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유비는 황제이고, 관직은 더 이상 높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출신이 미천하여, 관직이 한단계 한단계 올라간 것이다.
유비는 스스로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며, 그가 한경제의 현손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문제이다. 삼국연의의 세습계보는 조작된 것이다. 역사상 고증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보에 따르면, 유비는 한경제의 18세손이다. 한헌제는 한경제의 13세손이다. 그러므로 무슨 황숙(皇叔)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비는 일찍이 현급간부로 있었다. 나중에 유비는 ‘별부사마(別部司馬)”의 신분으로 공손찬에 의하여 청주(靑州)로 파견된다. 거기서 전해(田諧)를 도와서 청주를 먹어버린다.
나중에 전해는 청주자사가 되고, 유비는 전해의 밑에서 평원현(平原縣) 현령(縣令)이 된다.
얼마후, 그는 평원국(平原國)의 국상(國相)이 되는데, 국상은 태수(太守)와 동급이다. 이 당시 유비는 이미 북해국의 국상으로 이름을 떨치던 공융(孔融)과 동급이 된 것이다.
기회는 흥평원년에 왔다. 조조가 서주(徐州)를 공격하고, 유비는 전해를 따라서 구원을 간다. 그후 청주자사 전해의 곁을 떠나서, 서주에 주둔한다. 이때부터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의 부하가 된다. 도겸은 황제에 글을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추천한다. 당시는 천하가 어지러워서, 황제에 글을 올려 추천하는 경우에 중앙정부의 답신은 필요없었다. 그것은 형식이었다. 다만, 힘이 있으면 실질을 갖고, 힘이 없으면 형식이 된다. 같은 시기에,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을 예주자사로 추천하고, 원소(袁紹)도 주앙(周昻)을 예주자사로 추천한다. 유비는 그저 요령(遙領,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관직만 받는 것)이므로 서주에 계속하여 머문다. 다음 해 도겸이 죽고, 유비는 서주목(徐州牧)이 된다. 바로 이때 서주(산동성 임기시는 당시에 서주에 속했다)에 있던 제갈량은 숙부를 따라 강서로 간다.
다시 1년이 지난, 건안원년, 조조는 황제에 글을 올려 유비를 진동장군(鎭東將軍)에 추천하고,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한다. 이때 한헌제는 이미 허수아비였다. 조조는 이미 부친의 비정후도 물려받고,다시 무평후도 추가로 받았다. 어쨌든 유비도 당시에 같은 후였다. 그러니 스스로 고(孤)라고 칭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이때 유비는 정말 외톨이였다. 여포가 서주를 점거한 후, 유비는 조조에 투신한다. 조조는 유비를 예주목(豫州牧)에 앉힌다. 유비는 재임기간동안 원소의 장남인 원담(袁譚)을 수재(秀才)로 추천한다. 여포를 죽인 후, 조조는 차주(車胄)를 서주자사에 임명하고, 유비의 예주목을 취소한다. 그리고 유비를 중앙으로 불러 좌장군(左將軍)의 직을 내린다. 좌장군은 유비가 조정에서 받은 가장 높은 직위이다. 이후 그는 계속 좌장군의 관직으로 행세한다. 조조도 그를 잘 예우해주었다: “나갈 때면 같은 가마를 타고, 앉을 때는 같은 좌석에 앉았다”
건안4년, 39세된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다시 서주를 점령한다. 이해에 조조도 동승(董承)을 죽인다. 도대체 누가 먼저 죽였는가? 삼국지의 위나라쪽 기록에는 유비가 먼저 손을 썼다고 되어 있고, 촉나라쪽 기록에는 조조가 먼저 손을 썼다고 되어 있다(진수도 이런 잘못을 범한 것이다). 사마광은 고증을 통하여, 유비가 먼저 죽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유비가 조조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 이유는 원소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고, 이 기회에 지역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조조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수완을 써서 유비를 쫓아낸다. 의복만 건지지 여인은 건지지 못한다. 유비는 부득이 다시 청주로 간다. 이때 청주자사였던 전해와 그의 상사였던 공손찬은 이미 원소에게 멸망했다. 현재의 청주자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유비가 추천해서 수재가 되었던 원담이었다. 수재는 주목 혹은 자사가 추천할 수 있는데, 1개주에 쿼터가 1명이었다. 이를 보면 유비가 인맥관리는 잘 한 것같다. 그후 근 10년간, 유비는 원소와 유표의 아래에서 객장(客將)으로 있었다. 관직은 오르지 못했다.
적벽대전후, 유비는 예주목의 신분으로 유기(劉琦)를 형주자사로 추천한다. 그리고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남사군(南四郡)을 차지한다. 동시에 유비는 손권을 서주목에 추천한다. 당연히 이 서주목이나 예주목은 모두 요령이다. 금방 유기는 죽어버리고, 유비는 마침내 형주목에 오른다. 이 해는 건안14년이다.
유표가 다스리던 형주에는 6개군이 있었다. 원래 형주에 속하는 남양군(南陽郡)은 유표의 관할하가 아니었다. 6개군은 다음과 같다: 남군(南郡), 강하군(江夏郡), 영릉군(零陵郡), 무릉군(武陵郡), 장사군(長沙郡) 및 계양군(桂陽郡). 이때 남사군은 유비의 수중에 들어온다. 각 군의 태수는 영릉군이 유도(劉度), 무릉군이 김선(金旋), 장사군이 한현(韓玄, 한현은 삼국연의에서 쓴 것처럼 위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계양군은 조운(趙雲)이다.
강하군은 유표시기의 태수는 황조(黃祖)였는데, 황조가 피살된 후 공자 유기가 맡는다. 조조는 유종이 투항한 후, 유기의 태수직을 취소시키고, 문빙(文聘)을 임명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부임하기도 전에 조조가 패배하여 쫓겨온다. 적벽대전후에 유기와 유비는 모두 강하에서 물러나고, 강하군은 손권이 독점한다. 태수는 정보(程普)가 맡는다.
남군은 가장 복잡하다. 남군태수는 주유(周瑜)이다. 전성기에 그는 남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와 대치한 것은 조인(曹仁)이다. 그러나 조인은 남군태수가 아니었다. 조조의 남군태수는 누구인가? 아직은 찾지를 못했다. 유비는 남군의 몇 개 현을 분리시켜 의도군(宜都郡)을 만든다. 태수는 장비를 앉힌다.
그리고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에 임명한다. 양양은 삼국연의에서처럼 장비가 얻은 것이 아니다. 아직도 조인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므로 관우의 양양태수직은 요령인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를 실현하려다가 불귀의 객이 된다.
유비는 그 후에 익주를 점령하고 익주목이 된다. 한중을 점령한 후에는 한중왕(漢中王)이 된다. 그는 좌장군의 직위를 마초에게 넘기고,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으니 무장중 제일인자이다. 법정을 상서령으로 삼으니 그가 문관중 제일인자이다.
나중에 유비는 한소열황제에 오르고, 4만의 병력을 이끌고 5만의 육손을 쳐서 형주를 수복하고자 한다. 예장을 지나, 오군으로 내려간 다음 북상하여 조비를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육손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 전투이후 촉한은 다시는 강남을 넘보지 못하고 삼협안으로 웅크리고 다시는 나가지 않는다. 유비는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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