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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 송인종(宋仁宗)과 세 명의 모친

by 중은우시 2011. 7. 9.

글: 조염(趙炎)

 

널리 알려진 민간의 전설이 하나 있다.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인데, 송인종 조정(趙楨)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버전은 여러가지이다. 소설 <칠협오의(七俠五義)>가 있고, 같은 제목의 TV드라마도 있다. 대체적인 이야기전개는 비슷하다: 유씨(劉氏), 이씨(李氏)의 두 귀비(貴妃)는 송진종(宋眞宗)의 만년에 동시에 임신했다. 정궁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심계가 뛰어난 유씨는 이씨가 낳은 아이를 가죽을 벗긴 고양이로 바꿔치기해서, 이씨가 요물을 낳았다고 모욕한다. 송진종도 대노하여, 이씨를 냉궁으로 보내고, 유씨는 황후로 삼는다. 나중에 유씨가 낳은 아들은 요절하고, 이씨가 낳은 아들이 우여곡절끝에 태자가 되고, 나중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송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포청천의 도움하에, 송인종이 진상을 알게 되고, 두 눈을 실명한 생모 이씨와 만난다. 그리고 황태후가 되어 있던 유씨는 스스로의 죄를 알고는 두려워 목을 매 자결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역사는 어떠했을까? 이렇게 어둡고 참혹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아주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인간미가 넘친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 여인이 아니라, 세 여인이다. 혹은 세 모친이다. 그녀들은 각자 서로 다른 모성애를 보였고, 무엇이 여인의 미덕인지를 한껏 보여주었다. 그리고 송인종에게 평화롭고 온화한 성장환경을 마련해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정이 41년간 황제를 지내고, 죽은 후에 '인종'이라는 묘호를 얻게 된 것은 이 세 모친의 훈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진실한 역사에서, 송인종 조정은 유황후의 아들이 확실히 아니다. 그의 생모는 이씨이다. 원래 유황후의 곁에 있던 보통시녀였고, 항주사람이다. 아마도 자신에게는 생육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유황후가 자리를 마련해주어, 이씨가 황제와 합방하여 이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유황후는 아주 기뻐했고, 강보에 싸인 조정을 자신이 길렀다. 그리고 양(楊)씨성의 또 다른 귀비와 함께 이 아이를 돌본다. 즉, 조정은 태어나자마자, 3명의 모친이 생긴 것이다. 한 명의 생모와 두 명의 양모.

 

유황후는 전설에서처럼 그렇게 악독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녀는 이씨성의 시녀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고, 그녀의 지위를 계속 올려주었다. 먼저 재인(才人)으로 오르고, 다시 완의(婉儀)에 올랐다. 송인종이 즉위한 후에는 다시 순용(順容)으로 오른다. 그녀는 또한 이씨의 친척들을 찾아서, 그녀의 남동생에게는 관직을 내렸다. 당연히 완벽한 사람은 없다. 유황후는 성현이 아니었고, 그녀에게도 보통여인의 일면이 있었다. 황제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어서 세월이 오래 흐르면 시비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씨를 궁외로 내보내어 선제 송진종의 능묘를 지키게 한다.

 

<송사>및 관련 필기를 읽어보면, 이씨에 대하여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문헌에 보면 그녀는 천성적으로 과묵했고, 선량하고 순박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황제가 된 후, 그녀는 선제의 여러 비빈들 틈에 섞여서 아무런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궁정은 원래 시비가 많은 곳이고, 거대한 명리다툼이 벌어지는 곳이다. 전통적인 '모친은 아들로 인해 귀해진다'는 관념이 이씨에게는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이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모친이 이처럼 자신의 친아들에 대한 사랑을 참을 수 있었고, 아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하여 여러해동안 이를 드러내서 자랑하지 않고, 이것때문에 시비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녀가 아름다운 품성을 지니고 있었고, 위대한 모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씨는 1032년(송 명도원년)에 죽는다. 향년 46세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유황후(이미 황태후의 신분이었다)는 송인종의 명의로 그녀를 선황의 귀비로 올려준다: 신비(宸妃). 이귀비의 장례때, 유황태후는 재상 여이간(呂夷簡)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후의 격으로 매장한다. 1년후인 1033년, 유황태후가 사망한다. 향년 65세이다.

