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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진진지호(秦晋之好) 배후의 음모와 전쟁

by 중은우시 2011. 1. 18.

 

 

: 월초(越楚)

 

기원전676년 진무공(晋武公)의 아들 희궤제(姬詭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바로 진헌공(晋獻公)이다.

 

진헌공의 부친 진무공은 말년에 제환공(齊桓公)의 딸인 제강(齊姜)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한창 젊은 나이였던 제강은 태자인 희궤제와 사통하게 된다. 희궤제가 즉위하자, 그는 아예 서모인 제강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딸 백희(伯姬)와 아들 신생(申生)을 낳는다. 그중 딸 백희가 바로 진진(秦晋)의 정략결혼하에서 진목공(秦穆公)에게 시집가서 그 부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진진지호의 시작이다.

 

그후 20년간 다시 두 번의 진진지호가 발생한다. 본문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세 번의 진진지호의 배후에 있는 음모와 전쟁이다.

 

진헌공은 다시 융인(戎人)의 두 여자를 부인으로 취하여, 각각 아들 중이(重耳), 이오(夷吾)를 낳았다. 중이, 이오, 신생의 삼형제중에서 신생이 가장 어렸지만, 신생은 제강의 소생이므로 태자가 된다.

 

진헌공5(기원전671), 여융(驪戎)의 군주는 진헌공에게 여희(麗姬), 소희(少姬) 자매를 바친다. 그중 여희는 미모가 뛰어나서, 진헌공의 총애를 받는다. 여희는 아들 해제(奚齊)를 낳는다. 진헌공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희를 부인으로 삼는다. 그후에 발생한 여희의 난에서 태자 신생은 핍박을 받아 자살하고, 중이, 이오는 이구타향을 유랑하게 되며, 해제가 새로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기원전651, 진헌공이 사망한다. ()나라 대신 순식(荀息)은 유명을 받들어 해제를 새로운 왕으로 모신다. 진나라의 중신인 이극(里克), 비정(邳鄭)은 여희의 권력농단에 불만을 품고, 공자 중이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몰래 무사를 매수하여 어린 군주 해제를 진헌공의 영당에서 암살해버린다.

 

여히는 어쩔 수 없이 여동생 소희가 낳은 탁자(卓子)를 왕위에 앉힌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궁중정변이 일어나서, 이극, 비정등은 궁중에서 나이 겨우 9살인 탁자를 죽여버리고, 순식, 여희 등을 주살한다. 이극은 정권을 장악한 후, 즉시 사람을 보내어 외국에서 유랑중인 공자중이를 귀국시킨다.

 

중이는 국내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귀국해서 왕위에 올라야할지 말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공자 이오는 양()나라에 도망쳐서 양백(梁伯)의 장녀과 결혼하여 아들 희어(姬圉)를 낳았다. 이오는 진헌공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과 이극이 해제, 탁자등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게다가 중이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소식까지 듣고는 속으로 혼자 기뻐하고 있었다.

 

이오는 한편으로 이극에게 국상(國相)의 자리와 백만무()의 봉지를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목공에게 병사를 보내어 자신이 귀국하여 왕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그리고 왕위승계에 성공하면 하서(河西) 5개 성을 진()나라에 떼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진목공은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5개의 성이 아니었고, 이오는 덕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오는 반드시 혼군이 될 것이며, 이는 진나라가 동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목공은 이오의 구원요청을 받고는 즉시 대장 공손지(公孫枝)가 삼백량의 전차를 이끌고 이오를 진나라까지 호송했다.

 

기원전650, 이오는 원하던대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진혜공(晋惠公)이다. 이오가 즉위한 후, 진나라수도에 잠시 머물고 있던 공손지는 하서오성을 떼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오는 말을 바꾸어 성을 내주지 않으려 한다. 그후에 참언을 듣고는 대신 이극을 자살하게 하는데 죄명은 살군난정(殺君亂政)’이었다. 동시에 진()나라나 공자 중이와 가까운 대신들 예를 들어 비정, 칠여대부(七輿大夫)등을 주살한다.

 

진목공은 아주 화가나서, 기회를 보아 복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이 진혜공은 시운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즉위후 진나라는 연속 몇 년간 가뭄과 충재(蟲災)를 겪어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한다. 기원전647, 다시한번 큰 가뭄이 오고, 나라안의 논밭은 거의 곡식 한톨도 거두지 못하게 된다. 백성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고, 국고든 텅비게 되며, 병사들은 굶주려서 원성이 온 나라에 가득하게 된다.

 

이오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부 경정(慶鄭)을 진()나라로 보내어 곡식을 팔아달라고 애걸한다.

 

이오가 이전에 배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목공은 아주 통크게 진나라에 양식을 팔아서 기근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진목공과 그의 참모들의 생각은 아주 뚜렷했다: 양식으로 진()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인심이 진()나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번 국제원조를 성대하게 하기 위하여, 진목공은 조서를 내려, 차량, 마필, 선박을 징집해서, 양식을 가득 싣고 진나라 수도까지 호송한다. 당시에 진()나라의 양식운반선단은 진()나라의 수도인 옹도(雍都)에서 진()나라의 수도인 강도(絳都)까지 물길을 가득채우고, 수백리나 이어졌다. ()나라의 백성들은 진목공이 양식을 보내준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감격해 마지 않는다.

 

이번 국제재난구조활동을 역사에서는 범주지역(泛舟之役)”이라고 부른다.

