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중화민국시대의 방회(幇會)

by 중은우시 2011. 4. 2.

글: 장명(張鳴)

 

중화민국은 포가(袍哥) 및 모든 방회(幇會)들이 일약 신분상승한 시대이다. 이는 신해혁명부터 시작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포가나 다른 방회를 흑사회(黑社會, 조직폭력배)로 본다. 우리가 상해의 청방(靑幇) 거두 황금영이나 두월생을 언급할 때면 개략 그들이 흑사회 두목이라고 취급한다. 나중에 상해탄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작품에서 그들을 언급할 때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모습인 조폭두목의 이미지로 나타나곤 한다. 거칠고 호방하며, 의리를 따지며, 주먹질하고 사람을 죽이는...사실 그 당시 방회는 흑사회라고 볼 수 없다. 기껏해야 준흑사회정도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들은 원래 토지를 떠난 농민이고, 종법사회를 벗어나서, 도시와 마을에서 생활하는 유민이었다. 혹은 준시민이 된 후 종법이외의 단체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결성된 종법에 유사한 조직이었다. 원래의 고향조직의 통제를 벗어났으므로 어느 정도 거칠고 강호의 의리를 따졌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잠재적인 위협으로 취급하여 계속 탄압했다. 사실, 방회의 소위 '반청복명'의 기원이야기는 대부분 황당무계한 것이다. 그들의 반역성은 왕왕 조정의 진압과 관련된다. 청나라는 어쨌든 전통적인 약한 정부였다. 민간사회에 대한 통제력이 약한 편잉ㅆ다. 일단 바람만 불면 풀은 움직인다. 진짜 난리가 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방회도 이로 인하여 갈수록 음성화되고 녹림호한과의 구분도 점점 흐려지게 된다.

 

그렇기는 해도, 청나라말기의 방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뿐아니라, 기회만 되면, 조정에 대하여 선의를 나타내고자 애썼다. 청말에 나타난 서방교회관련 사건은 대부분 방회의 걸작이다. 그들은 교도를 때리고 소란을 치우며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그것은 청나라를 돕자는 것이다. 의화단과 마찬가지로. 사천의 포가와 섬서의 가로회(哥老會)는 특히 열심이었다. 1890년대 여동신으로부터,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20년간 그러했다. 당연히 이런 일을 한다고 하여 조정이 그들을 좋게 보아주지는 않았다. 진압할 때는 진압했고, 어떤 때는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서양인들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방회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지 않았다.

 

방회는 민국시대에 기세를 떨친다. 이는 손중산과 그의 혁명당 덕분이다.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혁명당은 처음부터 방회와 어울리고 방회로 들어갔다. 방회의 사람들에게 반청복명의 전통을 회고하도록 하고, 그들이 혁명적 각성을 하도록 일깨웠다. 방회에는 돈을 만질 기회가 늘었고, 머리가 잘릴 위험도 늘었지만, 혁명당과 방회의 결합은 갈수록 긴밀해진다. 특히 사천과 같이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먼저 어지러워지는 지방에서는 특히 말썽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포가의 두령은 혁명당사람들의 도움하에, 멀리 일본으로 건너가서 손중산을 만나고, 그로부터 직접 혁명에 대한 교육을 받고 혁명의지를 굳건히 한다.

 

청나라말기의 철로국유화정책은 사천에서 시행된다. 이것은 가장 큰 실책이었다. 사천의 철로는 사천인들이 모두 지분을 참여하고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전체 사천이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포가에게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 보로(保路, 철로보호)운동이 무장으로 바뀔 때, 사천은 포가의 세상이 된다. 무창의거는 바로 이러한 때 발발한다. 사천의 보로운동은 순조롭게 혁명화한다. 혁명이 성공하자, 포가는 혁명공신이 된다. 게다가 최고의 공신이 된다. 당시의 사천에서 보로동지군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조리 포가이다. 신군의 병사들도 모두 포가이다. 혁명당인들도 일찌감치 포가에 가입했다. 그래서, 포전준과 주경란과 같은 사신(士紳)인 도독들도 해내지 못한 후, 새로운 도독인 윤창형은 자신의 아문에 최대의 포가공구(公口, 가로회의 堂口 혹은 山堂과 碼頭)를 열고 스스로 대한공(大漢公)이라 하며 총타파자(總舵把子)가 된다. 나머지 장수들과 동지군수령은 모두 장기대야(掌旗大爺)가 된다. 성내의 각 아문, 경찰서에는 모두 포가공구를 설치하니, 길거리마다 공구가 많이 들어선다. 시민들도 서로 앞다투어 가입하여 보호를 구한다. 사천의 또 다른 군정부인 중경군정부는 대륙공(大陸公)의 간판을 내걸고, 역시 총타파자가 된다. 여러 포가는 사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이처럼 정부, 관리는 포가의 총타, 정인, 집당, 내팔당, 외팔당의 조직과 나란히 있었고, 전자의 위신은 후자만 못했다. 각 포가의 고위직들은 군대내에서 여장(旅長), 단장(團長)의 직위를 차지하는 외에 각 현의 현장(縣長)도 차지했다.

