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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패왕별희(覇王別姬):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허위보도

by 중은우시 2011. 4. 27.

 

 

작자: 미상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 추불서혜가내하(騅不逝兮可奈何), 우혜우혜내약하(虞兮虞兮奈若何)”

 

태사공 사마천의 붓끝에서 전해진 이 2000년간 전해져 내려온 <<해하가>>패왕별희의 처연한 이야기와 함께, 중국문화에서 서초패왕 항우의 비극적 영웅의 이미지를 굳건하게 만들어놓았다.

 

패왕별희같이 남녀노소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사마천처럼 고금에 유명한 사학계의 거장의 말에 따른 비극적 이미지가 완전히 거짓말이라면, 이 이야기가 철두철미한 허위보도라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하고 황당해 할 것이다. 폭발력을 지닌 죽간, 백서라도 나와야 비로소 이런 경천동지할 주장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슨 새로운 사료가 나온 것은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행간의 뜻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자세히 읽어본다면, 우리는 사실의 진상을 복원해볼 수 있다.

 

<<사기.항우본기>>에는 패왕별희와 관련된 4가지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사면초가이다. “항우의 군이 해하에 있을 때, 병력은 적고 식량을 떨어졌다. 한나라군대와 제후의 병력이 몇 겹으로 둘러싸서 포위했다. 밤에 한나라군대가 사방에서 초나라노래를 부른다. 항우는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한나라가 모두 이미 초를 얻었단 말인가? 왜 초나라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둘째는 패왕별희이다. “항우는 밤에 일어나서, 장막안에서 마셨다. 미인이 있는데 우라고 했고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준마가 있는데 이름이 추이고, 항상 그말을 탔다. 그리하여 항왕은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시를 지어 불렀다: ‘역발산혜기개세, 시불리혜추불서, 추불서혜가내하, 우혜우혜내약하; 노래를 몇번 부르고 우미인이 그에 화답했다. 항왕은 눈물을 몇줄기 흘렸고, 좌우의 병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지 못하였다.”

 

셋째는 항우돌위(項羽突圍, 항우의 포위망돌파)’이다. “그리고 항왕은 말을 타고, 휘하장사들중 말을 타고 쫓는 자가 팔백여인이었다. 밤에 바로 남쪽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달렸다.날이 밝자, 한나라군대가 깨닫고, 기병장수 관영이 오천의 기병을 데리고 추격했다…”

 

넷째는 오강자문(烏江自刎)이다: “그리하여 항왕은 동으로 오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오강정장이 배를 가지고 기다리며 항왕에게 말하기를, ‘강동이 비록 작으나, 지방이 천리이고, 사람이 수십만이다. 왕이 되기에 충분하다. 대왕께서 급히 강을 건너기를 바란다. 지금 신이 홀로 배를 가지고 있으니, 한나라군대가 도착해도 건널 수 없을 것이다.’ 항왕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가 어찌 건너겠는가, 그리고 ()적은 강동자제 8천을 데리고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왔는데, 이제 한 명도 돌아가지 못하니,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가련하게 여겨서 왕으로 삼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그들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적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이들 사료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패왕별희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우희가 자살했다는 세부적인 사항을 제외하고는, 패왕별희의 이야기는 바로 이들 사료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한가지 상황을 사마천은 성공적으로 감추었다. 동시에 후세인들도 2000여년간을 보지 못해왔었다.

 

