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경영망
홍콩마카오를 수십년간 질타한 '카지노왕' 스탠리 호는 가족내부의 재산분쟁으로 크게 마음을 상했다. 이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필연적이다. 한편으로는 욕심을 낼만큼 거액의 재산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부인과 자녀가 있다. 90세의 스탠리 호는 부귀영화와 제인지복(齊人之福)을 다 누렸지만, 마지막은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1921년 11월 25일, 스탠리 호는 홍콩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난다. 그의 증조부는 네덜란드 혈통의 영국유태인이다. 증조모는 광동 보안(현재의 심천) 사람리다. "호(何)'씨 성은 스스로 증조부의 이름에 들어있는 "H"에서 따온 것이다. 조부인 허푸(何福)은 청나라말기민국초기 홍콩의 중국계상인중 5대거두중 한 명이다. 그는 이화양행(怡和洋行, Jardine Matheson), 사선양행(沙宣洋行)등의 매판으로 있었고, 일찌기 홍콩정례국(입법국) 의원도 지낸다. 허푸의 형인 허동(何東)은 더 대단하다. 그는 당시 홍콩의 최고부자였고, 강유위, 손중산 및 장개석과도 밀접한 교분이 있었다. 가족의 지원하에, 스탠리 호의 부친인 허스광(何世光)도 유명한 부호가 되고, 사전양행(渣甸洋行)의 매판, 홍콩입법국의원 및 자선기구인 동화삼원의 주석을 지냈다.
어릴 때의 스탠리 호는 풍족한 생활을 지낸다. 당시에 이미 서양식 저택, 자가용에 익숙했고, 자연스럽게 부잣집 도련님의 스타일을 익혔다. 당시 부친은 그를 인재로 키우기 위해 홍콩의 유명한 황인서원(皇仁書院)으로 보내 공부하게 한다. 그러나 어려서 세상물정을 몰랐던 스탠리 호는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다른 부잣집 도령들과 마찬가지로 학업은 내팽개친다. 그리하여 학년에서 열등반인 D반에 편입된다.
이런 생활은 스탠리 호가 13살이 되던 해에 모두 끝난다. 그날 모친은 그를 방으로 부른 다음 울면서 그에게 얘기한다: "아구(阿九, 스탠리 호는 아홉째였다)야. 너에게 미안하구나. 네 아버지가 주식투자에 실패하여, 빚을 피해서 월남으로 도망갔다. 나는 지금 너를 공부시킬 돈이 없다. 너도 아마 나가서 일을 해야할 것같다..." 하룻밤만에 패가망신하고, 모친은 그와 몇몇 아이를 데리고 거의 길거리로 나앉았다.
가정의 급변은 스탠리 호로 하여금 염량세태를 느끼게 한다. 한번은 그가 이빨이 망가져서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이빨을 치료할 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 치과의사인 것을 생각해내곤, 그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그러나 친척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네가 돈이 없으면 이빨을 어떻게 치료하겠느냐. 그냥 뽑아버려라." 또 한번은 버스를 탔는데 주머니를 다 뒤져서 1센트를 찾았는데, 가짜돈이라는 말을 듣고 버스에서 강제로 하차당했다.
이런 고난은 스탠리 호를 성장시켰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금방 D반에서 1등을 하여 학교장학금을 받는다. 황인서원에서 D반의 학생이 장학금을 받은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홍콩대학 이과학원에 들어가고, 성적은 항상 앞자리였다.
1941년, 홍콩이 점령당한다. 스탠리 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10홍콩달러를 가지고 마카오로 건너간다. 거기서 연창무역회사에서 일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였으므로, 스탠리 호는 회사비서직을 맡았다. 그는 기억력이 아주 좋아서, 당시 마카오의 2000여개 전화번호를 모조리 외웠다. 게다가 그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금방 사장의 총애를 받아, 비서에서 회사파트너로 승진한다. 2년후 그는 회사에서 100만 마카오달러의 이익을 배당받는다. 이는 그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이다.
1945년, 스탠리 호는 마카오무역국 공응부 주임이 된다. 전 마카오특구 행정장관인 Edmund Ho Hau Wah(何厚鏵)의 부친인 Ho Yin(何賢)과 같이 일했다. 2년후, 그는 자신의 100만마카오달러의 이익금을 가지고 마카오화수(매유)공사를 설립한다. 나중에 다시 항생은행의 창업자인 하선형(何善衡)과 함께 대미양행(大美洋行)을 창업하여, 방직품사업을 벌였다. 1953년, 스탠리 호는 홍콩으로 가서 이안건축회사를 창업하여 부동산과 건축사업을 벌인다. 1950년대말, 그의 자산은 이미 1000만홍콩달러가 되었고, 홍콩의 거부반열에 들어간다.
