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이종(宋理宗)의 이야기

중은우시 2011. 9. 15. 17:24

글: 문재봉(文裁縫)

 

일찌기 어떤 사람이 이런 의문을 나타낸 적이 있다. 남송의 제5대 황제인 송이종은 황자(皇子)도 아닌데, 마지막에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 이건 무엇때문인가? 그는 짝퉁황제는 아닌가? 그가 황위를 승계하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 아래에서 송이종의 비밀을 하나하나 파헤쳐 보자.

 

송이종(1205-1264)의 본명은 조여거(趙與)였다. 1222년 송영종(宋寧宗)의 동생인 기왕(沂王)의 양자가 되고, 이름을 귀성(貴誠)으로 고친다. 그리고 1224년에는 송영종의 황자(皇子)가 되어 다시 윤()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그는 남송의 제5대황제로서 제위기간이 1224년-1264년까지이며 시간은 남송왕조의 거의 1/4을 점한다. 양송황제중에서 재위기간이 긴 것으로 치자면 41년간 재위했던 송인종(1023-1063)에 바로 다음 간다. 조윤은 남송에서 아주 중요한 황제이다. 그리고 남송의 붕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의 황위승계과정은 여러가지 이야기거리를 남겨주었다.

 

송이종은 원래 황자가 아니다. 그는 송나라황실의 먼 친척에 불과했다. 그는 조광윤의 장남인 조덕소(趙德昭)의 9대손이다. 그의 전임황제인 송영종이 죽은 후, 재상인 사미원(史彌遠)이 조서를 고쳐서 태자 조홍(趙弘)을 폐하고, 귀성을 황제에 앉히니 즉 송이종이다. 사미원은 송영종말부터 재상의 지위에서 권력을 10여년이나 독점했다. 그가 재상으로 있을 때, 송영종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화부귀가 송영종의 사망과 더불어 끝나고, 신황제가 즉위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송영종의 후사문제에 신경을 많이 쏟았다. 송영종에게는 영왕(榮王)이 유일한 황자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영왕이 황태자로 정해진다. 이것은 사미원의 뜻에도 맞았다. 왜냐하면 영왕와 사미원은 사적인 친분이 돈독했기 때문이다. 그들 둘은 힘을 합쳐서 한탁주(韓胄)를 제거한다. 그러므로, 영왕이 황제위를 계승하는 것은 사미원에게 아주 유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정12년(1219년) 영왕이 병사하고 만다. 그래서 영왕은 또 다른 후계자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자 사미원은 조급해진다. 새로 옹립된 황태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까봐 우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송영종의 후사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다.

 

가정14년(1221년), 송영종은 기왕의 아들 귀화(貴和)를 좋게 보아,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한다. 그리고 조굉(趙)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그후 영왕은 사미원에게 기왕의 후사가 필요하니 양아들을 하나 구해보라고 지시한다. 시미원은 기왕과 접촉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조굉의 사람됨을 잘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장래를 가볍게 조굉에 모두 의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종에게 후사를 선정하는데 신중할 것을 밀주하여, 여러 명이 황실자제를 궁중에 모아놓고 그들의 인품과 능력을 살펴본 후에 황태자가 될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송영종은 사미원의 생각이 주도면밀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준다고 생각하여 그들 더욱 신임하게 된다. 그리하여, 황실의 후계자를 선발하는 일을 사미원에게 맡겨버린다. 송영종은 사미원이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계속하여 고려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미원은 송나라가 남천할 때, 적지 않은 황실자제들이 서부절강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천사(余天賜)를 그 일대에 보내어 몰락한 황실자제들을 찾도록 시켰다. 여천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금방 사미원에게 두 명의 기품이 비범한 황실자제를 데리고 온다. 사미원은 만나본 후 아주 만족한다. 두 사람은 확실히 부귀의 상을 타고 났다. 그래서 그는 송영종에게 두 사람에 대한 좋은 얘기를 많이 한다. 이 두 황실자제의 재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품행은 얼마나 대단한지를 계속 얘기한 것이다. 그리하여 송영종은 두명의 종실자제를 만나본다. 송영종도 이들을 만나본 후 아주 만족한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은 조여거를 기왕의 양자로 보내고, 귀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병의랑(秉義郞)을 제수한다.

 

사미원은 몰래 귀성과 또 다른 종실자제인 조굉의 살펴본다. 그는 귀성이 사람됨이 괜찮고 품행도 방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매번 조회에 나타날 때마다 엄숙한 태도를 취하며, 생각도 깊이가 있었다. 특히 그는 사미원에게 공손했다. 그래서 귀성에 대하여는 아주 만족한다. 귀성과는 장래에 협력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귀성을 계속하여 칭찬한다. 이와 비교하자면, 조굉은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누구도 무시하는 태도였고, 사미원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사미원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대하여도 불만을 나타냈다. 사미원은 두 사람을 비교한 후 자연히 귀성에게 기울게 된다.

 

그러나, 황상이 친히 결정한 후계자를 제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미원은 심모원려를 세워서 조굉을 제거한다. 그는 조굉의 주변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둔다. 그리하여 조굉이 자신에게 큰 불만을 가졌을 뿐아니라, 자신을 제거하려고까지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조굉을 없애려는 마음을 더욱 굳힌다. 사미원은 우선 귀성에 대하여 후계자로서의 훈련을 시킨다. 송영왕이 서거하기 전에 조굉을 폐위시키는 일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송영종에게 계속하여 조굉을 폐하고 귀성을 후계자로 정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송영종은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명확히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렇게 신중하게 말할 뿐이다: "집안에 아직 노모가 있는데, 이 일을 내가 어떻게 마음대로 결정하겠는가?" 그러나, 사미원은 성지를 조작하여, 귀성을 황태자로 세우며, 이름을 조윤으로 하사하며 국공(國公)에 봉한다는 내용을 쓴다. 송영종이 서거한 후, 조윤은 순조롭게 황위를 계승승하여 남송의 제5대황제가 된다.

 

조윤이 황위를 계승한 과정은 송영종말기의 권신인 사미원이 벌인 일이다. 그리고 송이종이 즉위한 후 초반 10년간은 송이종이 권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정치에 대하여는 전혀 관여하지 못하다. 모든 일은 권신 사미원이 조종한다. 송이종은 그저 괴뢰황제였다. 1233년 사미원이 죽은 후, 송이종은 자신의 집정생애를 시작하여, 친히 정사를 돌보게 된다. 그는 집권초기에 송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여러가지 개혁조치를 취한다. 예를 들어, 사당(史黨)을 폐출하고, 대간을 친히 뽑고, 관료사회를 정돈하며, 재정을 정비한다. 역사적으로 이들 개혁은 "단평경화(端平更化)"라고 부른다. 그러나, 송이종의 집권후반은 조정의 대권이 다시 정대전(丁大全), 가사도(賈似道)등 간신의 손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국세는 날로 쇠퇴한다. 1259년 몽골이 악주를 침입하자, 재상 가사도는 송이종의 명의로 몽골에 머리를 숙이고 신하를 칭한다. 그리고 장강이북의 토지 전부를 몽골에 할양한다. 이때부터 남송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