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위(魏)나라는 왜 천하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렸는가?

중은우시 2011. 2. 6. 21:06

글: 가동(佳桐)

 

 

 

 

춘추전국의 역사를 읽다보면 위문후(魏文侯) 위사(魏斯)시대의 위나라를 보면 느끼는 바가 많다. 삼국분진(三國分晋)의 초기에 위문후는 현명한 인재를 널리 기용했다. 자하(子夏),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리(李), 적황(翟璜)을 재상으로 삼고, 오기(吳起), 악양(樂羊)을 장군으로 삼고, 서문표(西門彪)에게 수리사업을 맡기니, 문관무관이 서로 돕고, 안과 밖이 모두 갖추어져 일약 중원의 패주로 성장한다. 특히 그가 임용한 이리는 변법(變法)을 실행하여 개혁정치를 하여, 경작과 전쟁을 장려하고, 수리사업을 일으킨다. 그가 만든 법전의 내용은 이후 진효공과 상앙이 활용했을 뿐아니라, 한,당,명,청의 이천년간 영향을 미친다. 유가제자들도 숭상하여, 천하 선비들의 마음을 얻으니 후세제왕들의 존유(尊儒)의 선구자가 된다. 오기는 특히 가장 최고수준의 군사가였다. 그는 손무(孫武)와 함께 병법의 시조라 일컬어진다. 그는 금과철마(金戈鐵馬)통솔하여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당시에 위나라는 조(趙), 한(韓)와 연맹을 맺어, 동으로는 제(齊)나라를 막고 서로는 진(秦)나라를 막았다. 부닥치는 자들은 모두 물리쳤으니, 나중의 강진(强秦)과 같은 기세를 보였다.

 

- 진나라를 격파하다. 위문후33년(기원전413년), 오기는 위나라군대를 이끌고, 서하(西河) 전장에서 진나라군대를 격파하고, 위하평원의 요충지 정(鄭)으로 진격했다. 진나라는 온나라가 공황상태에 빠진다. 위태자 격은 진나라의 주력부대가 오기를 막는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넘어 진나라의 군사거점 번방(繁龐)을 격파한다. 곧이어 오기가 임진(臨晋), 왕성(王城), 원리(元里), 낙음(洛陰), 합양(合陽), 음진(陰晋)등 진나라영토를 대거 점령한다. 위문후 38년(기원전398년)에는 서하지구를 완전히 점거하고, 상군(上郡)을 설치한다. 이렇게 하여 서부와 중원의 황금통로를 확실히 장악한다. 위문후는 낙수의 동안에 장성을 구축하여, 관동의 이익을 독점한다. 위무후(魏武侯) 3년(기원전393년)에 오기는 다시 진나라와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군대를 주성(注城)에서 격파한다. 위무후 7년(기원전389년)에는 오기가 5만의 위나라군대를 이끌고 일당십으로 양진성밖에서 온나라의 군대를 몰고온 진나라의 50만군대를 궤멸시킨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양진지전(陽晋之戰)"이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관중평원으로 쳐들어간다. 위무후9년(기원전387년)에는 오기가 무하(武下)에서 다시 진나라의 잔여군대를 대파한다. 진나라는 기본적으로 항거할 힘을 잃어버린다.

 

- 제나라를 분할하다. 위문후41년(기원전405년), 제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열후(趙列侯)의 지원요청을 받고, 위나라는 병력을 일으켜 구해준다. 조나라, 한나라의 군대와 연합하여 상대방을 격파하고, 제나라군대 3만명을 죽인다. 그리고 전략물자를 대거 획득한다. 위문후42년(기원전404년), 위, 조, 한의 삼진연합군은 제나라장성을 격파하고, 제나라에 땅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한다. 위문후는 새로 얻는 제나라토지를 이전에 점령한 하내(河內)지구와 연결시키기 위하여, 위(衛)나라 조가(朝歌) 부근의 몇개 도시를 점령한다. 위무후16년(기원전378년) 삼진연합군은 상구(桑丘)에서 연(燕)나라를 공격하는 제나라군대를 격파한다. 다음해에는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 본토를 쳐들어가서 영구성(靈丘城) 아래까지 압박한다. 위무후22년, 위나라는 연나라, 노(魯)나라, 위(衛)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토벌한다. 위나라군대는 박릉(博陵)까지 밀고 들어가니, 그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 초나라를 패배시키다. 위문후때, 자주 정(鄭)나라와 송(宋)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와 초나라는 이익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초나라군대가 연속하여 패배했다. 위무후5년(기원전391년), 위문후로부터 축적된 강대한 국력을 물려받은 위나라는 삼진연합군을 이끌고 초나라로 진공하여, 초나라군대를 대량(大梁), 유관(楡關)에서 대패시키고, 양릉(襄陵)을 가볍게 차지한다. 초나라의 조야는 공포에 휩싸인다. 초도왕(楚悼王)은 연속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한다. 위무후20년(기원전374년) 위나라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초나라군대를 다시 유관에서 격파한다. 초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려는 기도는 이렇게 저지당한다.

