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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수양제의 두 딸들은 망국이후에 어떻게 살았는가?

by 중은우시 2009. 7. 15.

글: 장계합(張繼合)

 

수양제(隋煬帝)는 모두 삼남이녀를 두었다. 이들 금지옥엽들은 모두 편안하게 살면서 걱정을 몰랐다. 681년, 수양제가 강도(양주)에서 피살당하면서, 자녀들을 돌볼 틈이 없었다. 고인들은 이런 말을 했다: "새집이 기울어 떨어지는데, 멀쩡한 새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양제가 쓰러지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바로 수나라의 황실자손, 황친국척이었다. 특히 그의 두 딸들은 모두 명운이 좋지 못했다.

 

먼저 수양제의 큰 딸부터 얘기하자: 남양공주(南陽公主). <<수서. 열녀전>>에는 그녀에 대한 간략한 일생이 수록되어 있다. 이 공주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주 예쁘게 생겼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으며,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하는 일이 모두 예의에 맞았다. 나이 열넷에 허국공 우문술(宇文述)의 둘째아들 우문사급(宇文士及)에게 시집간다. 공주는 14살에 시집을 가서, 시종 아주 어질었다. 스스로 공주라고 남을 깔보지도 않았고, 집안일을 두고 다투지도 않았다. 두 어린 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아꼈고, 공주도 시보모에게 효성을 다했다. 시아버지인 우문술이 병으로 침상에 누워있을 때는 남양공주가 친히 부엌으로 가서 탕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침상앞까지 들고오기도 했다.

 

남양공주가 이처럼 어질고 덕이 있었지만, 가정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첫째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자신의 부친이 죽임을 당했는데, 부친을 죽인 원수가 바로 남편의 형인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친정이 망했을 뿐아니라. 시댁도 망한다. 우문화급이 황제를 시해하였기 때문에 길거리의 쥐새끼처럼 누구나 두들겨패는 인물이 되고, 결국 두건덕(竇建德)이 우문화급을 죽인다. 남양공주는 죄인의 가족으로 감옥에 갇힌다. 비록 그녀는 담담하게 대처했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두건덕이 자신의 10살된 친아들을 죽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남양공주는 삭발을 해서 비구니가 된다. 전란이 끝난 후, 다시 장안으로 되돌아온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헤어진지 오래된 남편 우문사급을 낙양에서 만난다. 물시인비(物是人非). 산하는 그대로이지만 사람은 이미 달라졌다. 우문사급은 그녀에게 미안한 감이 있어서 다시 합치고 싶어했다. 그러나, 공주는 이미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그대는 원수집안이다. 그대를 한 칼에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반역하던 날에 그대가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것이다." 공주의 마지막으로 "만일 죽고 싶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두 부부는 원래 서로 사랑했었는데, 집안과 나라의 원한때문에 이렇게 서로 찢어지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수양제의 둘째딸을 보자. 바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대양비(大楊妃)이다. 이 여인은 신비스럽다.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한가지 이유로는 그녀의 지위가 문덕황후처럼 혁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는 그녀가 전고의 망국황제인 수양제의 친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 있으니, 그녀의 가정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구당서. 후비열전>>에서는 "대양비"에 대하여 그 어떤 기록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저 이세민의 아들들의 전기중에서 약간의 내용을 알아낼 수 있을 뿐이다. 확실히 이세민은 후궁을 두는데 도량이 넓었다. 정적의 딸이든, 과부가된 형수이건, 모조리 데려왔다. 나라와 집안의 한을 담고 있던 대양비가 대당의 황제와 어떻게 지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했었는지 어떤지를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대단했다. 당태종 이세민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양비는 오왕(吳王) 각(恪)과 촉왕(蜀王) 음()을 낳았다"

 

당태종의 14 아들 중에서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가장 컸던 것은 '멍청이'인 이치(李治, 당고종)가 아니었다: 문덕황후 소생인 이태(李泰, 넷째)와 대양비 소생의 이각(李恪. 셋째)이었다. 이태는 태자의 자리를 노리다가 이세민에 의하여 신분이 격하당해서 바깥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 태자가 무도하고, 번왕이 후계를 노렸다. 둘 다 내보낸다" 이태는 문덕황후의 소생이므로, '번왕으로 후계를 노리는' 큰 죄를 지었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세민은 그를 아주 편애했었기 때문이다.

 

이각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그의 모친은 수양제의 딸이다. 그는 당연히 후계자라는 자리와는 인연이 없을 수밖에 없다. <<구당서. 태종제자열전>>을 보면 "(이)각은 문무에 모두 재능이 있었고, 태종은 자주 그가 자기와 닮았다고 말했다. 그의 명망은 아주 높아서 사람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다만, 뒷배경이 없으면 게임을 벌일 수가 없다. 대권을 장악한 장손무기는 반드시 문덕황후 소생으로 후계자를 삼고자 했다. 그들은 바로 장손가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이각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쓰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건으로 인하여 이각을 연좌시켜 주살하니, 여러 사람들의 바람이 무너져버렸고, 국내에서 이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역사에 가설은 없다. 만일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면, 이각이 이세민의 태자가 되었더라면, 음성양쇠의 당고종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음은 철두철미한 플레이보이이다. 그는 엽색을 지나치게 즐겼고, 여러번 법도에 어긋났다. 백성들이 아주 미워했다. 나중에 형인 이각에 연좌되어 '서인으로 신분이 낮추어진 후 축출되고 파주(巴州)로 유배를 간다" 결국 외지에서 죽는다.

 

이런 생활조건하에서 대양비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죽은 후에 이세민의 소릉(昭陵)에 배장되었는지 여부도 지금까지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