마카오에서 도박업은 항상 흥성했다. 처음에 마카오의 도박업은 관리가 아주 혼란했다. 카지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괜찮은 곳과 아닌 곳이 뒤섞여 있었다. 1961년, 마카오의 포르투갈 당국은 법규를 반포하여, 도박을 '특수한 오락'으로 규정하고, 도박업은 독점사업으로 실시하겠다고 한다. 스탠리 호는 기회라고 여기고 다시 마카오로 돌아간다. 곽영동등과 함께 일거에 카지노 독점영업권을 따낸다. 이리하여 카지노왕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다음 해, 마카오여유오락유한공사(STDM)을 설립한다. 곽영동이 동사장을 맡고, 스탠리 호는 동사총경리를 맡는다. 1970년, STDM이 투자한 호텔 레스보아 마카오가 건립되고, 지금도 마카오를 여행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들르는 곳으로 된다.
비록 카지노왕이지만, 스탠리 호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대로라면, "내가 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해야 하는가?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레스보아에 와서 돈을 거는데...그게 바로 나와 승부를 겨루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실 매일 도박을 하는 것이다." 그는 카지노에 가려는 친구에게 이렇게 권한 적도 있다: "도박이라는 것은 항상 도박장이 이긴다. 도박하러 가지 않는게 좋다." 마카오의 최대 카지노주인의 자리에 40여년간 앉아 있더 스탠리 호는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의 산하에는 레스보아 뉴레스보아를 포함한 18개의 카지노가 있다. 매년 1300억홍콩달러가 판돈으로 걸린다. 이는 마카오 현지 총생산량의 6배이다. 매년 정부에 납부하는 도박세만 40억홍콩달러이다. 이는 마카오 총재정수입의 50%이상을 차지한다. 30%가량의 마카오인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그의 회사에 고용되거나 그의 회사로부터 수익을 얻고 있다.
도박업을 제외하고, 스탠리 호의 사업은 부동산, 건축, 선박, 투자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최근에 발표된 2011년 포브스 홍콩 40대부자명단에, 스탠리 호는 미화31억달러로 13위에 랭크되어 있다. 지금 그의 산하기업은 SJM(마카오박채지주), 홍콩신호국제집단, 홍콩신덕집단유한공사, 마카오국제공항운영회사, 마카오성흥은행등이 있다.
휘황한 그의 배후에 스탠리 호는 또 하나의 취미가 있다. 풍류이다. 이는 바로 최근 그가 집안재산분쟁에 휘말린 이유일 것이다. 마카오에 관광단으로 간 사람이라면 아마도 기억이 날 것이다. 도중에, 버스가 꼭대기에 수탉을 세워둔 빌라를 지날 때, 가이드가 이것이 바로 카지노왕인 스탠리 호의 마카오 저택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리고 그의 풍류사에 대하여 줄줄이 소개하는 것을 사람들은 들으면서 감탄을 하고, 여행을 피로를 잊곤 한다.
스탠리 호가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감탄한다. 정말 미남이다. 그렇다. 그는 일생동안 여복이 끊이지 않았다. 일찌기 한 외국의 미녀가 오랫동안 그를 좋아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은 수녀가 되었다고 한다. 스탠리 호는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그의 애인은 거의 10명에 가깝다고.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 정도 숫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애인들 중에서 진정 결과를 거둔 것은 단 4명이다. 여완화, 남경영, 진완진 그리고 양안기.
1940년대, 스탠리 호가 처음 마카오로 갔을 때, 현지출신의 여완화를 만난다. 여완화는 당시 마카오 제일미녀라 할 수 있다. 마카오의 유명한 변호사집안에서 태어났고, 두 사람은 연애한지 얼마되지 않아 결혼한다. 여완화는 스탠리 호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낳았다. 하초영, 하초현, 하유광(남), 하초웅(남). 스탠리 호와의 결혼 10주년때 여완화는 자동차사고를 당해서 1달이나 깨어나지 못한다. 그 후에 괴질에 걸려,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2004년에 여완화는 사망한다. 스탠리 호는 그녀를 위해 융중한 장례식을 치뤄주었다. 당시 마카오특구행정장관이든 에드문드 호등 저명인사들이 조문을 왔다.