 

또 하나의 모친이 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양씨성의 귀비이다. 역사에서 양숙비(楊淑妃)로 불린다. 그녀도 사리에 밝고 선명한 모친이었다. 송인종은 유씨와 양비의 손에 길러진다. 구체적인 생활에서 양비가 더욱 많이 관여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송인종은 유황후를 큰어머니, 양비를 작은어머니라고 불렀다. 양비는 후궁에서 세상과 다투지 않는 세월을 보낸다. 그녀는 인간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녀는 유황후와도 잘 지냈을 뿐아니라, 이씨도 잘 돌봐주었다. 송인종은 그녀의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녀의 조카를 제사부사(諸司副使)에 임명하려 하자, 그녀가 나서서, "그가 어찌 큰 은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작은 관직이면 됩니다"라고 하여, 다시 "우시금(右侍禁)"으로 봉한다.

 

그렇다면, 송인종은 마음 속으로 이 세 모친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거기에도 복잡한 점이 있었겠지만, 아주 감동적이었다. 거기에는 가족의 정, 효도, 감사등 여러가지 목잡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가족관계로 본다면, 송인종은 아주 잘 처리했고, 인간성이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송인종은 시종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지 못했다. 유황태후가 사망하고나서, 연왕이 그에게 생모는 이신비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이신비가 유황태후에게 죽었다고 말한다. 송인종은 조회를 수일간 나가지 않고, 애통하여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리고 친히 이신비의 묘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관을 열어 시신을 검사한다. 관을 열자, 이신비는 살아있는 것과 같았고, 입고 있는 의복은 황후의 규격이었다. 송인종은 그제서야 탄식한다. "사람의 말은 믿을 게 못되는 구나." 그러나, 이 <송사>의 기록은 좀 이상한 점들이 있다.

 

첫째, 당시 궁의 내외에서 모두 송인종은 황태후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궁내의 소문은 말할 것도 없지만, 궁밖의 대신들도 각종 이유로 글을 올려 유황태후를 공격했었다. 거기에서 여러가지 암시가 들어있었다. 1031년, 범중엄은 상소를 올려 태후에게 정무를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주장하였다가 좌천당한다. 당시에 유태후가 칭제임조하고 있었지만, 이런 글들은 황제본인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몰랐을 리가 없다.

 

둘째, <송사>에는 여이간이 유태후에게 황후의 규격으로 이신비를 후장하도록 하였다는데, 이는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신비가 죽자, 유태후가 여러 신하들 및 황제와 함께 어떻게 안장할 것인지를 논의했다고 한다. 여이간이 후장해야한다고 아뢰자, 유태후는 즉시 일어나서 황제를 데리고 나간다. 한참후, 다시 돌아와서 주렴뒤에서 여이간에게 묻는다. "너의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우리 모자를 이간하려는 것이냐?" 여이간이 대답한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은 태후를 위하여 생각한 것입니다." 유태후는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너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여이간이 말한다: "궁내의 후궁1품규격으로 대우하면 됩니다." 유태후가 이 건의를 묵인한다. 그리고 여이간에게 구체적인 처리를 맡긴다. 여이간은 다시 구체적인 일처리를 궁내태감에게 맡긴다. 이분은 황제의 생모이시니, 황후의 의관을 하도록 하고, 수은으로 유체를 보호하라고. 관이 나가는 노선도 논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비빈의 장례는 궁의 담장에 측문을 뚫어서, 목관을 운구해 나간다. 여이간은 황후의 장례와 같이 서화문으로 관을 운구하도록 주장한다. 유태후는 이 건의에 동의한다. 모든 것은 여이간의 조치에 따라, 황후의 규격으로 아주 융중하게 장례를 처리했다.

