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가경시(柯慶施): 주은래의 총리직을 대체할 뻔했던 인물

중은우시 2010. 1. 18. 18:44

글: 양국선(楊國選)

 

가경시(柯慶施)라고 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만일 가경시가 하마터면 주은래의 총리자리를 대체할 뻔했다고 말하면 더더욱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경시가 사망한 후의 부고에서 건국이래 최초로 그를 "모택동동지의 친밀한 전우"라고 평가했었다는 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가경시는 1922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중국공산당내에서 레닌을 접견한 바 있는 몇 안되는 고위간부중 하나이다. 1930년대에 그는 중공중앙 비서장의 직무를 맡았다. 항전기간동안 연안에서 일을 한 이후, 관료로서의 생애는 여러번의 좌절을 겪었다. 정풍때 숙청되기도 했고, 그의 부인은 이로 인하여 자살한다.

 

건국후에, 중공중안 조직부장으로 옮긴 요수석(饒漱石)이 고강(高崗)과 반당연맹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타도당한다. 그해 9월, 진의(陳毅)가 국무원 부총리가 되고, 외교부장에 내정된다. 이 1,2년간, 화동과 상해의 1인자, 2인자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는다. 가경시는 이 짧은 몇년간 남경시위서기에서 강소성위서기로 승진하고, 1954년 가을, 가경시는 강소성에서 상해로 옮기고, 진의의 뒤를 이어 상해시제1서기, 중공중앙 상해국서기가 되어 상해의 제1인자가 된다. 그가 직면한 것은 두 가지 큰 문제였다. 하나는 1955년 4월 전국당대회기간동안 발생한 "반양사건(潘楊事件)"이었다. 상해시 부시장인 반한년(潘漢年)이 '내간(內奸)'으로 무고당한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곧이어 발생한 "호풍사건(胡風事件)"이었다. 이 두가지 대형사건은 상해에서 영향력이 컸따. 그리하여 가경시는 일부러 <<인민일보>> 부총편집장으로 발령이 난 장춘교(張春橋)를 붙잡아서, 그에게 자신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게 했다. 가경시는 최고지도자의 말에서 의도와 사고를 추리하는데 아주 뛰어났다. 그리하여 사전에 눈치를 채고 미리 고취시키고 선전하는데 과감했다. 이것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던 장춘교에 의존했다.

 

1958년 남녕회의에서, 모택동은 주은래, 진운이 모험주의에 반대하는데 대하여 심한 말을 써서 비판한다. 그는 가경시의 <<승풍파랑: 사회주의의 신사회를 가속건설하자>>라는 보고서를 주은래의 앞에 들이밀며: "너희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말했다. 주은래에게는 자아반성을 하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이예(李銳)의 말을 빌리면, 가경시는 남녕회의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인물이었다. 65세인 모택동은 말을 하면서 당시 겨우 56세의 가경시를 "가로(柯老)"라고 여러번 호칭했다.

 

모택동은 한 때 주은래를 가경시로 대체할 생각을 했었다. 마음 씀씀이가 세심한 주은래는 중앙서기처에 보내는 자아비판서에서 완곡하게 총리직무를 맡는 것이 적합한지 여부에 대한 것을 언급한다. 주은래의 재능과 명명으로 등소평이 주재한 중앙서기처는 회의에서 명백히 표시한다. 주은래의 총리직무를 바꿀 필요가 없다. 모택동은 그리하여 결국 최종결심을 하지 못하게 된다. 가경시는 비록 주은래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이때부터 자신이 모택동의 마음 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한 가지를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모택동을 따르는 것이 '승리'하는 방법이다.

 

이는 여산회의에서도 다시한번 입증된다. 여산에 오를 때, 가경시가 준비한 것은 모조리 '좌경'을 시정하는데 대한 자료였다. 모택동이 팽덕회를 비판하는 서신을 참석자에게 돌리자, 가경시는 특유의 민감한 정치감각으로 최고지도자의 뜻을 헤아려, 밤을 세워 사람을 상해로 보내어 '우파'를 비판하는 자료를 준비하게 한다. 7월 21일의 화동조 회의에서, 장문천(張聞天)은 계통적고 심도있게 대약진 이래의 '좌경'착오를 분석한다. 가경시는 회의주재자의 신분으로, 장의 발언을 책망했다. 과연, 23일, 모택동이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팽덕회등의 사람을 심하게 질책하며, '반우경'의 지시를 내린다.

 

소련공산당의 '현대수정주의'에 반대하므로, 모택동은 대약진의 좌절에서 계급투쟁으로의 전환에 관심을 보였다. 특별히 이데올로기분야의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가경시가 관심을 둔 촛점도 경제분야에서 사상문화분야로 변화한다. 1962년 8월, 모택동은 북대하회의에서 다시 한번 계급과 계급투쟁을 언급한다. 가경시는 모택동에 이렇게 진언한다: <<해서파관(海瑞罷官)>>은 옛것을 빌어서 현재를 비판하는 것이다. 만일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것이 "파구(破舊)"라면, "대사십삼년(大寫十三年)"을 고취시키는 것은 "입신(立新)"이다. 그리하여 이 '말잘듣는 학생'은 '표신입이(標新立異)하여 1963년에 '대사십삼년'의 구호를 외치게 된다.

 

1960년대초, 강청은 모택동의 '문예초병(文藝硝兵)"으로 자처하면서, 문예계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는 북경에서는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팽진(彭眞)이 그녀를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주양(周揚)등도 그녀에게 빌붙지 않았다. 북경에서 실의에 빠졌던 강청은 상해에서는 물만난 고기였다. 가경시는 이미 모택동의 관심이 옮겨갔다는 것을 눈치챘고, 강청의 중요성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장춘교를 강청의 오른팔이 되도록 한다. 강청도 상해를 '기지'로 삼았다. 나중에 문혁에서 중천에 떠오른 해같은 강청은 옛정을 생각하여 "가로"의 옛날지지를 여러번 언급하곤 했다.

 

가경시는 중공제8기5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이 되고, 1964년 제3기전인대 회의에서 국무원 부총리가 된다. 16명의 부총리중에서 서열이 6번째였다. 만일 이대로 지속되었더라면, 가경시는 분명히 모택동으로부터 더욱 큰 신임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사람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다. 1964년에 폐암이 발견되어 수술로 절개한 후, 가경시는 요양을 하게 된다. 다음해 4월 9일 성도에서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