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려화(趙麗華)
조조가 적막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태양아래로 나오자, 유비도 더 이상 참기힘들었나보다. 땅 속에서 나오려고 하고 있다. 이번에는 안양(安陽)이 아니라 팽산(彭山)이다. 팽산문화재관리소의 사람은 촌민들에게 "너희 집에 있는 쌀독이 국가1급문화재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고, 촌민들은 "집에 가서 잘 찾아보자"라고 말한다.
팽산에 유비묘가 있다는 최초의 기록은 현지의 지서(誌書)였다. 필자는 8년간 지서작업을 해본 적이 있다. 필자는 지서를 쓰는 사람들은 문장을 아주 조심스럽게 쓰고 객관적으로 쓰고자 한다는 것을 안다. 객관적이고 사실대로 써야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며, 문장습관이기도 하다. 만일 90%이상의 자신이 없으면, 그저 구전이나 소문만으로는 가볍게 붓을 놀리지 않는다. 낭방시 구역내의 문안현에는 예전에 소순, 왕지환등이 죽을 때까지 관직을 지낸 바 있다. 그렇지만 고대사 지서에는 원적으로 돌아가서 지서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옛날의 지서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은 아주 적었다. 그러나 나는 비교적 사실을 중시하여, 새로 지서를 쓸 때, 많은 자료를 찾아서, 새로운 지서에 보충해서 써넣었다.
장열(張說)도 포함된다. 낭방의 구지서에는 그에 대하여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낭방사람이라는 소문은 있었다. 이 일을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전당시를 뒤져보았다. 마침내 장열의 관적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는 동도 낙양사람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범양 방성사람이라는 것이다. 범양 방성은 바로 현재의 낭방 고안(固安)이다. 필자는 당시에 이 발견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낭방시지>>를 편찬할 때, 문화편에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신지에 써넣었다.
필자가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서를 만들 때에 얼마나 책임있게 일했느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자신과 증거가 없다면, 어떤 일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다면, 가볍게 부정하거나 의문을 품거나, 웃음거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팽산황묘(彭山皇墓)가 유비 무덤일지도 모른다. 필자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95년 4월, 사천성 야금지질감측국 605감측대는 전기저항률 대칭사극법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고압전력저항체가 10미터 내지 15미터에 묻혀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기저항률의 이상형태와 고압전력저항체가 깊이 묻혀있다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거대한 무덤일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묘도(墓道)는 남동쪽으로 뻗어있고, 묘체의 4방은 돌로 쌓여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적 발견이다.
2. 청나라때의 <<팽산현지. 능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치소의 북쪽 사십리에 있는 연화파(蓮花壩)에는 황릉이 있다. 그리고 연화파에는 황장(皇庄)이 있다고 전해진다. 묘는 산세를 따라서 만들었고, 봉토는 복두형(覆斗形)아더, 전해지는 바로는 이것이 유비의 묘이다. 민국시대, 자칭 유비의 후예라는 유동동이 이곳에서 초막을 짓고 묘를 지켰다. 그에 따르면 족보에 그렇게 나와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미 죽었고, 족보는 찾을 수가 없다...." "목마산 금릉경(金陵埂)에는 황릉이 있다. 연화촌에도 황릉이 있다. 이 거루(巨壘)는 황릉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도 목축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료의 기재이다.
3. "황분(皇墳)"의 경비원인 당사전과 자형은 십여년전에 우물을 하나 팠는데, 12미터 깊이를 팠을 때, 우물 아래에서 진흙이 석회, 주미(酒米) 및 황니(黃泥)를 섞은 삼합토(三合土)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갈색의 단단한 암석이 있었다. 할 수 없이, 천공기로 암석을 뚫으려고 햇는데, 40센티미터도 뚫지 않아서, '휙'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암석층의 아래가 왜 비어있을까? 당사전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거꾸로 식은 땀이 흘렀다. 나중에 당사전은 이 우물물로 황두(黃豆)를 갈았는데, 아무리 여러번을 해도 두화(豆花)로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해석은 이렇다. 고대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석회, 주미 황니를 섞은 삼합토로 지었다. '황분'은 거대한 무덤건축이므로, 지하에는 '삼합토'를 많이 썼을 것이다. 이 우물은 황분에서 너무 가까우므로, 지하에 석회등 대랑의 알칼리성의 흙을 함유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물이 알칼리성이 강해서, 두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직접 목격한 것이다.