 

세상 일이란 알 수가 없다. 돌고도는 세상 일이다. 다음해 진()나라의 위하(渭河)유역에 보기드문 대가뭄이 닥치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돈다. 그러나, ()나라는 날씨가 좋아서 대풍년을 이뤘다.

 

진목공은 사신 냉지(冷至)를 진()나라로 보내어 양식을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오는 진()나라의 재난에 오히려 즐거워하며, 진나라에 양식을 파는 것을 거부한다. 이오의 총신인 여이생(呂飴甥), 극예(隙芮)등은 도전적인 말까지 던진다: “()나라의 양식을 먹고 싶으면 진()나라 병사들이 와서 빼앗아가야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배은망덕한 행위를 한 이오에 대하여 진목공은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재상 백리해(百里奚)로 하여금 삼군병마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나라군대는 비록 병마는 적었지만, 모두 격분해 있어서, 투지가 높았다. ()나라는 배은망덕하여 복수를 당한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군심이 흩어졌다. 3차의 전투를 거치는 동안 진()나라는 연전연패한다.

 

기원전645년 가을, 두 나라는 한원(韓原)에서 결전을 벌인다. 이오의 소사마(小駟馬)’가 진흙탕에 빠졌고, 마침 지나가던 진()나라 장군 경정(慶鄭)에게 구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경정은 이 덕없는 군주를 구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채찍을 쳐서 말을 몰아 이오를 버리고 가버린다. 이 결전은 진()나라군대의 패배로 끝나고, 이오와 가솔들은 진()나라에 포로로 잡힌다.

 

진목공은 원래 이오라는 소인을 죽여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대장 공손지가 만류했다: “그를 여전히 왕으로 세워놓고 하서오성을 할양하게 하고, 태자어()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게 해서 두 나라가 우호적으로 지내게 하는게 좋겠습니다.” 진목공은 그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여겨서 이오를 죽이지 않고 잘 지키도록 한다.

 

진목공의 부인 목희(穆姬, 즉 伯姬)는 이오의 동부이모의 누나이다. 원래는 이오를 미워했다. 그 원인은 그가 진()나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때, 그에게 백희는 이오에게 서모인 가군(賈君)을 잘 보살펴부고, 해외에 유랑중인 여러 공자들을 다 불러들이라고 당부했는데, 이오는 서모인 가군과 음란한 짓을 저지르고, 여러 공자들도 불러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생을 죽이려한다는 말을 들으니, 차마 그대로 있지 못하여, 후원에 높은 단을 쌓고, 단의 아래에는 장작을 가득 쌓아두고서, 태자, 공자 및 딸을 데리고 소솝을 입고 불에 타서 자살하겠다고 진목공을 협박하면서, 이오를 귀국하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진목공은 이오를 석방하여 귀국하게 한다. 그리고, ()나라는 하서5성을 할양하고, 태자어를 진()나라에 인질로 남긴다.

 

진목공은 인질로 잡아놓고 있던 태자어를 진()나라로 돌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딸 회영(懷嬴)을 그에게 시집보내어 처로 삼게 한다. 그리고 하동지역의 땅을 진()나라에 되돌려준다. 이것이 제2진진지호이다. 시간은 기원전 643년이다.

 

5년후, 태자어는 부친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우려하여, 몰래 처인 회영과 함께 진()나라로 도망치자고 상의한다. 회영은 태자어와 함께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겠다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태자어는 몰래 숨어서 진()나라로 돌아간다.

 

진혜공이 다음해 병사하고, 태자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회공(晋懷公)이다. 진회공은 등극하자마자, ()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해외를 유랑중인 중이(重耳)를 따르지도 말라고 명령한다.

 

진목공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이 배은망덕한 사위에 대하여 불같이 화를 내고는, 사방을 뒤져서 유랑중인 공자 중이를 찾아낸다. 중이를 내세워서 진회공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한 것이다.

 

진헌공의 장남인 중이는 43세때부터 유랑하기 시작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녔다. 그동안 유명한 개자추(介子推)가 허벅지 살을 잘라서 먹인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때의 중이는 초나라에 있었고, 초성왕(楚成王)의 친구로 지냈다.

 

금방, 진나라의 대장 공손지가 중이를 진()나라로 모시고 간다. 중이는 초성왕과 이별한 후,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공손지를 따라 진나라로 간다.

 

진목공은 중이를 만나서 잘 대접해준다. 그리고 중이에게 여자 5명을 보낸다. 그중에는 태자어의 본처였던 회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목공은 중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딸을 중이에게 개가시키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목공의 딸은 다시 나이 예순이 넘은 중이에게 시집가서 나중에 진문공(晋文公)의 부인 문영(文贏)이 된다. 이것이 바로 20년도 되지 않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진 세번째 진진지호이다.

 

진목공의 딸은 먼저 태자어에게 시집을 갔다가, 다시 그의 백부인 중이에게 시집을 갔는데, 당시에는 이런 일이 그다지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기원전636, 진목공은 병력을 보내어 중이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고, 중이는 왕에 오른다. 진목공은 친히 백리해, 공우집, 공손지등 중신들을 이끌고 사백여 전차를 이끌고 중이를 황하변까지 환송한다. 그리고 절반의 병마를 떼어서 중이에게 주어 황하를 건너게 한다.

 

()나라의 도움으로 중이는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왕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그후 중이는 도망친 진회공을 주살하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진나라의 난국을 수습했고 마침내 춘추오패중 한 명이 된다.

 

중이가 죽고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진목공은 기회를 틈타 이미 중원의 패주가 되어 있던 진()나라를 물리치고, 역시 춘추오패중 한 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