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전아평(錢亞萍)
2011년 2월 3일, 홍콩무선TV방송국(TVB)의 설날행사에, 나이가 100세를 넘긴 “육숙(六叔)” 소일부는 여전히 여러 스타들에게 둘러싸여서 사람들에게 돈봉투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TVB는 더 이상 그의 제국이 아니었다.
1월 26일 저녁, 한 조용하게 발표된 성명은 홍콩 오락계와 재경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여러해동안 TVB가 매각될 것이라는 소문은 있어왔는데, 마침내 결론이 난 것이다. 홍콩전시광파유한공사의 공식웹사이트에는 공고를 내서, 소씨형제(쇼브라더스)는 홍콩상인 진국강(陳國强)을 대표로 하는 투자집단에 그가 소유한 TVB의 주식을 매각하며, 주식전부는 2011년 3월 31일 혹은 그 이전에 이전완료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소일부, 이 홍콩오락계의 ‘활화석’이 정식으로 그가 43년간 장악했던 TV제국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TVB의 성명에서 거래가격은 공개되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TVB를 전체적으로 인수하는 금액은 약 8,9십억홍콩달러에 달할 것으로 본다. 여기에는 TVB의 주식과 서공청수만도의 소씨영화촬영소 지역의 토지가 포함된다. 이는 소씨가족이 43년간 통치하던 TVB의 왕조가 이제는 교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TVB는 1967년 11월 19일에 창립되었고, 상당한 기간동안 그들의 TV드라마는 홍콩지역과 대륙의 주요TV시간대를 차지했다. 현재 홍콩지역에서 TVB는 여전히 무료TV시장에서 독점적인 패주지위를 장악하고 있고, 세계최대의 광동어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다.
TVB의 창립부터 지금까지 여러 개의 휘황한 성과가 있었다. 1968년, TVB는 홍콩의 첫번째 TV연속극 <몽단정천(夢斷情天)>을 제작하고,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통하여 올림픽경기와 인류의 최초 달착륙장면을 방송한다. 1971년, TVB가 제작한 <환락금소(歡樂今宵)>는 홍콩에서 처음으로 만든 칼라프로그램이었다. TVB는 1973년 최초의 미스홍콩선발대회도 주최한다.
TVB는 최초에 직원이 약 200명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그들의 업무는 각지에 퍼져 있고, 이미 전세계 최대의 중국어미디어중 하나로 성장한다. 지금은 4500명의 풀타임직원이 있다. 이번 거래가 공표된 후, TVB의 주가는 연일 약세를 보인다. 그래도 그 시장가치는 여전히 200억홍콩달러에 가깝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페이지를 넘겼다. 홍콩의 여론은 의문을 품고 있다: 43세의 TVB는 백세노인 소일부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되어도 여정히 휘황한 역사를 지속할 수 있을까?
소일부는 1907년에 태어났다. 조적은 영파(寧波)이고 가족은 대대로 장사를 했다. 그는 여섯째이므로 사람들이 ‘육숙’이라고 불렀다. 소씨집안에는 네 형제가 있다. 모두 오락계에 투신한다. 소일부는 홍콩오락계의 말그대로 ‘대부’이다. 그와 그의 소씨왕국은 홍콩영화와 TV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1958년 소일부는 홍콩으로 옮겨가서, 셋째형 소인매(邵仁枚)와 소씨형제(홍콩)유한공사(쇼브라더스)를 만든다. 소일부가 총재를 맡았다. 이것이 나중에 쇼브라더스영화제작회사로 된다.
1961년, ‘동방 헐리우드’로 불리우던 소씨영성(邵氏影城)이 정식 시작한다. 바로 이 영화성에서, 쇼브라더스는 1000여편의 영화를 찍는다. 홍콩영화TV업계를 수십년간 독점하게 된다.
TV업계의 성장과 더불어, 소일부는 화려하게 변신한다. 1985년, “소씨영성”의 스타들과 홍콩연예계의 엘리트들을 모두 문하로 끌어들인다. TVB가 제작한 드라마의 시청률은 급격히 상승한다. 다른 홍콩의 경쟁적수인 아시(亞視)를 압도한다. 홍콩영화TV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여러 홍콩가족기업과 마찬가지로, 누가 이 방대한 미디어제국을 물려받을 것인가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소일부는 이미 백세를 넘겼고, 그는 그가 창립한 사업의 적합한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홍콩에서 대부분의 가족기업은 모두 혈맥을 중시한다. 자녀가 승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평등한 제도가 실제로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재산을 나누게 되면 기업발전의 실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기업의 부가 축적되다가 돌연 요절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기업에서 자주 ‘부가 삼대를 못넘긴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소일부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 TVB가 설립40년을 넘기면서, 여러가지 갱년기증세가 나타났다. TV드라마를 마구잡이로 만들어내는 폐단에서 내부파벌투쟁이 끊이지 않는 것까지, 그리고 연예인들이 속속 떠나는 것부터 얼마전의 총경리 진지운(陳志雲)이 조사를 받는 것까지, TVB는 이미 문제투성이였다. 또 다른 측면으로, 경쟁적수가 갈수록 많아졌다. TVB의 시청률과 광고수입도 영향을 받게 된다.
TVB의 장래가 결정되고 있지 못한 점에 대하여 외부에서는 우려가 있었다. 일단 소일부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면, TVB는 아마도 공여심의 재산다툼과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재산분쟁으로 가족구성원간에 원수지간이 된 재벌그룹의 사례가 또 다시 상연되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괜한 것은 아니다. 소일부의 가족구성원의 관계는 아주 미묘한 점이 있다.
