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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유태인은 언제 중국으로 들어왔는가?

by 중은우시 2011. 2. 6.

작자: 미상

 

유태인은 히브리인 또는 이스라엘인으로 불리며, 고대에 팔레스타인 일대에 거주했고, 이스라엘과 유대왕국을 건립한 바 있다. 나중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세계각지를 유랑하게 된다. 중국고대의 개봉(開封), 양주(揚州), 영파(寧波), 항주(杭州), 광주(廣州) 및 하문(廈門)등지에도 유태인의 족적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유태인은 언제 중국으로 온 것일까? 지금까지 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여 역사상 수수께끼의 하나로 되었다. 개괄해보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학설이 있다.

 

1. 주(周)나라때 중국으로 왔다는 설

 

고대에 중국에 들어와 사는 유태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유대교)를 "일사낙업교(一賜樂業敎)"라고 불렀다. "일사낙업(중국발음으로 이쓰러예)"는 히브리어의 이스라엘을 음역한 것이다. 개봉의 유태사(猶太寺)의 안에는 명,청시대에 건립한 3개의 석비가 있다. 하나는 홍치비(弘治碑)로, 명나라 홍치2년(1489년)에 건립하였다. 비석의 명칭은 <<중건청진사기(重建淸眞寺記)>>이다. 개봉부의 생원인 김종(金鍾)이 글을 썼고, 내용은 유태교의 원류, 교의, 교구등을 기록하고, 개봉 유태교사의 연혁을 기록했다. 둘째는 정덕비(正德碑)로서, 명나라 정덕7년(1512년)에 세운 것이며, 명칭은 <<존숭도경사비(尊崇道經寺碑)>>이다. 사천포정사 우참의 좌당(左唐)이 글을 썼는데, 주로 그 경의(經義)가 유가의 설과 같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셋째는 강희비(康熙碑)인데, 청나라 강희2년(1663년)에 건립하였고, 명칭은 <<중건청진사기>>이다. 광록대부 공부상서 유창(劉昌)이 글을 썼고, 그 안에는 교의 원류, 역사, 교의 및 사찰의 연혁과 규모를 기록했다. 이 세 개의 석비는 개봉의 유태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이다. 강희비문에 따르면, "교는 천축에서 기원했고, 주나라때 중주(中州, 중국)을 전해졌다. 사당을 대량(大梁)에 건립했다, 한, 당, 송, 명이래로 숫자는 변경이 있었지만, 교도들은 미치(靡致)를 모셨다." 이렇게 보자면, 일찌기 주나라(기원전112-249년)에 유태인은 이미 중국의 하남일대로 왔고, 개봉에 교당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설에 대하여 중국에서 유태교를 가장 일찍 연구한 학자 진원(陳垣)은 <<개봉일사낙업교>>라는 글에서, 이 비석의 작자는 일사낙업교의 신도도 아니고, 비문에는 오류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주나라때 중주로 전래되었다"라든 것은 홍치비에 두번 언급된 "고증해보면 주나라때이다(考之在周朝)" 및 정덕비의 "조사해보면 주나라때이다(稽之周朝)"라는 글을 옮겨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유태민족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쫓겨나기 전에, 멀리 중국에까지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강문한(江文漢)은 <<중국고대기독교 및 개봉의 유태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많은 사실은 중국의 유태인들이 아주 일찌감치 중국에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개봉의 유태인들은 '유태인'이라는 칭호를 몰랐다. 기독교에 대하여도 들어본 적이 없다. 17세기 마테오 리치가 개봉의 유태인 애전(艾田)을 만났을 때, 애전은 스스로 '일사낙업'이라고 하였고,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개봉의 몇몇 유태교비의 비문에서도 '유태인'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유태인"이라는 단어는 기원전6세기이후에 비로소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마도 17세기에 마테오 리치등이 중국으로 건너온 후에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개봉의 유태인들이 '유태인'이라는 단어를 모른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기원전수세기에 본토를 떠나 동쪽으로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 후에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개봉유태인은 <<모세오경(摩西五經)>>만을 성서로 인정한다. <<구약>>의 다른 성서는 그들이 소수의 일부분만 가지고 있을 뿐, 불완전하다. <<모세오경>>은 비교적 일찍 책으로 만들어졌다. 개략 기원전 9세기 내지 4세기때 점차 완성된다. 그러나, <<구약>>의 다른 책들은 비교적 늦게 만들어졌다. 개봉의 유태인들이 <<구약>>의 앞부분 5권만을 받들고, 이 5권은 완전무결하고, 나머지 책 예를 들어 <<선상서(先翔書)>>는 있기는 하나 불완전하다. <<성록(聖錄)>>은 거의 없다. 이는 그들이 중국에 들어올 때 <<구약>>이 아직 완전히 완성되기 전이라는 것이다. 개봉유대인들은 한때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천축교(天竺敎)"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상이 인도에서 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원전6세기에 인도서북부에는 이미 유태인의 경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봉유태인들은 "교경교(敎經敎)"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교경교"는 바로 <<모세오경>>의 교인이라는 뜻이다. 개봉유태인들은 "유태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중국에 들어온 것이 기원전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원전 어느세기인지에 대하여 강문한은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만일 기원전3세기이전이라면 주나라에 해당한다.

