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심국범(沈國凡)
"문혁"대 사회에는 이런 소문이 돈 적이 있다. 강청(江靑), 섭군(葉群, 임표의 부인)일당이 주은래(周恩來)의 양녀를 핍박해서 죽였다.
이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와 같았다. 얼마전에 임표,강청 반혁명집단의 특별재판정때 심판원을 지낸 왕문정(王文正)을 만나본 후에 비로소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주은래의 이 양녀는 바로 손유세(孫維世)이다. 손유세와 그의 오빠 손앙(孫泱)은 주덕(朱德)의 친한 친구인 손병문(孫炳文)열사의 자녀들이다.
1922년, 손병문과 주덕은 고향인 사천에서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로 유학을 떠나서, 혁명의 진리를 탐구한다. 그해 11월, 주은래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25년, 손병문은 귀국후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을 지내고, 북벌의 준비작업에 참가한 바 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비서장을 지낸다. 1927년, 장개석의 반혁명음모를 폭로하여 4월 16일 체포되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20일 상해 용화에서 장렬하게 희생된다.
부친이 희생되었을 때, 손유세는 겨우 6살이었다. 모친 임예(任銳)는 상해에서 공산당지하공작을 수행하고 있어, 그녀의 오빠인 손앙을 데리고 있을 뿐, 나이어린 딸까지는 돌볼 틈이 없었다.
1937년, 무한의 팔로군판사처에 1남1녀의 아이들이 나타나서 판사처에 들어가겠다고 소란을 부린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혁명성지 연안으로 가서 항일에 참가하겠다는 것이다. 위병들은 그들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소개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거절한다. 나중에 남자아이는 일이 있어 떠났지만, 여자아이는 가지 않고 문앞에 서서 울고 있었다. 위병이 달래면 달랠수록 더욱 크게 울어댔다.
이때 외출하여 일을 보고 돌아오던 주은래가 마침 지나가다가 물어보게 된다.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겨우 16살이구나 너는 아직 어리니 네 아빠에게 동의하는지 물어보아라." 그런 말을 듣자 아이는 더 서럽게 울었다. "나는 아빠가 없어요. 아빠는 국민당에 총살당했어요." 주은래가 황급히 물었다. "네 아빠가 누구냐?" "손병문" 주은래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네가 소유세(小維世)지?" "나는 네 아빠의 친한 친구인 주은래이다. 너의 주아빠이다." 여자아이는 대성통곡을 한다. 바로 이 여자아이가 바로 손유세이다.
나중에 많은 제1대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손유세에게 농담하듯이 그녀는 5살때 혁명에 참가했다. 손병문이 1925년 귀국후에 먼저 광주로 갔다. 주은래가 남하하여 그와 비밀리에 접선하였는데, 특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손병문은 아직 5살이 되지 않은 손유세를 안고, 그녀의 얼굴이 자신의 등 뒤를 향하게 하고는 그녀에게 의심스러운 사람이 쫓아오는지 보라고 시켰다. 주은래, 손병문 두 사람이 앉아서 얘기를 나눌때, 그녀는 얼굴을 바깥에서 놀면서 보초를 섰다. 손유세는 어려서부터 활발하고 귀여웠다. 말도 예쁘게 했다. 어른들을 보면 아빠라고 불렀다. 주은래부부도 그녀를 딸이라고 불렀다. 그녀도 주은래 부부를 "주아빠" "소초엄마"라고 불렀다.
주은래부부는 임예의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 둘을 데리고 백색테러하에서 업무를 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손병문 열사에게도 면목이 없고, 임예에게도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가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은래는 열사의 자녀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하물며 손병문은 그가 소개하여 입당한 사람이다. 임에에게 말을 하고 손유세를 주은래 부부의 곁에 남긴다. 등영초는 병을 앓은 후에 자녀를 낳을 수가 없어서, 손유세는 주은래부부의 장상명주가 된다.
항전이 발발한 후, 조직의 안배에 따라, 임예는 아들 손앙을 데리고 연안으로 간다. 주은래 부부의 보살핌 아래, 손유세는 두 집을 오간다. 그녀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잘 모른 것이 있으면 등영초에게 물어봤고, 한밤중에 등불아래에서 등영초는 그녀를 가르쳤다.
1938년, 나이 겨우 17세된 손유세가 입당을 한다. 그녀가 이 소식을 주은래 부부에게 전하자, 주은래는 아주 기뻐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요 몇년만에, 유세가 정말로 많이 컸구나."
