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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 암살과 집권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장명(張鳴) 

 

1912년 1월 16일, 막 조회(朝會)에 참석했다가 동화문(東華門)으로 나오던 원세개는 암살공격을 당한다. 

암살계획에 참여한 북방혁명당(北方革命黨) 사람인 호악공(胡鄂公)의 회고에 따르면, 암살단은 모두 4조로 나뉘며, 2조는 폭탄투척, 1조는 저격, 1조는 지원을 맡았다. 조직이 엄정하고 일찌감치 원세개의 행동규율을 잘 알고 있어, 행동계획은 주도면밀했다. 그날 오전 11시 3각, 원세개의 마차행렬이 동화문으로 나왔다.  동화문대가를 지나 왕부정대가로 꺽어지는 곳에 이른다. 제1조가 삼의차엽점(三義茶葉店) 2층에서 폭탄을 하나 투척했는데, 마차를 부수지 못한다. 그후 제2조가 폭탄 2개를 투척하는데, "폭탄이 원세개의 차에 명중했고, 탄약이 폭발하여 마차가 전복되고, 원세개의 마차꾼 1명, 호위관대 원금표 1명, 호위 배장 1명, 친병 2명, 마순 2명, 행인 2명, 그리고 기병 마삼이 죽는다." 원세개는 호위무사의 도움하에 말을 타고 도망친다. 말 위에서 자객을 수색하여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호악공의 회고에 따르면, 자객들이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암살사건은 심홍(沈弘) 선생이 발굴해낸 당시 영국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약간 다르다. 자객은 확실히 3개의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1개는 불발이었다. 당시 캔정도 크기의 폭탄에 위력이 강력한 폭약이 장전되어 있었고, 개략 20명이 부상을 당하고 여러명이 죽을 정도였다. 그러나 원세개의 마차는 폭약에 명중되지 않는다. 마차꾼이 말에 채찍질을 하여 빨리 달려서 지나갔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이후에 회고하다보면,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래도 당시의 기록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원세개의 마차는 분명히 폭약에 명중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사고발생지의 차엽점의 창문의 유리는 모두 부서져 있었다. 이를 보면 폭탄의 위력이 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마차에 명중했다면, 당시 방탄설비도 없었으므로, 원세개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죽지는 않더라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심홍선생의 고증에 따르면,영국기자가 당시에 짝은 사진을 보면, 암살발생지는 삼의차엽점이 아니라, 삼순차엽관(三順茶葉館)이다. 그러나, 사진상의 "삼순자호(三順字號), 차엽노점(茶葉老店)"이라는 여덟글자를 보면, 차엽점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사고발생후, 10명이 체포되는데, 3명의 몸에 폭탄을 숨기고 있던 외에, 나머지 7명은 증거가 부족하여 석방된다. 이 세 명은 아주 신속하게 처결된다. 그 후, 원세개의 심복 당재례(唐在禮)에 따르면, 원세개는 이 후 상당한 장기간을 집에 숨어있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월 16일 이 날의 이른 아침에, 실제로는 원세개가 마침내 혁명당과 합의를 달성하여 정식으로 융유황태후에게 하야를 설득하기로 한다. 부의의 기억에 따르면, 그 날, 융유황태후는 남쪽창의 구들(炕)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땅바닥의 붉은 카페트위에는 뚱뚱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얼굴이 온통 눈물자국이었다. 군신이 함께 울고 있지만, 이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물러나라고 핍궁(逼宮)하는 것이다. 그리고 핍궁은 성공을 거군다. 원세개가 울면서 핍궁하는 연극이 끝나자마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혁명당인이 이처럼 악독한 수를 쓴 것은 무엇때문인가? 설마 그들은 원세개가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혁명을 완성하려 하지 않았단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손중산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명당은 비록 임시정부를 성립시켰고, 십여개성을 손에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입헌당(立憲黨) 사람이 많이 있어 원세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혁명당인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고, 혁명당인 내부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 동맹회의 3개 부분의 내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모순이 나타난다. 