 

- 조나라를 핍박하다. 삼진연합군의 기치를 내걸고, 위문후는 위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비교적 약한 한나라를 끌어들이고, 이 기회를 틈타 조나라를 압박할 전략적인 공간을 확보한다. 위문후38년(기원전408년), 위나라는 송나라를 격파한 후, 조열후의 요청을 받아, 날로 강해지는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한다. 낙양의 통솔하에, 위문후40년에 중산국을 격파하고, 진군하는 도중에 적지 않은 조나라땅을 점령한다. 위문후는 또한 위(衛)나라의 제나라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명목으로 하여, 제나라와 조나라가 계속 다투던 장수(漳水) 남안을 편입시킨다. 그리고 업현(鄴縣)을 설치한다. 이렇게 하여 조나라가 중원으로 남진하는 길을 막아버린다. 위무후13년, 조나라는 위(衛)나라를 공격한다. 위신공(衛愼公)의 구원요청을 받아, 위나라는 출병하여 토대(兎臺)에서 조나라군대를 격파한다. 이로써 위나라와 조나라는 한때 사이가 악화된다. 위무후23년, 조나라는 다시 위(衛)나라에 손을 뻗는다. 위(魏)나라는 다시 조나라군대를 린(藺)에서 격파한다.

 

춘추시대의 각축을 거쳐, 천하에는 4개의 일류강국이 탄생한다. 동쪽의 제나라, 남쪽의 초나라, 서쪽의 진나라, 북쪽의 진(晋)나라가 그것이다. 비록 오(吳), 월(越)이 한때 굴기하였지만 잠시뿐이었다. 전국초기의 수십년은 위나라가 진(晋)을 대표하여 선조의 패업을 이었다. 진, 제, 초의 세 나라에 대하여 싸우면 이겼으니, 실력으로 첫손꼽을 수 있는 제후국이었다. 초, 진, 제의 삼국연합군은 위나라가 이끄는 삼진연합군이 대치했지만 명백히 열세에 놓여 있었다. 또 한 가지 유념하여야 할 일이 있다. 전씨(田氏)가 제(齊)나라를 찬탈한 후, 위문후를 통하여 주안왕(周安王)에게 제후로 봉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주안왕은 그리하여 이를 허락한다. 전화(田和)의 제나라에서의 통치는 비로소 합법성을 취득하게 된다.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 위문후의 제후국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당시의 야금중심은 중원지역에 있었다. 위나라군대는 가장 먼저 철제병기를 채택하여 청동무기를 대체했다. 거기에 오기와 같이 총명한 군사지휘관이 있었으니, 자연히 천하를 눈아래로 보았다. 더욱 깊은 요소는 위나라가 앞장서서 변혁하고 강성해졌다는 것이다. 감히 앞서가는 정신으로 사회를 변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토지소유제를 확립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엄격한 법률규범을 제정한다. 이렇게 하여 비교적 선진적인 생산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위나라의 변혁은 군사분야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정예병원칙을 앞서서 실현했다. 위문후는 병졸들에게 삼속(三屬)의 갑옷을 입고, 십이석(十二石)의 노(弩)를 다루고, 화살 50개를 가지고 다니며, 삼일의 양식을 가지고 다니고, 창과 검을 차며, 하루에 백리를 행군하도록 요구했다. 엄격한 선발기준외에도 요역과 세금을 면제해주는 군공봉작제도를 시행했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당시 천하를 횡행할 수 있었다. 당시의 위나라는 다른 육국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기발랄하던 제후국이 어찌하여 신속히 쇠퇴하게 되었을까?

