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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홍색공주(紅色公主) 손유세(孫維世) (II)

by 중은우시 2010. 8. 7.

1963년 화극 <<두견산>>이 공연된 후, 강청은 손유세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녀에게 이 극의 개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손유세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강청을 바라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말했다. 이 극은 청년극원에서 쓴 것이고, 나는 지금 실험화극원에서 일하는데, 나보고 이 일을 하라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손유세는 강청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다.

 

강청은 계속 그녀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나는 네가 화극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는 것을 안다. 과거에 네가 감독한 <<Pavel Korchagin>>(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나)을 봤는데 아주 좋았다. 현재 우리는 합작해서 이런 화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손유세는 다시 한번 거절한다. 강청은 이렇게 또 말했다: "내가 보기에 <<두견산>>이라는 극은 분명히 문제가 많다. 우리가 잘 합작하면, 좋은 화극으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손유세는 강청에 동의하지 않았다: "극이 좋은지 아닌지는 군중들로부터 반응을 보아야 한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할지 아닐지 어떻게 아는가. 만일 어떤 곳이 잘못되었으면, 우리는 의견을 내서 고치게 하면 된다.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강청은 화를 내고 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택동이 "서양인, 죽은 사람, 제왕장상"이 문예무대를 통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련의 지시를 내린다. 강청은 이 때가 손유세를 자기편으로 만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주은래 총리가 총감독한 대형가무극 <<동방홍>>의 좌담회에서 강청은 돌연 손유세의 곁으로 가서 앉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이렇게 많은 극을 감독했는데, 문제가 없겠는가? 이번에 우리쪽으로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홍색공주는 그래도 강청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택동의 희극공작지시에 대하여, 주은래와 손유세는 의견을 교환한다. 손유세도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대경유전을 생활에 도입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주은래는 아주 기뻐하였다. "해봐라. 좋은 사내, 좋은 여자라면 뜻을 사방에 두어야 한다."

 

사실, 주은래는 이 양녀의 예술공작을 계속하여 지원해왔다. 한번은 손유세가 주은래의 조카 주병덕과 주은래부부를 보러 갔다. 주은래는 두 여자에게 열심히 노력하여 파금의 명작 <<가>>를 이미 36페이지까지 읽었다고 말했다. 두 여자는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36페이지 읽었냐고 시간이 너무 적다고 웃었다. 주은래는 손유세에게 말했다: "나는 먼저 파금의 원서를 읽고, 그 다음에 극본을 읽고, 다음에 영화 <<가>>를 본 후에 삼소야를 연기하는 연기자가 바로 과거에 연장(連長)을 연기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연기한다면 그보다 잘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은퇴하면, 나는 연기를 하겠다. 총리가 은퇴하면 연기할 수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내가 선례를 만들겠다. 나는 연기는 괜찮은 편이다. 감독을 하려면 너에게 배워야 겠지만...."(주병덕 <<나의 백부 주은래>> 요녕인민출판사. 2008년판)

 

1966년초 손유세의 창작화극 <<처음 떠오르는 태양>>을 북경에서 공연했다.

 

막이 열리면서, 관중들의 앞에는 아름다운 유전이 나타났다. 극장은 박수소리로 가득했다. 이것은 과거 무대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사람의 생활에 가까운 이런 광경으로 일반 중국노동자의 생활을 그려낸 것이다. 그리하여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은래, 섭검영등 중앙지도자들도 극을 본 후에 높이 평가했다. 이 극은 신속히 북경에서 퍼져갔다. 주은래는 전체 공연자들과 사진을 같이 찍어 기념으로 남겼다. 손유세는 이 사진을 아주 아꼈다. 그것은 부친으로서 총리로서 자신의 일에 대한 인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알았으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강청은 사람을 보내어 손유세에게 통지한다. 중요한 일로 상의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청이 직접 손유세를 찾아온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손유세에게 말한다: "<<처음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이것은 아주 성공적인 화극이다. 수도의 많은 관중의 환영을 받았다. 한가지 생각이 있는데, 이 화극을 현대경극으로 고치고 싶다. 그러려면 두 사람이 잘 협력해야 한다."

 

손유세는 그 말을 듣고 즉각 답변하지 않았다. 강청은 손유세에게 잘 생각해보라고 하고, 며칠 후 다시 그녀를 찾았다.

손유세는 이때 강청에게 말한다: "다시 나를 찾아오지 말라. 내 생각에 이 화극을 현대 경극으로 고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손유세가 계속 거절함에 따라, 강청의 마음 속에는 원한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문혁때, 손유세에게는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두 가지 연이어 발생한다.

 

손유세의 오빠인 손앙은 주덕 총사령관의 비서를 지냈다. 전우의 아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슨 전투에서건 주덕은 항상 손앙을 곁에 두었고, 손앙이 자신의 곁에서 문화를 배우고, 군사를 배워서 하루빨리 성장하도록 하였다. 건국후에 손앙은 주덕을 떠나, 중국인민대학 부교장이 된다. 그는 주덕의 곁에서 여러해동안 일을 했으므로, 주덕의 여러가지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주덕전>>을 쓰는데도 참가한다. 그러나 이 <<주덕전>>대문에 손앙에게는 살신지화가 미친다.

 

장춘교(張春橋)는 문혁대 이 책을 본다. 그리고는 이 책이 주덕이라는 대군벌을 개국원수로 그렸다고 욕을 한다. 또한 이는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개국원수는 모택동이고, 주덕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했다. 장춘교는 이 책의 저자들을 조사하도록 명령한다.

