉한 여러 왕족 혹은 몽골족 이성관료로 왕이 된 자는 병력을 이끌고 변방으로 나가서 조정을 연다. 종왕이 변방을 지키는 지역은 막북전선의 북평왕, 진왕; 서북지구의 무정왕, 서녕왕등등이 있다. 중추지구, 서남지구, 강회등지구에도 진수시킨다.

 

2. 몽골귀족의 적계군대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몽골귀족의 적계군대가 무너진 과정에 관하여, '중추한정(中樞汗廷)', 몽골군도만호부, 분봉받아 진수한 여러 왕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1) 중추한정이 무너진 과정

 

- 지정18년 십이월, 원나라 상도(上都) 개평(開平) 의군(義軍)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頭潘)부대에 함락되고, 궁궐이 불에 타서 폐허로 된다.

- 지정28년 윤칠월, 원나라 대도(大都)가 북벌에 나선 명나라의 서달(徐達) 부대에 함락되고, 원순제(元順帝)는 북으로 도주한다. 감국(監國)인 회왕(淮王) 테무르부화는 체포되어 살해당한다.

- 홍무2년(지정29년), 명나라장수 상우춘(常遇春), 이문충(李文忠)이 상도를 함락시키고, 원순제는 북으로 도망친다. 명나라군대는 백리를 추격하여, 종왕 경손등 만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 홍무3년 사월, 원순제가 응창(應昌)에서 사망한다. 태자인 아유시리다라가 즉위한다. 오월, 명나라장수 이문충이 응창을 함락시키고, 아유시리다라는 수십기를 이끌고 북으로 도주한다. 명나라군은 아유시리다라의 아들인 마이더리바라 및 황후, 비, 왕 및 관리 수백명이 체포당한다. 그리고 송나라, 원나라의 옥새도 빼앗긴다.

- 홍무11년, 아유시리다라가 사망한다. 칸의 자리는 토고스 테무르에게 물려준다.

- 홍무21년 사월, 명나라장수 남옥(藍玉)이 군대를 이끌고 토고스 테무르의 본영을 습격하여, 그의 둘째아들 디바오누 및 후비 공주 5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여러 왕과 관리 삼천, 남여 칠만여, 말, 낙타, 소, 양 십만을 획득한다. 토고스 테무르는 겨우 태자인 텐바오누, 지원 네체라이, 승상 시리에먼 등 수십기를 이끌고 도주한다. 그런데, 토고스 테무르와 태자 텐바오누는 도중에 에수디르에게 살해당한다. 토고스 테무르가 죽은 후, 그오 함께 도망쳤던, 네체라이, 시리에먼등은 나중에 모두 명나라에 투항한다.

 

(2) 몽골군도만호부가 무너진 과정

 

산동, 하북의 몽골군도만호부는 복주에 있었다. 이는 제녕로(濟寧路)에 속한다.

 

- 지정17년 칠월, 황하의군만호 전풍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녕로를 함락시킨다. 원나라조정에 충성을 다하던 또 다른 의군만호인 맹본주가 전풍을 격파하고 제녕로를 되찾는다.

- 지정18년 이월, 전풍은 다시 제녕로를 함락시킨다. 삼월, 원나라장수 볼로드 테무르는 복주를 수복한다.

- 지정21년 팔월, 전풍은 원나라장수 차칸 테무르에게 투항하였다가, 차칸 테무르를 암살하고 다시 반기를 든다. 차칸테무르의 양자인 코코테무르가 전풍을 죽이고 산동을 장악한다.

- 지정27년 십일월, 서달의 부대가 산동으로 진입하여, 제녕로를 함락시킨다.

 

하남,회북의 몽골군도만호부는 낙양에 있었고, 하남부(河南府)에 속한다.

 

- 지정11년, 의군 왕권, 장춘등이 하남부를 함락시킨다. 나중에 원나라군대가 수복한다.

- 지정15년, 의군 유복통의 부대의 장수 조명달 등이 낙양을 함락시킨다. 나중에 원나라장수 차칸 테무르에게 패배한다.