 

이야기 하나로 시작해보자. 위혜왕(魏惠王) 15년(기원전355년), 위문후의 손자인 위영(魏塋), 즉 위혜왕은 제위왕(齊威王)과 교(郊)에서 사냥을 했다. 위혜왕은 제위왕에게 묻는다: "대왕은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나요?" 제위왕은 위혜왕이 국력을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한걸음 물러서는 방식을 선택한다: "없습니다." 그러자 위혜왕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1촌짜리 야명주를 10개 가지고 있습니다. 앞뒤로 각각 12개의 마차를 비출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제나라와 같은 대국에 보물이 없단 말인가요." 제위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의 보물은 당신의 것과 다릅니다. 내 신하중에 단자(檀子)라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였더니, 초나라사람들이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고, 십이제후가 조공을 하러 왔습니다. 내 신하중에 반자(盼子)라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고당(高唐)을 지키게 하였더니, 조나라가 감히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내 신하중에 검부(黔夫)라는 자가 있는데, 서주(徐州)를 지키게 하였더니, 멀리서 귀순하는 백성이 칠천여가가 되었습니다; 내 신하중에 종수(種首)라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도적을 방비하게 하였더니 모두 길에 떨어진 것이 있어도 주워가지 않습니다. 이런 국보는 천리 멀리까지 비춥니다. 어찌 열두개의 마차에 비하겠습니까." 이 말을 보면, 위혜왕과 제위왕의 고하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위나라와 제나라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예감하게 해준다. 예전에 위나라가 굴기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핵심은 바로 위문후가 인재를 갈구했었고, 파격적으로 인재를 기용하고, 흉금이 넓게 인재를 기용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여 인재들을 격려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위무후는 부친이 남긴 기반과 가업을 가지고 계속 확장하여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그러나, 인재기용에서는 부친에 비하여 손색이 있었다. 위혜왕은 재위기간이 가장 긴 군주중 한 명이다(50년). 당현종 이융기처럼 초기에는 정명하였지만, 점차 강퍅자용하여, 재능이 가진 자를 시기하고, 의심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의 인재를 불러모으지 못했을 뿐아니라, 자국의 인재도 많이 유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위나라는 원기를 크게 상하고, 국력이 날로 쇠약해진다. 제나라와의 마릉에서의 전투에 패배한 이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나중에는 보는 사람마다 무시하는 '홍시(軟枾子)'가 된다.

 

그렇다면, 위나라는 어떤 인재를 잃었는가? 삼가분진때 위나라는 진(晋)나라의 좋은 땅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도로망이 종횡으로 깔리고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상업과 무역이 흥성했다. 천하의 재물이 모이고, 천하의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므로, 위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인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자국의 인재만으로도 제왕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쉽게도 위나라는 너무나 많은 인재를 잃었다. 그중 "한 사람을 기용하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는 최고급 인재만도 7명에 달한다:

 

장수재목: 오기, 손빈, 악의

 

- 오기(吳起)(기원전440-기원전381): <<오자>>를 저술하여, <<손자>>와 합하여 <<손오병법>>이라 부른다. 위문후가 죽은 후, 오기는 위무후로부터 냉대를 받아서 초(楚)나라로 간다. 그는 떠나기 전에 서하를 되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만일 나에게 계획을 완성하게 한다면 진(秦)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데, 지금 군주는 참언을 믿으니, 서하는 얼마후에 진나라의 것이 되겠구나!" 초도왕은 오기를 재상으로 삼고, 법령을 정비하며, 남으로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으로 진(陳), 채(蔡)를 병합하고, 서로는 진(秦)을 공격하며, 위, 조, 한의 연합군을 격퇴시킨다. 이렇게 하여 초나라는 강대해진다.

 

- 손빈(孫臏)(기원전? - 기원전316년): <<손빈병법>>을 저술했다. 손무의 후손이다. 방연(龐涓)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위혜왕에게 간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두 발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는다. 다행히 제(齊)나라의 사신이 발견하여 몰래 제나라로 데려가서 전기(田忌)의 객경(客卿)이 된다.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할 때, 전기의 군사(軍師) 신분으로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계책을 시전하여 계릉에서 위나라군대를 물리친다. 나중에 한나라가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구원을 요청해오자, 손빈으느 다시 치거(輜車)에 앉아 전영(田嬰)을 도와서 계책을 세운다. 감조유적(減竈誘敵)의 계책을 써서 10만 위나라군대를 마릉도에서 격파한다. 그리고 위나라의 장수 방연을 죽이고, 태자신을 포로로 잡는다. 이때부터 위나라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제나라는 크게 강성하게 된다.

