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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대택향(大澤鄕):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

by 중은우시 2008. 11. 23.

글: 전기황(田基黃)

 

기원전 210년 7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던 흑색용포를 업은 진시황이 죽고, 진이세 호해가 즉위한다.

 

기원전 209년, 진이세 호해는 소규모의 예비군을 1천킬로미터 떨어진 북강중진 어양군(현재의 북경 밀운)으로 보내어 기존 부대를 교체하도록 한다. 부대는 기군()(현재의 안휘성 남기현)의 대택향에 이르러, 장마비를 만나서 더 이상 나가기 힘들게 된다. 길은 끊겼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기한내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진나라의 군법은 엄하기 때문에 기한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엄중한 처분을 받아야 했다. 대장인 진승과 부대장인 오광은 리스크를 안고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지방정부를 공격해서 무기를 빼앗고, 정부의 재물을 차지한다. 그 영향력은 아주 커서, 하나의 중요한 선도적인 역할을 하여, 이후의 진나라에 대한 반란을 불러을으킨다. 일시에 중국각지에 한무리 또 한무리의 망명객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대동란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대동란은 대분열로 이어진다. 시세를 아는 자가 영웅이라고 춘추시대때 진시황에 의하여 멸망당한 6국은 십이년이나 흘렀지만, 각자 자신의 왕국의 후예를 찾아서 이 기회에 국왕으로 옹립하거나 스스로 국왕이 된다. 순식간에 13명의 국왕이 나타난다. 이는 원래 진나라가 멸망시킨 6국이 진나라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된다.

 

1. 진구(하남성 회양)에서 진승이 스스로 장초왕(張楚王)에 오른다.

2. 동성(안휘성 정원)에서 양강(襄疆)이 스스로 초왕(楚王)에 오른다.

3. 적현(산동성 고청)에서 전담(田儋)이 스스로 제왕(齊王)에 오른다.

4. 한단(하북성 한단)에서 무신(武臣)이 스스로 조왕(趙王)에 오른다.

5. 계현(북경)에서 한광(韓廣)이 스스로 연왕(燕王)에 오른다.

6. 임제(하남성 봉구)에서 위구(魏咎)가 스스로 위왕(魏王)에 오른다.

7. 신도(하북성 형대)에서 조헐(趙歇)이 스스로 조왕(趙王)에 오른다.

8. 유현(강소 패현 동남)에서 경구(景駒)가 스스로 장초왕(張楚王)에 오른다.

9. 우태(강소 우태)에서 항우가 웅심(熊心)을 초회왕(楚懷王)으로 올린다.

10. 영천(하남 우주)에서 한성(韓成)이 스스로 한왕(韓王)에 오른다.

11. 임제(산동성 고청)에서 전가(田假)가 스스로 제왕(齊王)에 오른다.

12. 임치(산동성 임치)에서 전불(田市)이 스스로 제왕(齊王)에 오른다.

13. 평양(하남성 활현)에서 위표(魏彪)가 스스로 위왕(魏王)에 오른다.

 

이 열세명의 왕중에서 초회왕 웅심은 조부가 초나라국왕인 웅괴(熊槐)이다. 초나라의 대장인 항연의 손자인 항우가 고향인 회계(강소성 소주)에서 지방관리를 죽이고 의거를 일으킨다. 양치기의 무리에서 이 양치기로 전락한 웅심을 찾는다. 항우는 그를 초회왕으로 모신다. 그가 초나라국왕의 후예라는 명성을 이용하여 초나라의 유민을 끌어모아서 그의 반진세력을 확장시키는데 사용한다. 여러 장수들을 그의 휘하로 끌어들이면서 진나라의 수도인 섬서성 함양으로 향한다.

 

강소성 패현의 한 작은 무리의 두목인 유방은 예전의 6국의 왕족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고, 조그만큼의 친소관계도 없다. 자연히 스스로 왕을 칭하기 어려왔다. 그는 항우와 같은 강소인으로 고향의 사람들을 바탕아고, 수천의 무리를 끌어모은다. 강소 우태로 가서 초회왕 웅심에게 의탁한다. 초회왕 웅심은 '먼저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면 그를 진나라의 국왕으로 삼겠다'고 선포한다.

 

유방은 기원전 250년에 패군 풍읍 중양리의 한 중산가성에서 태어난다.(현재의 강소성 풍현) 어려서 약간의 책을 읽었지만, 성격이 활달하고 거칠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다. 청년때, 진시황은 이미 전국을 통일하였고, 유방은 시험을 통하여 진나라의 사수정장(泗水亭長)이 된다. 이때 그는 주색에 빠져 있었고, 소하, 조참, 번쾌등과 방파를 결성한다. 유방은 생활에 절제를 잃었지만, 그의 꿈은 컸다. 그는 자주 사수에서 사람을 함양으로 호송했다. 한번은 진시황이 나들이하는 것을 보고 진시황이 위풍당당하게 호위를 받으며 가마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감탄하여 말했다: "아, 대장부라는 당연히 저러해야 하는데.."

진시황말기에 진시황은 여산묘를 건축하느라고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정장인 유방으로 하여금 죄수를 여산으로 호송하도록 명한다. 호송하는 길에 죄수들은 죽을 길을 가는 것을 알고 속속 도망치기 시작한다. 풍읍의 서쪽에 있는 대택리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는데, 유방은 이미 절반의 죄수가 도망친 것을 알았다. 그는 함양에 가서 보고하면 큰 벌을 받을 터였다. 유방은 술을 마시고, 술기운을 빌어 죄수들을 묶은 포승을 풀어부면서,"너희들은 모두 도망쳐서 목숨이나 구해라. 나는 더는 못하겠다. 나도 도망가서 목숨이나 구하겠다." 당시 십여명의 죄수는 떠나지 않고, 유방을 따르기로 한다. 유방은 이들 죄수를 데리고 밤새 대택에서 도망친다. 망탕으로 가서 숨어버린다.

 

이때, 진승, 오광이 대택향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각지의 백성들이 속속 가담한다. 백성들은 패현의 현령을 죽이고, 유방의 무리들인 소하, 조참, 번쾌등은 이미 일백여명을 거느린 유방을 찾아서 패현으로 모시고 온다. 백성들은 유방을 우두머리로 모신다. 유방은 미신을 이용하여, 자신이 적룡의 아들이라고 선전한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나라에 대한 의거를 일으키는데 참가하도록 한다. 이리하여 3천여명을 끌어모아서, 군대를 결성한다. 반란의 기치를 내걸고 소하, 조참, 번쾌등은 각각 길을 나누어 병사들과 말을 모집한다. 패중의 자제들이 속속 참가하여, 무리는 8천여명으로 늘어난다. 이때 유방은 이미 48세때였다. 유방은 이 8천여명을 이끌고 항량에게 의탁한다. 항량은 유방에게 5천의 병사를 내주어, 유방은 1만3천을 거느리게 된다. 그리고 이 1만3천을 이용하여 천하를 얻기위한 길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