4. 마을에는 노인이건 어린아이이건, 모두 이런 기괴한 민요를 부를 줄 안다: "요조유비분(要找 劉備墳), 신진출동문(新津出東門), 이성삼십리(離城三十里), 금릉경상심(金陵埂上尋)"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에 따르면,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의 무덤은 성도(成都)의 서남쪽에 있으며, 말로 달려서 반나절거리에 있다(馬步半日)고 한다. 이것은 이 민요와 들어맞는다. 팽산현은 성도의 서남쪽에 있고, 말로 달리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이외에 전란의 와중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황릉은 일반적으로 사망지나 출생지에 건립되지 않았다. 팽산현의 옛날 이름은 무양현(武陽縣)이다. 당시의 수상교통의 요지였다. 성도에서 이곳으로 오기는 아주 편리했다. 팽산현의 지리환경도 상당히 좋다. 공중에서 조감하면, 지형은 태극도와 같다. 산은 맑고 물은 뛰어나다. 중국에서는 유명한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이것도 합리적으로 해석되는 민간전설이다.
5.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100미터 가량을 걸어올라가면, 거대한 '산두(山頭)'가 불쑥 나타난다. '황분'은 한가운데 거대하게 서 있다. 100무(1무는 200평)의 부지를 차지하고, 수직높이는 20여미터이며, 직경은 100여미터에 달한다. 이러한 규격은 호화무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확실히 일반 백성이 만들 수 있는 무덤은 아닌 것이다. 이 곳의 사방은 9개의 작은 산봉우리로 둘러쌓여 있다. 마치 9개의 꽃판이 '황분'이라는 '화심(花心)'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고대 풍수가들이 하는 말중에 "구룡회두망(九龍回頭望)"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같은 풍수명당은 중국의 전역에 딱 2곳밖에 없다. 하나는 연화파 황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북경의 십삼릉이다. 봉건시대의 제왕만이 이런 '구룡회두망'의 풍수명당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기자가 현지에서 취재한 기록이다.
이상의 5가지를 보면, 팽산은 유비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본다. 다만 아래의 몇가지 의문은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유비가 봉절(奉節)에서 죽었을 때 한여름이었다. 봉절에서 성도까지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의 시신을 성도로 운송한 다음, 다시 황화계를 거쳐 연화촌으로 오려면 적어도 1달의 시간이 걸린다. 시신이 썩지 않았겠는가?
중국의 저명한 약리학자이자 홍콩국제전통의학연구회의 이사인 나명생은 이렇게 말한다. 1600여년전에, 시체방부기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이미 상당히 발달했따. 그러나 중국에서는 유향(乳香)등 천연식물약, 동물약 및 웅황(雄黃)등 광물약을 사용해서, 시신방부작업을 했다. 유비는 일대의 황제인데, 비록 여름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시신을 한달이상 썩지 않게 하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2. 황분의 방원 30리내에 개미, 파리, 뱀이 살지 않는다.
황분에 개미, 파리 벌레가 살지 않는 것은 해석하기 어렵지 않다. 팽산현 문화재관리소 소장인 방명에 따르면, 묘장의 니토에 석회등 알칼리성 물질이 섞여 있으므로, 파리들이 살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3. 1995년, 팽산현 문화재관리소는 황분의 앞부분의 "분상분(墳上墳)"을 발굴한 적이 있다. 황분에 가까운 곳에 수십톤 무게의 관현석(灌縣石)을 발견했다. 이 돌을 도대체 어떻게 외지에서 운반해왔을지에 대하여 일부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전문가들도 해명이 어렵다.
필자가 비전문가로서 한마디 하자면, 비록 지금도 전문가들이 피라미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 피라키드가 쿠푸왕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전문가들이 관현석의 운송문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연화촌의 이 무덤이 유비의 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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