 

- 악의(樂毅)(생몰년 불상): 위나라 명장 악양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했고, 일찌기 위나라의 대부였으나 중용되지 못했다. 연소왕(燕昭王) 공(恐)이 황금대를 지어 현명한 인재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연나라로 가서 아경(亞卿)이 된다. 나중에 계책을 내어 조, 위, 한, 초의 네 나라와 연합하여 제(齊)나라를 공격한다. 연소왕은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봉하고, 조혜왕(趙惠王)도 상인(相印)을 내놓는다. 낙의는 5국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의 정예군대를 대파하고, 제나라의 도성인 임치(臨淄)까지 쳐들어간다. 그리고 반년내에 70여개성을 함락시킨다. 이로써 제나라는 거의 멸망지경에 이르고, 연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재상재목: 상앙, 장의, 범저

 

- 상앙(商鞅)(기원전약395년-기원전338년): 상앙은 어려서부터 '형명지학(刑名之學)'을 좋아했다. 처음에 위나라 국상(國相)인 공숙좌(公叔痤)의 가신으로 있었다. 비록 공숙좌가 극력 추천했지만, 위혜왕은 그를 기용해주지 않았다. 진효공이 현명한 인재를 모집한다는 영을 내리자, 상앙은 진나라로 가서 재능을 인정받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주재한다. '폐정전(廢井田), 개천맥(開阡陌)"을 통하여, 경작과 방직을 장려하고, 전공을 세울 것을 격려하고, 군현제를 실행하며, 연좌법을 시행했다. 진나라는 종법분봉제에서 중앙집권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향후 천하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는다. 상앙은 진나라군대를 친히 이끌고 위나라군대를 물리치고, 위혜왕을 핍박하여 하서의 땅을 진나라에 양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위나라는 대량으로 천도하니 이때부터 진나라에 대하여 수세에 몰리게 된다.

 

- 장의(張儀)(기원전? - 기원전309년): 위나라 대량 사람이다. 일찌기 귀곡자에게서 종횡술을 배운다. 장의는 위나라로 가서 위혜왕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겨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秦)나라로 건너가서, '연횡(連橫)'술을 펼쳐, 육국에 유세하여 진나라와 화친하게 만든다. 이를 통하여 소진(蘇秦)이 고심하여 만든 '합종(合縱)'국면을 타파한다. 장의는 얼마후 진나라의 제1대 국상(國相)이 된다. 계책을 세워 위혜왕으로 하여금 하서이북의 15 현(縣)과 소량(少梁)을 할양하게 하고, 곧이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섬현(陝縣)을 공격한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는 황하의 험준함을 독점한다. 장의는 진나라와 결탁하여 위나라로 가서 국상(國相)이 되어, 위나라가 진나라에 의부(依附)하도록 하는데 앞장선다. 그후 그는 다시 진나라 국상을 맡는다. 그리고 초나라와 제나라가 관계를 끊도록 만들어, 연횡을 맺어 제후들이 싸우게 한다는 효과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한다. 진나라가 육국을 격파할 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놓는다.

 

- 범저(范雎)(기원저? - 기원전255년): 일찌기 위나라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문객이었고, 제나라에 사신으로 따라간 적도 있다. 그때 그의 말재주는 제나라왕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위나라로 돌아왔지만 그는 질시를 받아서, 매를 맞아 근육이 끊기고 이빨이 부서진다. 그는 "진나라 사람들은 태후, 양후(穰侯)가 있는 것만 알지, 진왕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말로 진소왕의 관심을 끌어 그의 객경이 된다, 범저는 나중에 진나라의 상국이 되고, 대외적으로 '원교근공'의 전략을 실시하고, 대내적으로는 '고간삭지(固幹削枝)'의 정책을 쓴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세력확장은 더욱 기반을 다지고 착실하게 된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결전인 장평지역(長平之役)에서 법저는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조나라로 하여금 탁상공론하는 조괄(趙括)이 명장 염파(廉頗)를 대체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는 일거에 45만 조나라군대를 섬멸하고, 천하통일과정에서의 핵심적 승리를 거둔다.