손유세와 주은래부부의 관계로 인하여, 그녀는 모택동의 집에도 자주 들렀다. 모택동과 강청도 당시에 그녀를 아주 예뻐했다. 1938년, 1.28항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강청과 손유세는 화극 <<혈제상해>>를 연출한다. 강청은 극에서 첩역할을 하고, 손유세는 큰딸역을 맡았다.
1939년, 주은래는 소련으로 병치료를 위해서 떠날 준비를 한다. 등영초와 이에 대하여 얘기할 때, 두 사람은 손유세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데려가려면 모택동의 동의가 필요했다. 손유세는 이를 알고 바로 모택동의 와동으로 달려간다. 모택동의 비준을 받은 후, 주은래부부는 이미 어른이 된 손유세를 데리고 붉은 수도 모스크바로 떠난다.
주은래가 소련에서 병치료를 하는 동시에, 이 딸의 미래도 생각했다. 소련은 예술을 좋아하는 나라이다. 시간만 있으면, 주은래부부는 소련친구에게 손유세를 데리고 가극을 보러 가게 하였다. 당시 많은 열사의 자녀들이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는데, 어떤 사람은 군사를 공부하고, 어떤 사람은 공업을 공부했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은래부부는 손유세가 가극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예술을 열심히 배워보라고 격려한다.
그리하여, 손유세는 모스크바 희극학원 연기과와 감독과에 다닌다.
손유세가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는 동안, 젊은 팔로군장군을 알게 된다. 그는 바로 항일명장 임표이다.
임표는 팔로군을 이끌고 평형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소식에 전국의 인민들이 환호했다. 그의 이름은 이로써 전국에 떨친다. 1937년 봄, 임표는 산서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다. 획득한 일본군무기와 일본군포로를 점검하고, 임표는 아주 기뻐한다. 그는 빼앗은 일본군관의 코트를 걸치고, 일본말을 타고 흥분하여 금방 끝난 전쟁터를 달려나간다. 경비원이 따라갈 틈도 없었다.
이때 전투에 참가했던 각측 부대들이 전쟁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국민당 염석산 부대의 사병들은 멀리서 일본장교모양을 한 자가 일본말을 타고 달려오자, 총을 들어 사격을 가했다. 임표는 불행히도 상처를 입었고,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경위가 달려왔을 때 그의 옷에는 이미 선혈이 배어나왔다.
1938년,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아, 임표는 소련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떠난다. 모스크바의 많은 중국열사자녀들은 임표를 초청하여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항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젊은 명장에 대하여 열사의 후손들은 모두 선망했다.
바로 이때 임표는 임유세를 만난다. 그들은 중국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임표는 손유세와 국내항전상황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손유세도 흥미를 나타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손유세는 단정하고 예쁘게 생겼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연안에서 공부할 때도 학교내에서 유명한 미인이었다. 임표는 그녀에게 호감을 나타내어, 손유세에게 청혼까지 한다. 그러나 손유세가 거절한다. 1942년, 임표는 귀국한 후에 연안에서 섭군과 결혼한다.
1946년, 손유세는 소련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주은래부부는 안전을 위하여, 그녀에게 동북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동북군정의 수뇌가 바로 임표이니, 곤란한 일이 있으면 그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한다. 손유세의 귀국은 임표의 마음에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섭군은 이에 대하여 아주 불만이었다. 나중에 손유세와 그녀의 친구 임리(林利)가 동북해방구에서 일을 하려한다는 것을 알고, 섭군은 심지어 이입삼(李立三)의 명의까지 도용하여 전보를 날린다: "손유세 동지, 당의 이익을 위하여 하얼빈에 오지 말라. 임리는 와도 된다."(임리 <<왕사쇄기>> 중앙문헌출판사 2006년판), 손유세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동북으로 가는 것때문에 그녀의 운명에 시한폭탄이 장착되리라는 것을.
1949년 가을, 북경성은 햇살이 찬란했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인 모택동은 소련방문을 결정한다. 부인 강청도 따라가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한다. 일찌기 소련에 유학한 바 있는 손유세는 모택동의 소련방문시 통역조 조장에 임명된다. 그녀는 동시에 방문중의 모든 기요업무를 맡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부러워했다. 주은래는 출발전에 양녀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며, 일을 잘하라고 당부한다. 손유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에서 돌아온 후 강청이 손유세를 찾는다. 그녀에게 모택동방문의 상황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손유세는 거절한다. 그녀는 강청에게 이는 국가기밀이므로 얘기해줄 것이 없다고 한다. 그후 손유세는 건국초기에 중남해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몇 안되는 여성중 하나가 된다. 평상시에 그녀가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도 중앙지도자들이나 경위들이 막지 않았다. 손유세는 그 시대에 모두 부러워하는 "홍색공주"였다.
