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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주덕(朱德)은 어떤 직위들을 맡았는가?

by 중은우시 2009. 11. 22.

글: 조건리(趙建利)

 

주덕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주요창시자의 하나이다. 중국혁명과 건설의 서로 다른 시기에 그는 홍군총사령(紅軍總司令), 팔로군총사령, 해방군총사령을 맡았다. 주총사령(朱總司令)은 인민대중들이 그를 친근하게 부르는 칭호였다. 이 칭호는 홍군시기부터 그의 혁명생애동안 계속되었다.

 

주덕이 홍군에서 총사령을 가장 처음 맡은 때는 1930년 8월이다. 당시 홍1군단(紅一軍團)과 홍3군단(紅三軍團)을 합하여 홍1방면군(紅一方面軍)을 만들었는데, 주덕이 총사령을 맡았다. 이는 인민군대내에서 처음으로 '총사령'이라는 직위가 시작된 것이다. 1933년 5월, 중국공농홍군총사령부(中國工農紅軍總司令部)가 설립되고, 주덕이 홍군총사령을 맡는다. 1936년 10월, 홍1, 홍2, 홍4의 3개 방면군이 성공적으로 회합한다. 12월, 중혁군위 주석단은 주덕을 '중국홍군총사령'에 임명한다. 1937년 7월 전면적인 항전이 발발하자 제2차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홍군은 국민혁명군제8로군(國民革命軍第八路軍)으로 개편되고, 주덕이 총지휘(總指揮)를 맡는다. 그후 팔로군은 국민혁명군제18집단군으로 변경되고, 주덕은 그 집단군총사령이 된다. 이렇게 하여 주덕은 팔로군총사령이 되고, 제18집단군총사령이 된다. 이 직위는 대일항전승리시까지 계속된다.

 

항일전쟁후기에 주덕은 "연안총부총사령(延安總部總司令)", "중국해방구항일군총사령"등의 명의를 사용하여, 인민군대로 하여금 투항을 접수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하고, 친일군의 투항을 명령하기도 했으며, 미영소등 국가에 중국공산당과 인민군대의 원칙적인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따. 항전승리후의 1년여 기간동안,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인민군대는 대외적으로 팔로군, 신사군(新四軍)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쓴다. 주덕도 팔로군총사령, 제18집단군총사령의 명의로 관련업무를 수행한다. 1946년 6월 내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하자, 인민군대는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라는 칭호를 쓴다. 팔로군, 신사군의 칭호는 점점 해방군으로 대체된다. 주덕도 점차 "인민해방군총사령"으로 불리게 된다. 1946년 11월 28일, 중공중앙은 주덕의 60세 축사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인민해방군총사령이라고 부른다. 12월 1일, 진기노예변구 <<인민일보>>는 중공진기노예중앙국, 변구정부, 변구참의회등의 명의로 주덕에게 축전을 보내는데, 축전에서는 주덕을 "인민해방군총사령"이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이때 주덕은 이미 인민해방군총사령으로 널리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명의로 대외업무를 수행했다.

 

1947년 2월 10일, 주덕은 인민해방군총사령의 명의로, 중공중앙군위주석 모택동과 공동으로 인민해방군섬감녕야전집단군을 조직하는 명령을 하달한다. 10월 10일, 그는 인민해방군총사령의 명의로 부총사령 팽덕회와 공동으로 <<중국인민해방군선언>>을 발표한다. 해방전쟁시기에 주덕이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을 맡았다는 것은 중앙문건이나 명령으로 정식확인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팔로군, 신사군이라는 칭호가 해방군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주덕의 직위와 칭호도 자연스럽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중앙인민정부 제1차회의는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으로 임명한다. 주덕은 자주 이 명의로 대외군사교류를 진행하고, 열병등 관련명령을 내렸다. 1954년 9월, 제1기 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통과시킨다. 국방지휘체계가 조정되는데,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이라는 지위가 없어진다. 주덕은 이때부터 다시는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를 "총사령"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칭호가 중국인민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