 

어떤 저자는 반성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이 '대독초'를 쓴 것이 잘못이라고.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새사람이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손앙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바로 이 역사의 당사자이고, 가장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잘못쓰지 않았다. 그는 주덕을 위하여 글을 남기는 것이 역사적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장춘교는 대학의 조반파를 동원하여, 손앙에 대한 비판투쟁을 시작한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성격의 손앙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결국 사인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손유세는 이 소식을 듣고 아주 참기 힘들었다. 엣날에 부친이 희생당하고, 백색테러하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제와서 그가 이런 무리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더욱 잔혹한 일이 한걸음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1967년 12월의 어느 날, 손유세와 김산의 집에는 돌연 노크소리가 들였다. 방문을 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공안요원'이라고 하면서 중요한 일로 김산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김산은 지하투쟁을 한 경험이 있어, 놀라지 않고, 일어서서, 거울 앞에서 평상시처럼 자신의 머리를 빗었다. 그 후에 몸을 돌려 손유세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들과 나갔다 오겠다. 집안에서 조급해하지 말라. 아무일 없을 것이다."

 

손유세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멀거니뜨고 '공안요원'들이 자신의 남편을 데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지 않아 외부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김산은 특무협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손유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안에서 고통스럽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알았으랴, 김산은 이렇게 잡혀간 후 강청등이 설치한 감옥 속에 꼬박 7년간 갇혀 있게 될 줄은. 이 '공산당의 대특무'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이미 그녀의 아내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

 

1968년 3월 1일 심야, 손유세의 집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유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자동차는 바깥에서 여러번을 돌다가 멈추었다. 손유세는 컴컴한 방안에 갇혀서 밤새도록 심문을 받았다.

 

손유세를 체포한 것은 공안기관이 아니었다. 공군부대의 현역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섭군의 지시에 따라 손유세를 붙잡은 것이다. 섭군은 강청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주은래가 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은 손유세를 진성감옥에 가두지 않고, 군대에서 관리하도록 하지 않고, 북경시공안국의 비밀간수소에 가두었다. 손유세는 '손위사(孫僞士, 중국어 발음은 순웨이스로 손유세와 같음)'로 바구고 '관사대상(關死對象)'이 된다. 감금된 그 날부터 손유세는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손유세 집안의 모든 서신은 압수되었다. 거기에는 강청등이 쓴 손유세의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손유세와 모택동, 주은래등이 같이 찍은 사진도 강청에 의하여 모조리 불태워진다. 강청은 주은래가 <<처음 떠오르는 태양>>에서 극관련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만 '증거'로 남겼다. 그후 강청은 이 사진을 들고 주은래의 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손유세가 바로 주은래의 곁에 있던 늑대라고 욕하였다.

 

심문하는 사람은 처음에 손유세가 어떻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소련에서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물었다. 소련의 후르시쵸프 수정주의자가 그녀에게 무슨 지시를 했는지 물었다. 그녀가 귀국후에 어떤 파괴활동을 했는지 물었다.

 

심문자는 기세등등했고, 손유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심문하는 사람이 그녀와 주은래 및 주덕의 일을 캐물었다. 그녀는 이들의 최종목적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협력을 거부한 손유세는 '소련수정주의자의 특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힌다.

 

체포전에, 손유세는 여동생 손신세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작은 인물이다. 죽어도 관계없다. 총리는 당과 국가에 관계되니, 우리는 총리를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

 

손유세는 여동생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문제를 확실히 할 수가 없다.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죽지 않겠다. 내가 만일 죽으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지 말라. 그것은 분명히 살해당한 것이다." 감옥에서, 손유세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강골이었다. 심문자는 분노하여 참혹하고 비인간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여러해 후, 일찌기 함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은 깊은 밤만 되면, 한 여수감자의 불굴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벌판위에서

그 푸르른 작은 물가에

두 그루의 아름다운 백양나무가 자라고 있네,

이 곳이 우리의 아름다운 고향

나이든 모친은 마을 앞에 서서,

아들은 전쟁터로 보낸다.

아름다운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적들과 피흘리며 싸워야 한다.

 

손유세가 체포된 후, 주은래는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찾는다. 그래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다.

 

1968년 10월 14일, 손유세는 오각루에서 죽는다. 이날은 바로 그녀가 김산과 결혼한 18주년 되는 날이다. 죽은 후에 손유세의 온몸은 상처로 뒤덮이고, 차가운 수갑으로 그녀의 사지는 꽉 묶여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녀의 머리에 길다란 못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1968년 10월 17일, 주은래는ㄴ 손유세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는 등영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문혁'동안 대국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은인자중하던 국무원총리는 결국 분노를 폭발시킨다. "(손유세)가 자살인지 살인멸구인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부검하여 사인을 밝혀라"

 

그러나 강청일달은 주은래 총리의 지시를 무시하고, 손유세를 '반혁명'으로 몰아서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도 남기지 않는다.

 

40년전, 손유세의 부친 손병문은 장개석의 밀명으로 상해에서 참형을 당한다. 사형을 받기 전에 그는 "나는 오늘 취의(就義)하는 종용(從容)하다"고 소리친다. 모친 임예는 비통함을 참고 아들에게 당부한다: "천애의 어린 아들 딸에게 남기는 말이다. 피의 원한을 가을바람에 날리지 말라(寄語天涯小兒女, 莫將血恨付秋風)0" 40년후, 참혹한 비극은 다시 열사의 딸에게 닥친다. 흉수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이다.

 

지금 다시 40년이 흘렀다.그런 누가 '혈한'과 '추풍'을 기억하겠는가?  아마도 손유세라는 이름조차 일찌감치 연기처럼 흩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