첫째 장면과 둘째 장면에서, 항우가 해하에 있을 때 초나라군대는 비록 병력이 적었으나이는 한나라의 많은 병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기. 고조본기>>에는 해하지전때, 항우의 병사가 10만이 된다고 적고 있다. 비록 이전에 한나라군대와 생사의 전투를 벌여서 많은 손실이 있었지만, 포위될 때까지, 한나라군대는 초나라군대에 대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해하의 군영을 수비하는 초나라군사는 최소한 수만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나라군대가 초나라노래를 부를 필요도 없이, 대군을 이끌고 일거에 항우의 군대를 섬멸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항우가 800의 기병을 이끌고 도망친 것을 안 후에도 한나라군대는 겨우 5천의 기병을 보내어 쫓았다. 만일 해하의 본영에 많은 초나라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지 않았다면, 이처럼 항우를 쫓는 인원을 적게 하지 않고, 5,6십만의 대군으로 하여금 군영에서 쉬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셋째장면과 넷째작면에서 항우는 밤에 포위망의 남쪽을 뚫고 도망쳤을 때곁에는 겨우 장사기병 팔백여인이 남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해하의 초나라군사 수만명은 어디로 갔을까? 한가지 해석밖에 남지 않는다. 그들은 항우가 포기한 것이다. 사마천은 항우와 수백의 심복들이 포위망을 뚫는 장면을 참장예기(斬將刈旗)” “한군개피미..인마구경(漢軍皆披靡, 人馬俱驚)’이라고 장렬하게 그리고 있을 때 총사령관에 의하여 포기된 수만의 초나라군대의 처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사기. 고조본기>에서 전체 해하전투에서 한나라군대가 팔만을 참수했다고 적었을 뿐이다. 초나라군대가 모두 10만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본적으로 전멸했다고 할 수 있다. 요행히 도망치거나 포로가 된 수천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통상적인 경우, 아주 높은 전투의지가 있지 않았다면, 총사령관이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수배 수십배나 많은 적에게 포위당한 상황하에서 패전측의 인원에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에는 부대가 붕괴하면 투항하여 포로가 되었었다. 해하전투에서 10만의 초나라군대는 8만이 사망한다.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유방은 이전에 항우가 20만의 포로를 죽여버린 것을 공격해왔고, 이를 통하여 정치적인 우위를 점한 것이므로, 그 자신이 포로를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초나라군대는 끝까지 완강하게 전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웅적인 초나라군대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겁쟁이의 모습을 보인 항우이다. 해하군영에서 항우는 아직 절망할 지경이 아니었다. 그의 수하에는 아직도 수만의 정예부대가 있었다. 강동에도 광활한 대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라군대의 포위는 그다지 엄밀하지 않았다(그렇지 않았다면 날이 밝아서야 항우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었고, 권토중래를 노릴 수도 있었다. 일찍이 영웅무적의 항우가 왜 해하에서는 이처럼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을까? 사료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측하자면, 항우는 일생동안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비록 초나라군대가 다른 전투에서 몇번 패전을 겪었지만, 항우는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패전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좌절의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하에서 그는 평생 처음으로 패전을 하고 포위를 당한다. 이것은 그에게 크나큰 정신적 압력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면초가와 우희와의 이별은 그에게 대경통곡을 하면서 아마도 항우가 정신적으로 붕괴된 것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군의 총사령관이 절대로 부하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하가>>는 그의 절망적인 내심을 잘 보여준다.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던 서초패왕은 마침내 이성과 용기를 모두 잃은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 항우는 최종적으로 강동으로 건너가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는 항우가 자신의 비열한 행위에 대하여 회한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말한 강동부형을 만날 면목이 없다는 것은 사실, 자신이 부하를 버리고 도망친 행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분석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패왕별희의 진상은 이미 분명해졌다고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항우가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하에서, 한나라군대의 심리전하에서, 정신이 붕괴되어 부하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오강에서 자신의 잘못을 죽음으로 속죄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태사공의 붓끝에서는 그중 일부 장면(별희, 돌위, 자문)만 부각시키고, 전체적인 사항(부하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내용, 나머지 초나라군대의 운명등)은 감추는 식으로, 추악한 이야기를 장엄한 영웅의 서사시로 변모시켜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사마천이 이렇게 쓴 것에는 그 자신의 이유가 있다. 사학계의 많은 사람들은 사마천이 한무제로부터 궁형을 받았으므로, 사기에서 일부러 항우를 끌어올리고, 유방을 끌어내렸다고 보고 있다. 패왕별희의 일막은 바로 이런 이유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태사공(사마천)의 개인적인 은원이 개입되어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허위보도가 이루어지고, 겁쟁이는 영웅으로 미화되고, 진정한 영웅은 잊혀지게 되었다.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어간 8만의 초군장병들이 지하에서 이 일을 안다면 얼마나 비분강개할 것인가?

 

만일 사마천의 패왕별희에 관한 보도는 그저 사실을 왜곡시키고, 2000년동안 중국인의 동정과 눈물을 속여서 얻어낸 것에 불과하여, 현실적인 손해는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매체의 허위보도는 다르다. 사마천과 유사한 성격의 매체보도는 부분을 부각시킴으로써(예를 들어 재난구조의 영웅적 행위, 각급지도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다든지, 이재민들이 어떻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지 등등), 전체를 무시하는 것(에를 들어, 재난이 왜 일어났는지, 천재의 요소외에 인재의 요소는 있는지여부, 어떤 사람이 재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지, 재난구호과정에서 어떤 개선할 사항이 있는지, 어떻게 유사한 재난을 회피할 수 있는지 등등)을 통하여 사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현실사회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이런 보도는 사람의 시선을 옮김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속에서도 제대로 교훈을 얻어 새로운 재난을 회피하거나 경감시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마찬가지의 문제로 다음번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이들 매체는 다시 똑 같은 짓을 저지른다. 원래 잃지 않아도 되는 생명이 구천지하에서 울게 되는 것이다. 만일 신문매체에서 심지어 의사결정자의 눈에서 이런 보도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진보할 것이고, 우리는 지식을 늘여가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면서 계속 성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