- 지정28년(홍무원년), 명나라장수 서달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함락시킨다.

 

섬서의 몽골도만호부는 봉상에 있었다.

- 지정17년 십월, 의군 백불신, 이희의등이 봉상을 포위공격하는데, 나중에 증원온 원나라장수 차칸 테무르, 이사제등에게 격파당한다.

- 지정29년(홍무2년), 명나라군대가 봉상을 함락시킨다. 수비장수 이사제는 임조로 도망친다.

 

사천의 몽골도만호부는 성도에 있었다.

- 지정십칠년, 의군 명옥진의 부대가 성도를 함락시키고 하(夏)나라를 건립한다.

- 홍무2년 정월, 명나라군대가 하나라를 토벌한다. 칠월, 명나라장수 부우덕(傅友德)이 성도를 점령한다.

 

(3) 중원, 대강남북의 제왕의 진수가 무너진 과정

 

의정왕 마이누(買奴)는 익도(益都)를 지키고 있었다.

- 지정17년 삼월, 의군 모귀의 부대가 익도로를 함락시킨다. 마이누는 도망친다.

- 지정18년 삼월, 의군 전풍이 다시 익도로를 함락시킨다.

- 지정23년 십일월, 원나라장수 코코 테쿠르가 익도를 수복한다.

- 지정27년 십일월, 의군 서달의 부대가 익도를 함락시킨다.

 

문제왕 부화테무르는 대명(大名)을 지키고 있었다.

- 지정17년 팔월, 의군 유복통이 대명을 함락시킨다. 구월, 원나라장수 타이부화(太不花)가 대명을 수복한다.

- 지정29년(홍무2년) 삼월, 북벌하는 명군이 대명을 차지한다.

- 홍군3년 봄, 명나라장수 서달이 군대를 이끌고 정서(定西)에서 코코 테무르를 대파하고, 그의 문무관료 천팔백육십명을 포로로 잡고, 항복한 장병이 팔만여명에 달하였다. 문제왕도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힌다.

 

진남왕 볼로드부화는 양주(揚州)를 지키고 있었다.

- 지정7년, 볼로드부화는 군대를 이끌고 집경의 의병을 진압한다. 그후, 다시 위순왕 콴처부화와 함께 정주의 의병을 진압한다.

- 지정15년, 의군 장사성의 부대의 항복을 받아낸다.

- 지정16년 삼월, 양주를 지키던 지주들의 무장세력인 '청군(靑軍)'의 우두머리인 장명감(張明鑒)이 볼로드부화를 쫓아낸다. 볼로드부화는 회안으로 도망간다.

- 지정16년 삼월 회안으로 간 볼로드부화는 의군 조군용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처와 함께 강에 투신한다. 볼로드부화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다성누(大聖奴)가 진남왕의 작위를 승계한다.

- 지정17년 팔월, 의군 주원장이 장수 무대형을 양주로로 진공시킨다. '청군'의 두령 장명감은 투항한다.

- 지정19년 다성누가 신주를 지킨다. 의군 진우량은 장수 왕봉국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신주를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키고, 다성누는 사망한다.

 

의양왕 테무르부화는 여주(廬州)를 지켰다.

- 지정16년, 여주가 함락되고, 테무르부화는 북으로 도망간다. 의군인 좌군필이 여주를 점거한다.

- 지정23년 7월, 주원장이 서달을 보내어 여주를 공격하게 한다.

- 테무르부화는 북경으로 도망간 후 회왕 감국으로 승진한다.

- 지정28년 윤칠월, 테무르부화는 대도에서 북벌하던 명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죽는다.

 

위순왕 콴처부화는 무창(武昌)을 지켰다. 그는 태정2년 3월에 왕이 되고, 커식타이 500명을 거느리고, 다시 천명이상의 병사를 스스로 모집하여 지키게 한다.

