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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劉備)의 묘는 어디에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0. 12. 22.

 

작자: 미상

 

촉한의 유비는 동오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후 백제성(白帝城)으로 물러나 있다가 223 4월에 병사한다. 5, 제갈량은 영구를 모시고 성도로 되돌아오고, 8월에 매장한다. 그가 도대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하여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설은 유비의 묘가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에 있다는 것이다. 사료근거는 진수의 <<삼국지>>이다. 진수는 촉한의 관각령사(문헌자료관리업무담당자)이고, 촉한에서 30여년간 살았다. 그는 분명히 유비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비의 사후, 시신은 봉절(奉節)에서 성도로 운반해오고, 나중에 오부인(吳夫人)과 함께 혜릉(惠陵, 지금의 무후사 내에 위치)에 합장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무후사내에는 확실히 유비묘의 건축물이 있다. 무후사박물솬의 사람이 한번은 나무를 심다가 의외로 유비묘의 봉토곁에서 발견한 수갱(樹坑)에서 촉한시대의 전()을 여러 개 발견한 적이 있다. 이는 간접적으로 <<삼국지>>등 역사문헌에서 혜릉과 유비묘가 성도에 있다는 기록의 신뢰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둘째 설은 유비묘는 사천 팽산(彭山)에 있는 연화파(蓮花)라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먼저 <<삼국지>>등 역사문헌에서 유비시신을 성도로 운반해갔다는 기록을 반박한다. 유비는 음력4월에 사망했다. 사천에서 이때는 날씨가 아주 더울 때이고 기온이 아주 높다. 당시의 교통은 아주 불편했는데, 백제성(지금의 봉절)에서 성도까지는 모두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과 험준한 산길로 가야 하다. 혼자서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40일이 걸리는 거리이다. 만일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서 유비의 시신을 성도로 운송했다면, 당시의 시체보관기술로 보아서 시신은 썩어버릴 것이다. 여름에 죽은 유비의 시신은 기껏해야 30일정도 썩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제갈량은 악취가 풍기는 유비의 시신을 끌고 3개월여간의 운반을 거쳐 성도에 묻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에 근거하여, 어떤 전문가는 목마산, 팽산의 아래에 있는 연화초이 바로 유비가 묻힌 곳이라고 본다. 성도의 무후사는 단지 유비의 의관총(衣冠塚)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화촌까지 운송한다고 썩지 않을까? 이것도 의문이다.

 

셋째 설은 유비를 봉절에 묻었다는 것이다. 곽말약은 1961년 봉절을 고찰한 후, 유비는 기온이 아주 높은 여름에 죽었고, 당시의 교통이 불편했으므로, 봉절에서 성도까지 물길을 거슬러 가는데 최소한 30여일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고, 당시의 기술여건상, 시신은 부패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비묘는 봉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남송의 학사 임연이 지은 <<중수선주묘기>>에도 성도 혜릉은 그저 궁검묘(弓劍墓)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삼국지>>의 기록에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 주류의 견해는 첫째 설이다. 유비묘는 바로 촉한선주한소열제유비의 능묘이고, 사천성 성도시 남쪽교외의 무후사 안에 있다. 삼국시대에 유일하게 보존된 황제릉이다. 혜릉이라고 칭하며, 묘의 높이는 12미터, 둘레는 180미터이고, 담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묘의 앞에는 조벽(照壁)이 있고, 석비가 새겨져 있으며 비에는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감부인, 오부인이 이곳에 합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