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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중공일대(中共一大)”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0. 11. 13.

 

: 마장홍(馬長虹)

 

중국공산당의 창당과정은 아주 명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은 매년 7 1을 창당기념일로 기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당일이 언제인지, 누가 참석했는지 등등의 여러가지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중공일대와 관련한 몇 가지 수수께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의 창건일은 도대체 어느 날인가?

 

7.1을 당의 창건일로 기념하게 된 것은 연안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연안에는 모택동, 동필무만이 중공1대에 참석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7월이라는 것만 기억했지, 구체적인 일자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상징적으로 7월의 첫째날을 건당기념일로 정한 것이다. 역사로서 기념일이 반드시 생일과 같을 필요는 없다. 당사학자들이 고증을 통하여 1970년대말에 중공일대의 개최일자가 1921 7 23일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결론은 1981년 건당60주년때,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편찬한 <<중공당사대사년표>>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미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에도 의문점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중공일대의 개최일자를 중국공산당의 성립일자로 보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논리대로라면, 먼저 당과 당원이 있어야, 당원의 대표가 있고, 나아가 당의 1대표대회를 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일찌감치 1920 11월에 <<중국공산당선언>>을 제정하고, 동시에 <<공산당>>이라는 월간 간행물도 발간했다. 사실상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코민테른 극동서기처는 기관의 간행물에서 이미 중국의 공산주즤조직을 중국공산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둘째, 중공일대는 언제 폐막하였는가?

 

어찌되었건, 중공일대의 개막일자는 확정되었다. 그런데, 폐막일이 언제인지는 아직까지도 정설이 없다. <<중국공산당역사>>(1)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사학계는 당이 제1차대표대회 폐막일을 7 30, 7 31, 8 1, 8 2, 8 5일등 여러가지 다르게 보는 견해가 존재한다. 중공일대의 폐막일에 대한 다섯가지 주장중 가장 먼저 배제될 수 있는 것은 7 30일설이다. 왜냐하면 그날 밤에 중공일대 대표들은 아직 상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밤중에 차를 타고 100킬로미터(빠른 차로 2시간 소요) 떨어진 가흥까지 가서, 다시 배를 임대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미결된 안건들을 계속 논의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주장은 8 5일 폐막설이다. 7 30일 심야에 조계경찰의 수색으로 중단된 대회를, 5일후에 다시 열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8 1일 및 8 2일 폐막설은 관련회고록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8 1일 오후에 돌연 불었던 폭풍은 이 두 가지 주장을 부정하게 된다. 중공일대대표중에서 남호회의가 한밤중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폭풍이 불어 재난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를 보면, 회의 폐막일이 이 두 날은 아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배제해보면, 7 31일 가흥의 남호에서 마지막날 회의를 개최하였다는 주장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설이 많은 자료와 사료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셋째, 당의 일대대표의 인원수는 도대체 몇 명인가?

 

중공일대에 참석한 대표수에 관하여, 이전에는 12인설과 13인설의 대립이 있었다. 참석자들의 기억이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 문제도 오랫동안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출판사 1991년판 <<중국공산당역사(상권)>>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회에 출석한 국내 각지와 재일공산주의소조의 대표 12, 여기에 12명의 대표이름을 열거한 후 이렇게 추가하고 있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에는 포혜증도 있다 그리고 주석에서 이렇게 표시한다. 포혜증은 당시 광주에 있던 진독수가 파견하여 참석한 것이라고. 중공당사출판사 2002년판 <<중국공산당역사(1)>>에는 고쳐서 13인대표라고 적었다. 포혜증의 대표신분을 확인해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독수가 지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변형도니 13인설이다.

 

사실, 회고록들 이외에 12설을 주장하는 것은 사료적 근거도 있다. 러시아어 문서인 <<중국공사당대표대회>>는 중공일대가 폐막되었을 때, 혹은 폐막된 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완성된 정식보고서인데, 거기에는 명확하게 12명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이 12명의 지역분포까지도 아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7개 지방(상해포함)이고 2개지방은 각각 1명의 대표를, 5개 지방은 각각 2명의 대표를 보냈다 합하면 12명이다. 관건은 일본을 제외하고, 도대체 누구를 <<중국공산당대표대회>>의 집필자가 대회에 참가한 대표를 꼽을 때 13명중 배제하였느냐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배제된 사람은 중도에 떠나간 진공박이라고 한다. 중공일대가 프랑스조계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가흥남호에서 마지막 회의를 개최할 때, 진공박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장국도와 주불해가 회고록에서 크게 언급했을 뿐아니라, 진공박도 <<십일여행중의 춘신포>>에서 인정하였으므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진공박은 대회폐막시에 행방을 알 수 없어 배제되었다고 본다. 여기에 남호유람선의 12명대표를 합하면, 모두 13명이다.

 

<<중국공산당대표대회>>에서는 포혜승이 진독수 개인을 대표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개 지방을 대표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광주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2명의 대표를 보낸 것이다. 진공박과 포혜승.

 

넷째, 중공일대때 남진북리는 왜 참석하지 않았는가?

 

중공일대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은 남진북리(南陳北李, 진독수와 이대쇠)가 참석하지 않은 점이다. <<중국공산당역사(1)>>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때, 진독수는 광동정부 교육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자금을 모집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있었다. 이대쇠는 북경도서관주임, 교수를 맡는 외에, 북경국립대전문학교직원대표연석회의 주석을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이 바빠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남진북리가 일로 바빴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중공일대에 불출석한 이유로 삼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진독수는 중공일대후의 9월에 상해로 되돌아왔다. 그러르모, 회의를 조금만 늦추었다면, 진독수와 이대쇠도 출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참석하기를 기다려 회의를 열지 않았다. 원인을 분석해보면, 당시 창립대회를 개최하는 사명을 띄고 있던 코민테른의 대표가 급히 대회를 소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당시 실제로 진독수를 대신하여 상해공산당을 이끌고 있던 이달(李達)이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6, 3국제는 마린과 마크로프(니코르스키)의 두 사람을 상해로 파견했다. 그들은 우리와 만난 후, 우리 당의 상황을 알고 나에게 즉시 당대표대회를 소집하게 하고, 중국공산당의 정식성립을 선포하게 하였다. 진독수는 불출석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중앙국서기로 선출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당의 창건에 거대한 공헌을 세운 이대쇠는 당중앙에 직위를 받지 못한다. 그 원인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일대대표중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시험대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굳건히 걸었다. 그들은 모택동, 동필무, 이달, 진담추, 하숙형, 등은명, 왕진미의 7명이다. 어떤 사람은 당내의 의견불일치 혹은 개인은원으로 사회주의의 길에서 벗어나서, 당내 반대파가 된다. 이들은 혹은 길거나 혹은 짧은 기간을 거친 후 역시 혹은 크게 혹은 적게 공헌을 세운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상반된 길을 걷기도 했다. 그들이 왜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는데,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걸었는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