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옥(裴鈺)
"신은 원래 포의(布衣)로, 남양(南陽)에서 농사를 지으며, 난세에 구차한 생명을 유지하였고,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先帝, 유비)께서는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몸을 낮추어 초가집을 세번이나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금세상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따라...."
<<출사표>>로 제갈량은 "지성(智聖), 충신'의 이미지로 사람들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본인은 난세를 맞이하여, 병법을 익혀 팔진도를 펼치고, 곳곳이 현기를 숨겨두어, 변화무궁했다. 두보는 "공개분삼국, 명성팔진도(功蓋分三國, 名成八陣圖)'라고 읊었다.
지금 제갈량의 고리(故里), 고거(故居), 궁경지(躬耕地)를 둘러싸고, 팔진도처럼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하남 남양, 호북 양번(襄樊, 옛 襄陽 소재지), 산동 임기(臨沂)의 세 지방이다. 이는 명인의 고향을 놓고 다투는 것중에 수백년이라는 시간이나 지속되고 있는 오래된 사안이다. 청나라때부터 지금까지 세곳의 다툼은 갈수록 복잡미묘해지고, 방관자가 보기에는 갈수록 의문이 들게 만든다.
호북 양번, 하남 남양의 두 곳은 제갈량의 '궁경지'를 놓고 싸운지가 수백년이나 되었다. '궁경지'는 제갈량이 농사에 종사했던 곳을 말한다. 양번이나 남양은 모두 말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으나, 제갈량을 고향사람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함이다.
2009년 9월 30일, 남양시 문화국의 한 간부는 한 포탈사이트에서 "남양에서 농사를 지은 일대지성 제갈량은 우리 남양에서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두 곳의 역사상 쟁탈전은 재미도 있다. 청나라 도광연간, 호북 의창출신의 고가형이 남양지부로 부임한다. 그때 양양사람과 남양사람이 제갈량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고지부는 양양에 밉보이기도 싫고, 남양의 분노를 사기도 싫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련을 하나 써서 무후사(武侯祀)에 남긴다:
심재조정(心在朝廷), 원무론선주후주(原無論先主後主)
명고천하(名高天下), 하필변양양남양(何必辨襄陽南陽)
고지부의 이런 조치도 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고, 양측은 더욱 드러내놓고 다툼을 벌였다.
1990년, 중국우정이 <<삼국연의>>특종우표 2세트를 발행했는데, 그중의 1장이 "삼고초려"였다. 이는 또다시 양번과 남양의 역사적 구원을 건드리게 된다. 두 지역은 이 우표의 최초발행지를 놓고 다투었다. 국가우표발행부서는 할 수 없이 두 곳에서 각자 최초발행식을 치르도록 한다.
2003년, 인민교육출판사의 중학교 어문교재에 이미 삭제한지 10년이 지난 <<융중대(隆中對)>>를 실었다. 거기에 주석으로, "융중(隆中)은 산이름이다. 현재의 호북 양번에 있다."고 붙여놓았다. <<출사표>>의 주석에는 "남양"이라는 글자에 "남양, 군명이다. 현재의 호북 양양일대이다" 이는 남양사람들을 자극했다. 남양시측에서는 심지어 만명이 서명하는 항의행사까지 거행한다.
2008년 6월 8일, CCTV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호북양번의 도시광고를 내보냈다. "제갈궁경지. 산수양번성(諸葛躬耕地, 山水襄樊城)". 이는 다시 남양사람들의 항의를 초래했다.
당연히 '궁경지'라는 모호한 단어는 사실 거대한 잠재적인 이익을 안고 있다. 2003년 9월, 양번초상단은 성대표단을 따라 일본을 방문한다. 일본측에 양번이 제갈량의 궁경지임을 대거 선전했다. 마침 한 일본기업의 상무이사는 제갈량의 팬이었다. 아들의 이름까지도 "량(亮)"이라고 지었을 정도이다. 나중에 이 기업은 '동풍자동차'와 합작하여 양번에 공장을 건설한다.
"와룡강(臥龍崗), 지혜의 언덕" 이는 하남 남양의 도시명함중 하나이다. 금년 1월에 공포된 <<남양시문화산업발전계획강요>>에는 "남양중심도시의 문화산업집적기능을 중점적으로 건설하고 대거 배양한다. 강대하고 폭넓은 남양산수문화와 역사문화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문화관광업을 추진한다."고 하였다.
소위 "중심도시"인 남양에는 "일산일수일와룡"을 건설한다. 즉, 독산관광구, 백하도시관광지역, 와룡강문화관광산업지구이다. 그중 와룡강문화관광산업지구는 제갈량의 무후사를 관광지로 하여, 오락, 영화드라마, 음식, 숙식, 패션, 소비등 여러 산업을 모은다.
계획에 따르면, 2012년에 총수입은 4.15억위안에 이를 것이며, 2015년ㅇ는 14.35억위안에 이를 것이다. 계획이 끝날 때쯤이면 문화관광산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2만명에 이르고, 사회취업효과는 8만명에 이를 것이다.
호북양번의 제갈량에 대한 사랑은 '호적수' 남양시에 못지 않다. 융중을 앞장세우는 삼국문화관광지구는 양ㅇ번 '11차5개년계획"의 관광우선발전지역 및 프로젝트이다. 총면적은 209평방킬로미터이다. 2010년까지 관광객 100만-150만을 끌어들일 예정이고, 관광수입은 8-10억위안에 이를 예정이다. 양양은 늦어도 2013년까지 고융중은 국가5A급 관광지로 만들겠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제갈량의 출생지는 궁경지에 비하여 손색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융중은 알지만, 산동 임기는 모른다. 궁경지의 쟁탈전이 출생지를 뒤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산동 임기는 제갈량문화광관지구건설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4평방킬로미터의 면적내에 와룡산, 북채한묘군, 무후쌍궐, 지혜교, 제갈종사, 제갈모려등에 2억위안을 투자한다. 프로젝트가 건설되면, 연수익 2,562만위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며, 8년이면 전부 회수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외에 산동임기는 제갈량문화관광축제를 개최한다. 2007년의 문화관광절에 계약된 프로젝트만 32개이고, 누적투자총액 24.616억위안에 이르렀다. 제갈량을 이용하여, 기계, 전자, 방직, 화공, 건재, 농업, 관광등 여러 산업을 유치했다.
수백년동안 남양과 양번은 시시때때로 자잘한 일을 가지고 크게 싸우곤 했었다. 그러나, 남양시의 2008년도 <<정부공작보고>>를 보면, "...낙양, 평정산, 양번등 주변도시와 합작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말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두 곳이 제갈량고향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서로 협력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명인고향다툼은 윈윈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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