- 지정11년, 두 아들 비에테무르, 다테무르를 데리고 의군 예문준과 싸우나, 패배한다. 아들 비에테무르는 포로로 잡힌다.

- 지정12년, 의군이 무창을 함락시킨다. 콴처부화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원순제는 그의 왕의 도장을 빼앗는 조서를 내린다.

- 지정13년, 원나라군대가 무창, 한양을 수복한다. 원순제는 콴처부화가 전투에 공로가 있음을 보고는, 지정14년에 그의 왕의 도장을 되돌려준다.

- 지정15년 칠월, 예문준이 다시 무창, 한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 지정16년, 콴처부화는 선양왕 테무르부화와 회경을 방어한다. 오래지 않아 아들 바오은누(報恩奴), 제다이누(接待奴), 포자누(佛家奴) 및 처첩과 함께 의군 예문준과 한양에서 전투를 벌이나 패배한다. 아들 제다이누, 포자누가 사망하고, 처첩은 모두 죽는다. 이어 예문준은 악주를 함락시키고, 콴처부화는 도망치고, 아들 다테무르는 사망한다. 그후, 무창은 의군 진우량이 장악한다.

- 지원24년 이월, 주원장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무창을 점령한다.

- 콴처부화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운남에서 사천으로 들어갔다가, 섬서 성주로 간다. 북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원나라장수 이사제가 저지하여, 할 수 없이 성주에 주둔한다. 얼마후 죽는다. 콴처부화의 아들 허상(和尙)이 의왕에 봉해진다.

- 지정27년, 원순제가 북으로 도주할 때, 허상과 회왕 테무르부화에게 대도를 지키도록 한다. 명나라군대가 공격해왔을 때, 허상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3. 꼬릿말

 

원나라말기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한 몽골의 여러 왕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지정13년 태주에서 의군 장사성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 완저두(完者都), 하남에서 의군에 체포되어 살해당한 위왕 테로테무르, 지정28년 4월, 하남에서 명나라에 투항한 양왕 아루원, 지정29년 육월 상두에서 명나라군대에 피살당한 하남왕 푸화(普化), 신개령에서 전사한 위정왕 황화테무르(황화테무르가 아마도 <<명사.상우춘전>>에 나오는 종왕 경생일 것이다. 명사에 따르면 종왕 경생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혔다); 홍무3년 봄, 정서에서 문제왕과 함께 명나라에 포로로 잡힌 섬왕, 홍무13년, 서량에서 명군에 포로로 잡힌 유성왕, 홍무20년, 원나라 요양행성 평정성사 나하추가 부의 '이십여만명'을 이끌고 명나라에 투항하는데, 나하추를 따라서 투항한 사람들 중에 몽골의 왕이 9명, 국공군왕이 4명이 있었다. 홍무21년 사월, 푸위르하이에서 명나라군대가 포로로 잡은 대왕도 있다.

 

원나라말기에, 몽골귀족의 적계부대는 전란중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얼마나 손실을 입었을까? 각종 사료에는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명나라말기 몽골족의 한 무명의 문학가가 쓴 <<황금사>>에는 원순제가 20만몰골인을 버리고, 후비, 황자들과 함께 나머지 십만몽골을 데리고 도망쳤따고 한다.

 

명나라말기, 여진의 우두머리 누르하치는 몽골의 차하르부의 린단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하르부의 칸이 보낸 서신에서 '사십만몽골국주 바투루 징기스칸, 수빈삼만만주국주 신무영명황제에게 보낸다. 운운'했는데, 어찌 40만 몽골무리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자랑하는가? 내가 듣기로는 명나라 홍무때, 그대들의 대도를 취하면서, 몽골의 사십만 무리가 모조리 죽고, 피해서 도망친 자가 6만밖에 되지 않는다" 

 

청나라 강희제때, 몽골인 사낭처천이 쓴 <<몽골원류>>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큰 난리때 각지에서 전투를 벌이던 몽골인등 사십만명 중에서 벗어나서 살아남은 자가 6만이다. 나머지 34만명이 모조리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