 

위에서 언급한 삼장삼상(三將三相)을 제외하고도 위나라는 아주 독특하고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다. 그는 바로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无忌)(기원전?-기원전243년)이다. 위무기는 위안리왕(魏安釐王)의 동부이모 동생이다. 위나라가 쇠락해가던 시기에 그는 자립자강을 도모하며, 널리 식객을 모았다. 인재 수천명을 모아서 그를 위해서 일하도록 만들었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한단지전때, 신릉군은 군부(軍符)를 훔쳐내어, 추(錐)에서 위나라장수 진비(晋鄙)를 죽인 후,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병사를 물리친다. 그러나, 위왕에게 밉보여서, 오랫동안 타향에 기거했다. 진나라장수 몽오(蒙驁)가 병력을 이끌고 위나를 공격할 때 곤경을 피하기 위하여 위안리왕은 신릉군에게 귀국을 간청한다. 신릉군은 다시 합종을 약속하고, 몽오를 하외(河外)에서 대파한다. 그리고 함곡관까지 추격한다. 진나라사람들은 신릉군의 호소력을 겁내어 사방에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신릉군은 국외에 10년간 있었다. 천하의 제후들이 신릉군이 있는 것만 알지, 위왕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위안리왕은 과연 그의 병권을 박탈한다. 신릉군은 4년후에 우울하게 죽는다. 신릉군은 진나라군대를 물리친 마지막 군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몽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20개성을 가볍게 취한다.

 