사람들은 미스홍콩들에 둘러싸여있는 소일부에 익숙한다. 이는 그의 휘하에 미녀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소일부는 두번의 결혼밖에 없다. 원부인 황미진(黃美珍)은 4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녀가 사망한지 10년후에, 90세의 소일부는 62세의 방일화(方逸華)와 결혼한다. 이 실질적인 ‘육심(六嬸)’은 일찍이 1965년부터 TVB의 권력핵심에 진입해 있었다. 40여년간 그녀는 소일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파트너였다.
소일부와 자녀들의 관계는 소원하다. 그와 원부인간에 태어난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셋째형인 소인매가 싱가포르에서 부양했다. 두 아들 소유명(邵維銘), 소유종(邵維鍾)은 원래 TVB의 동사국에 있었다. 그러나, 1981년 방일화가 들어오면서 점차 소씨자제들의 지위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원래 부친을 도와서 일하던 두 사람은 동사국에서 물러나고, 싱가포르로 가서 거주한다. 이후 부자간에는 20여년간 왕래가 없었다.
가족의 내부투쟁을 막기 위하여, 일찌가 1980년대에 소일부는 근 80세의 고령으로, TVB의 원매자를 찾기 시작한다. 시장에서는 TVB의 주인이 바뀐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소일부는 TVB의 지분뿐아니라, 그 산하의 부동산까지도 매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매입하려던 사람들도 보통인물들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장강실업의 주석 이가성, 신지(新地)의 곽씨형제, 전신영과의 주석 이택해, 신세계발전의 주석 정유동, 신화치업의 주석 황지상, 기사국제의 주석 주역경, 가리건설의 대주주 곽학년, ‘각왕(殼王)’ 진국강, 정칭홍(曾慶紅)의 동생인 증경준(曾慶準)이 준비한 재단등이 포함된다. 모두 TVB를 인수할 의향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최종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었다.
매각이 실패하자, 2008년 크리스마스전날, 소일부는 시장가격보다 64%높은 가격으로 쇼브라더스를 주식을 매입하여 상장폐지시키겠다고 제안하여 주식시장을 깜짝 놀라게 한다. 시장에서는 보편적으로 이렇게 추측했다. 상장폐지는 소일부가 사업을 분할하여 매각하기 편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고, TVB를 매각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라고. 2009년 2월 27일에, 소일부의 사유화방안은 통과되고, 쇼브라더스의 37년에 걸친 상장회사지위는 끝이 난다. 이렇게 하여 TVB를 매각하기 위한 준비는 모두 갖추어진다.
소일부에 있어서, 돈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TVB는 그의 일생의 심혈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팔 수 없었다. 비록 이번 매각에 아무런 설명도 붙어있지는 않지만, 외부에서는 소일부가 쇼브라더스를 매각한 자금은 아마 자선용도로 쓰게 될 것이라고 본다.
“한 기업가의 최고경지는 바로 자선가이다” 소일부는 현재 홍콩에서 가장 돈을 잘 쓰는 기업자선가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창업한 때부터 자선에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그는 심지어 ‘철공계(鐵公鷄, 쇠로 만든 수탉. 뽑아서 털하나 나오지 않는다는 뜻임)”로 불리기도 했다.
회사내부에서, 소일부는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TVB는 ‘배부르게 먹이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유명하다. 임연니(林燕妮)가 TVB에서 일할 때 급여는800홍콩달러였다. 대부분의 TVB소속 연예인들은 이름이 더렵혀질 리스크를 감수하고 대륙으로 가서 돈을 벌어오곤 한다. 옛날에 이한상(李翰祥)이 TVB를 떠난 것도 그에게 보너스를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소룡에 대한 1,2천홍콩달러의 제작비를 적게 주기 위하여, 소일부는 그를 억지로 가화영시로 독립한 추문회에게 떼밀었다.
소일부가 66세 되었을 때, 친구인 이적(李迪)이 이런 말을 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적수에게는 인자하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인자함을 베풀어야 한다. 이적의 말에 소일부는 돌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소일부는 자선기부행열에 동참한다.
소일부가 처음 기부한 것은 학교동사의 신분으로 50만홍콩달러를 홍콩의 소절공학(蘇浙公學)에 기부하여, 장서3만권의 신형도서관을 건립한 일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절공학은 교사를 확대하게 되는데, 소일부는 다시 100만홍콩달러를 내놓는다.
소일부는 대륙에 더더욱 기부를 많이 한다. 이는 그가 사업을 할 때 돈을 아끼던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의 부는 민중에서 왔다. 당연히 민중에게 돌려주어야 하다.” “대장부는 겸제(兼濟)하여야 한다. 혼자서 자기 몸만 깨끗하게 해서는 안된다.” 소일부가 대륙에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했을까? 대륙의 교육사업에 기부한 것만 하더라도, 1986년-2007년까지 21년간, 34억위안을 기부했고, 5229개 교육프로젝트에 혜택이 미쳤으며, 전국 31개 성,시,자치구에 미쳤다.
1999년 대만대지진때 1억대만달러를 내놓는다. 2008년, 5.12 문천대지진때는 1억홍콩달러를 내놓았다. 2009년 대만의 태풍피해때는 1억대만달러를 내놓는다.
여러가지 자선사업을 하였기 때문에 1990년대가 되어서 홍콩매체는 더 이상 더 이상 소일부의 기부에 대하여 긍정과 부정이 섞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일치하여 높은 평가를 하게 된다. 소일부를 홍콩부호의 도덕적 모범으로 추켜세우는 것이다.
TVB의 주인이 바뀐 후, 외부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소일부기금회’는 더욱 자금이 많아져서, 계속하여 자선, 공익사업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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