 

2. 한(漢)나라때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설

 

정덕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원교(原敎)는 한나라때부터 중국으로 들어와 거주했다" 이 설에 대하여 진원은 "한나라대 이미 유태인이 중국에 도착한 적이 있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개봉유대족들이 한나라때부터 이어내려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서방의 적지 않은 학자들도 유태인이 중국에 들어온 것이 한나라때로 보고 있다. 이는 실크로드와 관련있다. 유태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인이므로,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한나라때의 중국에 들어오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학자 황의(黃義)는 <<중국유태인고>>에서 유태인은 동한 광무제 건무10년(기원34년)에 바빌로니아에서 유태인대학살이 있을 때 중국으로 도망쳐왔다고 본다; 낙보록(駱保祿) 신부는 동한 명제 영평16년(73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중국으로 왔다고 본다. 1926년 프랑스인 Prevost는 그가 낙양에서 발견한 3개의 히브리어 비석조각의 탁본사진과 그가 쓴 번역문과 주석을 발표한다. 그는 이 비석은 동한시대에 속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고, 동한시기의 낙양에 이미 적지 않은 유태인이 살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3. 당(唐)나라때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설

 

아랍 작가 압자이드가 쓴 <<동유기(東遊記)>>에 따르면, 당희종 건부5년(878년) 황소의 난에 광주를 포위공격할 때, 12만의 회교도, 유태인, 조로아스터교도, 경교(크리스크교)를 믿는 신자들이 살해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당나라때 유태인이 중국에 왔을 뿐아니라 그 숫자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0세기초, 영국과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고대문화재를 찾을 때, 신강에서 2건의 히브리어문서의 일부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중 하나는 스타인이 우이리크에서 발견한 페르시아상업서신이고, 감정에 따르면 708년에 작성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Paul Pelliot가 1908년 돈황석굴에서 발견한 기도문이다. 역시 9세기의 문헌이다. 이 두 건의 문물은 당나라때 유태인이 신강북로를 통하여 중국으로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4. 송(宋)나라때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설

 

홍치비의 비문에 따르면, "...천축에서 나왔으며, 명을 받아 왔다.....서양포를 송나라에 공물로 바쳤다. 황제가 말하기를 '우리 중하에 귀의하여 조상의 풍속을 지키고, 변량에 남아서 머물라' 하였다. 송효종 융흥원년(1163년) 계미 열휘오은달(페르시아어로 사부 혹은 교주라는 의미) 엄도랄(페르시아어, 건물을 짓는 직책)이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이에 따ㅡ면, 유태인은 송나라때 개봉으로 온 것이다. 송나라의 수도는 개봉이었고, 당시 개봉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문화 및 상업도시였다. 인구는 약 100만명이었다. 당시 유럽의 그 어느 도시보다 컸다. 유태인들이 서양포를 공물로 바치고 통상을 희망했고, 송나라황제는 환영하며 변량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모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개봉에 정착했고, 유태교교당을 짓는다. 이 설이 비교적 유행하여, 1979년판 <<사해>>의 '유태인'조에는 "십이세기 초엽, 인도 봄베이에 머물던 유태인중 소수가 중국개봉등지로 이주했다. 속칭 '남모회회(藍帽回回)'라고 불렀다."

 

중국사서에 유태인에 대하여 기록된 것은 원나라때부터이므로, 자료가 원래 많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개봉유태교의 세 개의 석비는 유태인이 중국으로 온 시기에 대하여 서로 모순되게 기록하고 있다. 강희비는 주나라때 왔다고 적었고, 정덕비는 한나라초기에 왔다고 적었으며, 홍치비는 송나라때 왔다고 적었다. 국내외학자들의 비문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다르다. 그리하여 유태인에 언제 중국에 왔는지는 아직도 추가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유태인이 몇 차례에 나누어 왔는지. 어느 길로 왔는지, 중국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중국에 온 후에 동화되었는지, 소멸되었는지? 이런 문제들은 아직도 더욱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만일 이들 문제를 확실히 할 수 있다면 동서문화, 교류과 중국종교사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