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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1960년 "5.9 광산폭발사고": 세계최대의 광산사고

by 중은우시 2009. 11. 22.

글: 장위(張)

 

대약진시대에 세계광산사고역사상 가장 비참한 석탄광산폭발사고가 최대의 석탄생산기지인 대동광무국(大同鑛務局)에서 발생한다. 이 사고고 677명이 사망하고, 구출되었던 228명중에서 다시 5명이 사망하여, 모두 682명이 사망했다. 지금까지 세계역사상 가장 비참한 광산사고였다.

 

1960년 5월 9일 13시 45분, 대지가 갑자기 흔들리고, 노백동광(老白洞鑛) 15호 광구에서 강렬한 화염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위력은 12급태풍에 못지 않았다. 곧 16호 광구에서도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바람은 타종공과 근차공까지도 넘어져서 중상을 입게 만들었다. 광구에 위치한 건물은 쓰러졌고, 지면배전소도 기능이 정지되었다; 광산의 모든 전원이 중단되고, 전화교환지시등도 함께 깜박인 후 모조리 전원이 끊어졌다. 이때는 마침 광산교차작업시간이었다. 작업을 마친 직공은 아직 광산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작업에 투입된 직공은 이미 광산으로 들어가 있었다. 두개반의 간부 노동자들이 모조리 광산내에 있었던 것이다. 905명의 노동자가 생사불명이 되었다.

 

폭발은 중남해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사고발생 당일, 모주석은 보고를 들었다. 그날 밤 11시경, 주은래 총리는 구조팀에게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사람을 구하라고 지시한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각 부대는 모두 1096명의 군인을 현장에 파견한다.

 

5월 17일까지, 모두 62회차의 비행기, 십여회차의 전용기차, 214대의 자동차가 대량의 구호물자를 운송했다.

 

30년이 지난 후, 사건발생당시 광당위 부서기를 맡고 있던 이계무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그는 단위서기 후고산과 서대항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돌연 날아온 연기에 목이 막혔다. 이계무는 일어나서 다시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전화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명도 모두 꺼졌따.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는 지붕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기어올라가서 밖으로 나갔다. 길은 갈수록 걷기가 어려웠고,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골목은 아주 혼란스러웠고, 어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떤 사람은 대성통곡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굴진단 당위서기인 두배당이 10여명의 사람을 이끌고 일터에서 달려나왔다. 그는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이서기. 빨리 밖으로 도망가!" 이계무는 급히 앞으로 나가서 그들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상황도 모르면서 아무데로나 뛰어다니면 더욱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듣지 않았다. 달려가면서 10여명의 광부들은 하나 하나 쓰러졌다...

 

어떡해야한단 말인가? 누군가는 계속 물러나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뚫고 나가자고 했다. 이계무는 상황이 불명확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었으므로 반드시 사람을 조직해야한다고 생각해서, 급히 임시당지부를 조직했다. 사람들도 호응했다. 이계무는 임시당지부서기가 된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분필로 담장이나 광차(鑛車)에 "안에 사람이 있으니, 빨리 구해달라"고 썼다. 그들이 구회풍항의 교차로까지 물러났을 때, 다시 몇 사람이 독연기에 쓰러졌다. 이계무도 점점 더 버티기 힘들어져서, 물구덩이 근처에서 쓰러졌다. 그는 힘을 다해 일어섰고, 사람들을 데리고 사굴진구항으로 데리고 갔다. 풍부한 광산경험으로 이계무는 모두 엎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안전등을 켜고, 광등은 껐다. 그리고 모두 바람막이로 밀폐하도록 하고는 구원을 기다렸다. 그들은 구호인원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5.9"석탄광산폭발사고가 일어난 1960년은 '좌경모험주의'의 광기가 풍미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생산계획이 점차 늘어나서, 아래를 압박했다. 당시, 대동광무국 노백동의 생산량은 152만톤까지 늘어났는데, 설계능력인 90만톤보다 52%나 늘어난 수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관적인 감정을 중시하고, 과학을 존중하지 않았다.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추진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골목내에 모여있던 석탄먼지가 모여서, 부족한 안전관념으로 인하여 사고의 위험이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는 것을

 

이런 상황하에서 사고가 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사람들은 사고가 나면 적을 찾아낸다는 일부 사람의 선동하에 적을 찾는 운동이 전개된다. 그들은 광산에 투입되었어야 하는데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 사고를 주관한 엔지니어, 통풍, 전기공급, 운수에 종사하는 기술인원이 모조리 여기에 끌려들어간다. 사고후에 고향으로 돌아간 광부들까지도 주요의심대상이 되었다.

 

비록 1961년 사고종결보고서에서: "반혁명자가 직접 점화했다는 단서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였지만, 사고처리후, 이로 인하여 비판받고 투쟁대상이 된 사람이 709명에 달했다. 간부 398명이 교체되고, '불순'인원 462명은 쫓겨났다. 이것도 또 다른 재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