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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와룡(臥龍)과 봉추(鳳雛)의 관계는?

by 중은우시 2009. 11. 18.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와룡은 제갈량(諸葛亮)이고, 봉추는 방통(龐統)이다. 와룡, 봉추는 모두 유비의 군사로서 한명은 내부를 한명은 외부를 담당했다. 그들은 서로간에 보완작용을 했으니, 한나라의 소하,장량에 비견할만하다. 그들은 같은 왕조에서 같은 임금을 섬겼는데, 동료관계이외에 그들은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우선 그들의 아호(雅號)부터 얘기해보자. <<삼국지. 방통전>>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양양기(襄陽記)>>에 따르면, 당시에 와룡, 봉추와 나란히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 수경선생(水鏡先生)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사마휘(司馬徽)이다. 이 세 사람의 아호는 모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바로 방덕공(龐德公)이다. 방덕공은 어떤 사람인가? 방덕공은 와룡, 봉추, 수경과 어떤 관계인가? 아래에서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방덕공과 수경의 관계

 

덕조(德操, 사마휘)는 나이가 (방)덕공보다 10살 어려서, 그를 형으로 모셨고, "방공(龐公)"이라고 불렀다. 이는 <<양양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양양기>>를 통해서 분석해보면, 사마휘는 방덕공보다 10살이 어리고, 자주 함께 천하형세를 논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뜻을 지녔을 뿐아니라, 서로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상호 칭송해서, 방덕공은 사마휘를 '수경'으로 부르고, 사마휘는 방덕공을 '방공'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모두 한운야학과 같이 산림에 은거하여 지내는 생활을 즐겼고, 속세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으니 세외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유비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유비가 사마덕조를 만나서 세상일을 물으러 갔다. 덕조는 "유생속사가 어찌 세상일을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인데, 그 중에는 복룡, 봉추가 있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제갈공명, 방사원(龐士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를 보면 수경은 인재를 잘 알아보았던 사람이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사마휘는 대지약우(大智若愚)의 '호호선생(好好先生)'이라고 한다.

 

둘째, 방덕공과 와룡의 관계

 

<<삼국지>>에 따르면 이런 말이 있다: 공명은 매번 그 집에 오면, 혼자서 상(床) 아래에서 절을 했다. 덕공은 처음에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 이 기록을 보면, 제갈량은 방덕공을 자신의 어른 또는 스승으로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제갈량의 스승중 한 명이라고 추단한다. 어찌되었건, 방덕공과 제갈량은 개략 스승제자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들은 또 다른 관계도 있었다. "덕공의 아들 산민은...제갈공명은 작은 누나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위나라 황문이부랑을 지냈는데, 일찍 죽었다." 즉, 방덕공은 제갈량의 막내누나의 시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방덕공과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黃承彦)도 보통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승제자관계이면서 친척관계이기도 하다.

 

셋째, 방덕공과 봉추의 관계

 

"(방)통은 덕공의 종자(從子)이다. 어려서는 알아보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덕공만이 중시했다. 나이 열여덟이 되자, 덕조를 찾아가도록 했다" <<양양기>>의 이 기록은 일목요연하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인 동시에 그가 비교적 중시했던 제자였던 것이다.

 

넷째, 와룡과 봉추의 관계

 

이상의 기록을 보자면,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과 방통은 동문관계이면서 친척관계에 있다. 유비진영에 가담한 후에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동료였다.

 

다섯째, 제갈량과 방통의 연령

 

방덕공과 사마휘의 생졸년은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갈량과 방통의 생졸년은 완전히 추단이 가능하다. <<삼국지. 방통전>>의 기록에 따르면, "추현을 포위공격하면서 방통은 무리를 이끌고 공성했다. 그러나, 흐르는 화살에 맞아서, 죽으니, 나이 서른여섯이다" <<삼국지.유비전>>을 보면 추현을 포위공격한 것은 건안19년이다. 그러므로, 방통은 178년에 태어나서, 214년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제갈량은 180년에 태어나서 234년에 죽었다. 향년 54세였다. 이를 보면, 방통이 제갈량보다 2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비슷한 연령이고, 같은 뜻을 지닌 좋은 짝이었다. 아쉽게도 방통이 젊어서 죽어서 두 사람의 이상과 포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여섯째, 방통은 낙봉파에서 죽지 않았다.

 

<<삼국연의>>에서는 방통이 낙봉파(落鳳坡)에서 죽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다. <<삼국지.방통전>>에서는 그가 추현을 포위공격하면서 공성하는 과정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낙봉파는 아마도 후세인들의 날조이거나 아니면 방통의 묘소가 있는 곳일 것이다.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었다고 한다면 전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당시에 '와룡, 봉추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유비는 두 사람을 다 얻었음에도 삼분천하밖에는 얻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방통이 젊어서 요절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