위나라에서 유실한 탁월한 인재에는 사실 이외에도 서수(犀首), 위료(尉繚)등 부지기수이다. 오기, 손빈, 악의, 상앙, 장의, 범저, 위무기는 전국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들만 보고도 그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유방은 장량, 소하, 한신의 도움을 받아 항우를 물리쳤따. 유비는 제갈량에 의지하여 촉한의 황제로 등극했다. 위의 7명은 장량, 소하, 한신, 제갈량과 같은 급의 인물들이다. 오기, 손빈, 악의는 당시에 가장 모략이 뛰어나고 전투에 능했던 삼대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 근접한 인물로는 백승(白勝), 조사(趙奢)가 있지만, 약간 떨어지는 인물들이다. 상앙, 장의, 범저, 이사는 모두 진나라의 제업을 이룬 4대명상이다. "4명의 공헌자 중에서 3명이 위나라인재이다" 이것은 얼마나 탄식할만한 일인가? 신릉군 위무기는 맹상군 전문, 평원군 조승, 춘신군 황헐과 함께 "전국사공자"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신릉군이야말로 진정으로 대단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고, 사마천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신릉군의 죽음은 육국으로 하여금 진나라에 항거할 마지막 기둥을 잃은 셈이다. 위의 7인중 1인만 얻어도 한 지방을 안정시킬 수있고, 3인을 얻으면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7명의 북두칠성을 모조리 갖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7명은 신릉군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적국에서 기용되었다. 초나라는 오기를 기용했고, 제나라는 손빈을 기용했다. 그 후, 초나라와 제나라는 위나라와의 전투에서의 열세는 역전되었다. 연나라는 악의를 기용하고는 대국 제나라를 휩쓸어버리고, 뱀이 코끼리를 삼키는 위업을 달성한다. 상앙, 장의, 범저의 진나라에서의 역할은 동시대인의 평가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진시황을 보좌하여 통일위업을 완성한 명상 이사는 그의 천고명편 <<간축객서>>에서  이렇게 썼다: "진효공은 상앙의 법을 써서 풍속을 바꾸었고, 백성은 풍족하게 되고, 나라는 부강해졌으며, 백성들은 즐겁게 일하고, 제후는 기꺼이 따랐으며, 초나라 위나라의 군대를 얻고, 영토를 천리나 얻었으니 그 강함이 지금까지 미친다. 혜왕은 장의의 계책을 써서 삼천의 땅을 차지하고, 서로는 파, 촉을 병합했으며 북으로는 상군을 거두고, 남으로는 한중을 취했다. 구이(九夷)를 감싸고, 언, 영을 제압했으며, 동으로는 성고의 험준함을 차지하여 비옥한 땅을 차지했다. 그리하여 육국의 합종을 파괴하고, 서로 진나라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공로가 지금에까지 미친다. 소왕은 범저를 얻어 양후를 폐하고, 화양을 축출하였으며, 공실을 강화하였고, 사문을 막았다. 제후를 잠식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완성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인재를 사용하여 가장 정확하게 타격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바로 위나라이다. 상앙은 일찌기 진효공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위나라는 진나라의 심복지환이다. 위나라에서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킨다." 범저는 진소왕에게 이런 정책을 내놓는다.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 한나라에 타격을 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치 땅이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자 땅이다." 먼저 심복지환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극력 주장한 것은 바로 먼저 위나라를 견제해야한다는 것이다. 상왕이 진나라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에 영토할양을 요구했을 때 비로소 위혜왕은 탄식을 한다: "내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다시, 전국초기의 위문후 시대로 돌아가보자. 그 때는 이미 진취적인 정신과 거대한 계획이 서 있었다. 당초의 위나라는 천시, 지리, 인화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후손들이 이 기반을 귀하게 여겨서 계속하여 인재를 받아들이고, 인재를 기용하고, 인재를 포용했다면 천하통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상, 오기가 서하를 경영한 것은 진나라가 '양진지전'에서 패배한 후 국력이 쇠약했을 때, 기회를 보아서 일거에 기운을 냈다면 아마도 일찌감치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위혜왕이 공숙좌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앙을 재상으로 삼았더라면, 이리의 변법후에 다시 한번 강성을 도모할 수 있었다. 진나라와 다른 5국이 한때는 버틸 수 있겠지만, 위나라가 계속하여 밀고 들어간다면 제업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걸음 양보하여, 위문후 이후의 위무후, 위혜왕이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방에 적을 맞이하는 국면을 회피하기 위하여, 합종, 연횡 혹은 원교근공과 같은 모략을 써서 대외적으로 정확히 진행하였다면 위나라는 기세를 타고 강성해져서 나머지 육국을 압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하에 누가 감히 위나라와 다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이것은 너무나 많은 가설을 전제로 한다. 위나라사람들이 용인(用人). 행사(行事)에서 계속하여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았더라면, 천하통일은 진시황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영정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연히 위나라가 천하통일은 못한 것이나, 진나라가 천하통일은 한 것은 모두 그 나름의 원인이 있다. 우리는 전략전술, 체제매커니즘, 경제기반, 문화요소, 지연환경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위나라가 당시 여러 방면에서 기회를 선점했었다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가장 우세했던 위나라가 인재기용에서 계속하여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위문후가 죽은 후, 큰 뜻을 세운 위무후가 즉위한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무후가 서하를 타고 내려오다가 중류에서 오기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산하의 굳건함이여. 이는 위나라의 보배이다.' 오기가 대답하여 말했다: '덕이 중요하지 험준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 삼묘씨가 왼쪽에 동정을 오른쪽에 팽려를 가지고 있었지만 덕과 의리가 없어서, 우(禹)가 그를 멸망시켰다. 하나라의 걸왕은 왼쪽으로 하제를 오른쪽으로 태화를 가지고 있었고, 이궐이 그 남쪽에 있고, 양장이 그 북쪽에 있었지만 정치를 어질게 하지 못하여 탕왕이 그를 쫓아내고 말았다. 은나라의 주왕은 왼쪽으로 맹문을 오른 쪽으로 태행을 가지고 있고, 상산이 북쪽에 있고, 대하가 그 남쪽을 지나가지만 정치에 덕이 없어서, 무왕이 그를 죽였다. 이를 보면, 덕이 중요하지 험준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만일 군왕이 덕을 쌓지 않으면, 뱃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적국으로 갈 것이다." 무후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무후는 그후 오기에 대하여 점차 의심을 더해간다. 그리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가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비록 무후시대의 위나라라 하더라도 노신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웅풍은 충분했다. 그러나 병의 뿌리는 이미 깊이 박혀 있었다. 도를 잃다보니 인재들이 유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강위에 두꺼운 얼음이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단단한 것같지만 실제로는 소리없이 녹아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위나라의 백년패업은 끝이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