 

혁명후의 사천은 도처에서 머리에 영웅결과 호접결을 한 사나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경우는 검은 신발을 신고 야행의를 입고 극안의 무송이나 황천패와 마찬가지로 온갖 짓을 다 했다. 계집질에 노름에.. 혁명을 했지만 황제는 없고 왕법도 없다. 포가의 규칙이 사회의 규칙이 된다. 그러나, 포가의 규칙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사실 규칙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천하는 어지러워진다. 난세의 골치거리를 피하기 위하여, 원래 포가를 무시하던 시골향신들도 속속 포가에 가입한다. 그러나, 향신은 향신이다. 그들이 포가에 가입하더라도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기부하는 등의 방법으로 직접 고위층에 들어간다. 이때가 되어서는 포가가 더 이상 토지를 떠난 유민의 조직이 아니게 된다. 사천에서 기본적으로 이미 전민조직이 되어버린다. 이런 포가에는 청수(淸水)와 탁수(濁水)의 구분이 나타난다. 청수포가는 정상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포가조직이다. 대체로 과거의 종법사회의 규칙에 따라 생활한다. 그저 조직이 하나 더 있을 뿐이다. 탁수포가는 과거의 포가와 같다. 강도, 유괴, 밀수등등을 모두 한다. 무장화의 정도가 비교적 강했다.

 

혁명후 원세개통치시기에 상부에서는 포가를 일부러 탄압했고, 과거의 질서를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기본적으로 효과가 없었다. 일부 과하고, 혁명당과 관계가 가까운 일부 포가수령은 탄압받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포가들은 언기식고(偃旗息鼓)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조심하는 정도였다. 금방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고, 반원세계의거가 시작된다. 주요전쟁터인 사천에서 포가는 다시 한번 자신의 봄날을 맞이한다.

 

그후 사천군벌의 혼전에서, 일부 포가는 군벌로 변신한다. 저명한 포가대야인 범합아(范哈兒) 범소증(范紹增)은 사장, 군장까지 지낸다. 등국장, 공위청, 오지호, 위보신, 양춘방, 탕자모, 담소루, 석조무와 같은 포가의 우두머리들도 모두 사장, 여장의 직에 있었다. 나중에 거의 모든 사천의 군벌은 분대장부터 군장,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포가형제들로 채운다. 각지의 민단도 포가의 수중에 장악된다. 군걸들이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포가가 도와주지 않고서는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군인정권에서 군인이 포가가 되니 그 아래의 행정관리도 자연히 죽어라 뒤를 따른다. 서로 포가가 되려고 한다. 어떤 현장은 집밖을 나서서도 사람들이 그를 현대야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xx대야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더 체면이 서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되자 포가는 신분세탁을 마치게 된다. 탁수포가는 군대에 들어가지 않으면 단속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청수포가는 일반적인 사회조직으로 변신한다. 향회 화회와 별다른 구분이 없게 된다. 가입하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지만, 일반백성에게는 사실 가입하느냐 아니냐는 별 차이가 없다. 모두 가입하면, 가입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돈과 세력이 있으면, 포가가 유용하다 급히 사람을 끌어모아서 민다능 ㄹ만들어 민단의 책임자가 되곤 한다.

 

포가의 운명은 국민당통치시기에 약간 변화한다. 신해혁명후, 혁명당은 실제로 진정한 주인이었던 적이 없다. 몇개 성을 점거했지만 금방 원세개에게 쫓겨난다. 대혁명시기가 되어, 북벌이후에 비로소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한다. 이때부터 그들은 옛날의 맹우를 버리기 시작한다. 방회의 세월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일찌기 청방에 속했던 장개석은 갈수록 사람들이 옛날에 그가 진기미를 따라다니던 얘기를 하는 것을 듣기 싫어한다. 청방의 우두머리들이, 청방의 방원인 그를 만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항전승리후, 장개석은 항해에서 흑사회를 단속하는데, 두월생의 아들을 단속한다. 이 과정에서 사천군벌의 큰형격인 유상도 눈치를 채고, 포가와 거리를 두게 된다. 자신의 휘하장수인 범합아는 바로 이때 군대에서 쫓겨난다. 항전승리후, 사천에서조차도 관원들이 공공연히 자신의 포가신분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이 신분은 불법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드러낼만한 것이 아니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정부도 일단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면 준흑사회와는 거리를 둘 수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