여완화가 병석에 누운 기간동안, 스탠리 호는 상심하였지만, 새로운 반려를 찾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게 바로 둘째부인 남경영이다. 그후 수십년간 남경영은 시종 카지노왕의 곁을 지킨다. 사교활동이나 자선활동에 모두 참석한다. 자선댄스파티에서는 스탠리 호와 남경영이 가장 뒤어난 파트너였다. 댄싱킹과 댄싱퀸이었다. 남경영은 스탠리 호와의 사이에 1남4녀를 낳는다: 하초경, 하초봉, 하초하, 하초의, 하유룡(남)
여완화의 개인 간병인은 홍콩사람인 진완진이었다. 그는 나중에 스탠리 호의 애인이 된다. 1985년, 스탠리 호는 홍콩에서 진완진에게 집을 사준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를 셋째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둘째부인 남경영의 기세가 너무 세지니까, 큰부인 여완화가 그녀의 기세를 누르기 위하여, 자신이 믿는 진완진을 스탠리 호와 엮어주었다고 한다. 진완진은 스탠리 호와의 사이에 남녀쌍동이를 낳는다: 하초련, 하유계(남) 그리고 다시 딸 하나를 낳는다: 하초운
1986년, 스탠리 호는 한 댄스파티에서 자신보다 39살어린 광저우 아가씨(본적은 광동 삼수)인 양안기를 만난다. 그후 양안기는 스탠리 호의 고정적인 댄스파트너가 된다. 그리고 그의 카지노의 직원으로 채용된다. 그후 댄스스쿨을 열고, 자신이 선생이 된다. 1989년, 양안기는 정식으로 넷째부인이 된다. 양안기는 스탠리 호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낳는다: 하초영, 하유형(남), 하유군(남), 하유가(남), 하초흔
이 네 명의 부인에 대하여 스탠리 호는 전혀 감추지 않았고, 자주 자부심을 가지고 말했다: "나는 모든 부인을 똑같이 사랑한다." 여완화와 신혼때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둘째부인 남경영을 들인 후, 스탠리 호는 병석의 첫째부인에게 경제적 지원을 주고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 그후 몇명 부인은 모두 스탠리 호의 이런 희신염구(喜新厭舊)의 태도를 느끼게 된다.
스탠리 호는 항상 외부에 부인들간의 관계가 화목하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안다. 이런 '화목'은 '격리'를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큰 부인은 사망하기 전에 마카오 구저택에 살았고, 둘째 부인은 카나다에 정착했으며, 셋째부인과 넷째부인은 모두 콩콩에 장기거주한다. 서로 각자 거주하고 서로 만나지 않는다.
4명의 부인중에서, 젊은 넷째부인 양안기가 가장 능력있다. 카지노왕의 앞에서 그녀는 약한 여자이다. 그러나 사업에 있어서, 그녀는 강한 여인으로 변신한다. 그녀는 홍콩에 9동의 호화건물을 가지고 있다. 그 가치는 3.36억 홍콩달러이다. 그리고 마카오 레스보아 카지노내의 몇개 방을 불하받았다. 보수적으로 보아도 매월 순수입이 천만홍콩달러 이상이다. 넷째부인이 이렇게 강세이다보니 다른 부인들이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1999년, 원래 카나다에 조용히 살고 있던 남경영이 홍콩으로 날아와서, 재산문제를 놓고 양안기와 한바탕 싸운다. 그러나 전혀 이권을 얻지 못하고 쓸쓸히 카나다로 되돌아간다.
표면적으로 평화로웠던 4부인은 모두 자신만의 계산이 있다. 스탠리 호의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각 부인들은 거액의 유산에 대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계속하여 재산풍파가 일어나고 있다.
'중국의 지방 > 홍콩; 마카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일부(邵逸夫): TV제국이여 안녕! (0) | 2011.06.06 |
---|---|
홍콩원정출산의 산업사슬 (0) | 2011.04.08 |
마카오 카지노왕의 재산분쟁 (0) | 2011.02.18 |
마카오 카지노왕 스탠리 호의 자녀들 (0) | 2011.01.27 |
사서린(謝瑞麟, TSL): 홍콩 보석대왕 이야기 (0) | 2011.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