같은 편끼리 물어뜯었다. 마찬가질 죽기살기로 싸운다. 도성장(陶成章)이 피살된 것은 그 증거이다. 혁명당과 회당(會黨)간의 모순도 갈수록 명백해진다. 비록 북벌군이 적지 않게 조직되었지만,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많지 않았다. 무엇으로 북양군을 이길 것인가? 아무도 자신이 없었다. 남경임시정부의 경비도 독립 각성은 하나도 내지 않았다. 십여만의 북벌군이 집결한 남경은 질서가 혼란했고, 걸핏하면 군인들이 군비부족을 핑계로 약탈을 진행한다. 그래서 혁명당인들은 희망을 원세개에게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원세개가 반정(反正)에 동의하면 만사OK였다. 원세개를 죽이면 오히려 일은 골치아파진다. 보수적인 북양군이 만일 복수를 위하여 청나라정부편에 선다면, 혁명이 언제나 성공할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의 말로 하자면, 혁명군이 일어나면, 혁명당이 사라진다. 동맹회는 원래 느슨한 조직이었다. 혁명을 시작한 때로부터, 혁명당은 더더욱 접시위의 모래알이었다. 각자 따로 싸우고, 각자 따로 놀았다. 청왕조의 각지정권은 붕괴되었지만, 혁명당이 역량을 크게 가져서가 아니라, 청나라지방정부가 이미 스스로 썩었기 때문이다. 자의국(諮議局)의 사신(士紳)은 정부측에 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일부 지방에서는 혁명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무슨 내력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지방깡패, 토비들이 사람만 몇명 모으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남방 혁명당의 전과는 휘황했지만, 북방혁명당도 원래 희망이 컸다. 산서(山西)가 먼저 독립한다. 사관삼걸(士官三傑) 오록정(吳祿貞), 장소증(張紹曾), 남천울(藍天蔚)이 중병을 장악하고 있었다. 북경성내에도 혁명당인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원세개가 나서자, 혁명당은 연이어 실패한다. 삼걸중 한 명은 죽고, 한명은 이동하고, 한명은 떠난다. 이어서 장소증의 옛 부대가 난주의거를 일으키지만, 진압당한다. 산서를 얻었다가 다시 잃는다. 북방의 혁명당인은 원래 성공을 눈앞에 두었는데, 돌연 원세개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 분노를 어떻게 삼킬 것인가? 기실, 원세개를 암살하는 동시에, 북방혁명군은 방대한 계획이 있었다. 일단 암살이 성공하면, 그들은 주변의 일부 군대, 예를 들어 의군(毅軍), 심지어 일부 금위군의 역량까지 동원하여, 북경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그래서, 혁명당의 대두목이 원세개와 담판을 하고, 담판이 이루어졌고, 원세개의 장남인 원극정은 왕정위와 사이가 아주 친밀해졌지만, 모든 사람을 단속할 수는 없었다. 일부 북방혁명당인들은 비교적 말을 잘 들었고, 원세개에 잘 협력했지만, 다른 일부 사람들은 다른 마음을 먹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자기들 하고싶은대로 했다. 만일 정말로 원세개를 제거하고, 북경을 함락시켜서 큰 공을 하나 세우더라도, 당내권력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혁명당인의 암살은 원세개에게 아주 좋은 기회를 준다. 이전에 조야에서는 그가 혁명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팔아먹으려 한다고 했었다. 지금은 그가 혁명당으로부터 암살을 당하니, 명성이 조금 좋아제기 만든다. 그외에 융유를 핍박하여 정권을 내놓게 하는데도 유리했다. 어쨌든 자신이 나서서 핍궁하면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암살이 있지, 위험하다는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모든 하기싫은 일, 하기싫은 말은 모조리 조병균(趙秉均), 호유덕(胡惟德)에게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욱 편리했다. 이 두 사람은 전심전력을 다 한다. 협박도 하고 겁도 주고 속이기도 했다. 게다가 얼마후 혁명당인은 만주족중 유일하게 능력이 있던 신하 양필(良弼)을 암살한다. 청나라의 고아과부는 어쩔 수 없이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원세개는 본질적으로 무인이다. 일생동안 여러번 위험한 경우를 당한다. 매번 운명의 전기를 가져다 주었다.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때 그는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이로써 두각을 나타낸다. 1909년 조정에는 섭정왕 재풍이 원세개를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이 돈다. 그는 비밀리에 제6진에서 사사(死士)를 불러서 스스로를 호위하게 한다. 결국 관직은 잃었고 창덕으로 물러난다. 이번 암살은 위험이 가장 컸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세상 일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기 힘들다. 난세의 간웅 원세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