 

임종전에야 귀비의 지위에 오른 보통궁녀의 장례를 황후의 규격으로 융중하게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융중하게 나팔을 불고 징을 두드려야 하며, 황제 본인도 친히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장례의 세부사항을 논의할 때, 황태후가 황제를 데리고 나간 후, 혼자서 돌아와서 대신들과 논의하였다는 것인데, 이때 송인종의 나이가 이미 이십여세이다. 지적능력도 정상이었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건 너무나 상식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다: 송인종은 아마도 일찌감치 이 일을 알았을 것이다. 그저 대국을 고려하여,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그는 이 일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일단 드러내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유태후를 폐위시키고, 이신비를 태후에 앉힐 것인가? 유태후를 폐위시키지 않는다면, 이신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생모가 얼울하기는 하지만, 그는 모르는 척하면서 평안하게 지냈던 것이다.

 

유태후가 죽은 후, 대신, 친왕들이 속속 이 일을 얘기했고, 적지 않은 대신들 특히 태후가 수렴청정할 때 좌천된 대신들은 유황후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거기세 살을 덧붙였다. 그리하여 송인종도 더 이상은 모르는 척 할 수 없게 되었고, 그제서야 알게 된 척하였다.

 

그가 관을 열어 시신을 검사한 것은 유태후가 이신비를 해쳤다고 의심해서가 아니다. 이를 통하여 왕공대신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신비를 황후의 규격으로 장사지내는 전과정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마도 이 모든 것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제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태후가 지시한다고 하더라도, 환관들이 황후의 규격으로 장사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감히 관을 열라고 한 것은 일찌감치 관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에 그는 조서를 내려, 대신들이 유태후의 수렴청정에 대하여 더이상 말을 하지 말도록 명한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송인종이 관을 열고 시신을 검사한 적이 한번 더 있다. 그것은 대신 하송(夏竦)이 죽은 후이다. 하송은 살아있을 때 비교적 능력이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밉보여, 간신으로 불리웠다. 그가 죽은 후, 어떤 사람이 그가 가짜로 죽은 척한다고 말한다. 송인종은 할 수없이, 친히 하씨집안으로 가서 관을 열어 시신을 검사한다. 아마도 하송을 보호하기 위하여서일 것이다.

 

송인종은 아주 선량한 사람이다. 그는 그에게 은혜를 베푼 두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이 없었다. 유태후는 그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어려서부터 그를 잘 길렀다. 그리고 황제로 만들었다. 이신비는 그의 생모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가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실상, 송인종과 유황후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송인종이 18세와 20세가 되었을 때, 각각 조정신하들이 황제가 이미 성년이 되었으니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황제가 친정하도록 주청한다. 그러나 송인종은 친히 재상과 문무백관을 이끌고 태후에게 생일축하인사를 하며, 황제가 여러 신하들의 앞에서 유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행한다. 이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통상적인 법도라면, 태후이 생일은 황제의 집안 일이므로, 황제가 궁안에서 생일행사를 하면 되는 것이다. 송인종의 이러한 행동은 대신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송인종은 개의치 않는다. 그가 대례를 행한 목적은 신하들에게 그와 황태후간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황태후의 수렴청정에 그는 완전히 동의한다는 취지이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생모이씨를 장의(章懿)황태후로 추존한다. 이때는 유태후가 죽은지 1개월후이다. 유태후는 죽은 후 장헌명숙(章獻明肅)황태후의 시호를 바친다. 그리고 이 시호를 박탈하거나 종묘에서 옮기지 않고 종전과 똑같이제사지낸다. 일반적으로 황후의 사후에 두 글자의 시호를 내리는데, 임조칭제한 황후의 경우에만 네 글자의 시호를 붙인다. 이 시호도 아주 생각을 많이 한 것이다. "의(懿)"는 인품이 좋다는 뜻이다. 이태후에게 붙였다; "헌(獻)"은 바쳤다는 것이다. 유태후가 자신의 일생을 국가에 바치고, 두 황제에게 바쳤다는 뜻이다. 일찌기 유황후와 함께 자신을 길러준 양숙비에게도 송인종은 효도를 다한다. 양숙비를 황태후로 하여 송인종의 국사처리를 도와주게 하려 했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송인종은 양숙비를 황태후의 예로 모셨다. 양숙비가 거주하는 궁전은 보경궁이어서, 역사서에서는 어떤 때는 양숙비를 보경황태후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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