강청이 나중에 손유세에게 말한다. 너는 총리의 딸이고, 나는 주석의 부인이다. 우리가 연합하면 힘이 커질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 손유세는 이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천진했다. 중남해에 살고 있는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은 모두 주은래부부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좋아했다. 무슨 '상대'할 것이 있단 말인가?
건국후, 주은래 부부는 손유세가 배운 전공을 고려하여, 그녀를 중국청년예술극원에 보내어 일하게 했다. 나중에 다시 업무상 필요에 따라 중앙실험화극원으로 전보시킨다. 그녀는 금방 보통의 감독에서 총감독, 부원장으로 승진한다. 손유세는 1950년대 가장 우수한 예술가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외국명극 <<일복이주>>, <<여점주>>를 번역하고, <<Pavel Korchagin>>, <<문성공주>> ,<<마란화>>등 영향력있는 극들을 감독했다. 동시에 다른 예술가들과 공동으로 중앙실험화극원을 창립하였다. 그녀의 이런 업무에 주은래 부부는 아주 기뻐한다.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 '홍색공주'가 연애에 대하여는 아주 고집이 세고 집요했다는 것이다.
청년예술극원에서 일하면서 손유세는 부원장을 맡고 있던 유명한 희극가 김산(金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공동으로 극도 만들고, 손유세는 감독을 맡고, 김산은 배우를 맡았다. 일을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느낀다.
일찌기 상해에 있을 때, 김산은 당의 지하공작을 한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이용하여 국민당고위층인사들과 내왕하면서, 국민당내부상황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상해의 지하당조직을 통하여 이들 정보를 보내주었다. 나중에 중경으로 가서, 김산은 많은 진보적 문예인사들과 항일선전업무에 적극적으로 종사했다. 항일주제의 희극을 많이 만들고, 경비등 여러 측면에서 주은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주은래는 손유세와 김산의 사랑을 알게 된 후에 웃으면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네가 김산을 아느냐?"
손유세가 말했다: "매일 같이 극을 만드는데 왜 모르겠어요?"
주은래가 말한다: "설마 매일 같이 극을 만들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냐?"
손유세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주은래가 말한다: "해방전에 상해에서 김산은 매일 국민당의 일부 극원에서 돌아다녔고, 당시 국민당의 상류인사와 교분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서 해방구로 보냈다. 그들(국민당)은 아예 김산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주은래는 "네 자신의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김산에 관하여는 네가 이극농(李克農) 아저씨에게 물어봐라." 손유세가 이극농을 찾아가자, 이극농은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김산 말이냐. 우리 공산당의 대특무이다."
사실, 주은래가 이 혼사에 대하여 그다지 동의하지 않은 이유는 김산이 '공산당의 대특무'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당시에 유명한 배우인 장서방(張瑞芳)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1950년 10월 14일, 손유세는 김산과 북경청년궁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결혼식에서 손유세는 주아빠의 모습을 계속 찾아봤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소초엄마'가 나타나자 그녀는 아주 기뻐했다. 등영초는 그녀에게 말했다. 주아빠는 아주 바빠서 결혼식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선물을 하나 보내주었다. 등영초는 그 자리에서 작은 봉투를 연다. 결혼식에 참가한 친척친구들이 호기심에 둘러싸서 바라보았다.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봉투 안에는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남달리 총명했던 주은래는 자신의 딸에 대한 여러가지 말을 그 속에 담았던 것이다.
손유세가 더더구나 생각지 못했던 것은 강청이 돌연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녀는 모안영, 모안청, 이민과 이눌을 데리고 3대의 차량을 몰고 나타났다. 1930년대에 함게 문예계에 있었던 옛동지들을 강청은 본체만체 했었다. 오직 손유세에 대하여는 "너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았느냐?"고 다시 한번 손유세가 모택동과 함께 소련방문한 일을 추궁했다. 일찌감치 자신의 사업, 추구, 생활이 있던 손유세는 강청이 이처럼 옛날 일을 들먹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떠날 때, 강청은 손유세에게 꽃을 수놓은 이불보를 선물한다.
김산은 유명한 배우이다. 일찌기 1930년대에 상해에서 진보문예활동을 할 때 강청과 교분이 있었고, 강청의 상해에서의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손유세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이 사랑을 쫗은 혼인이 그녀의 운명에 또 하나의 '시한폭탄'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문혁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은래의 총리지위를 위협했던 두 인물 (0) | 2011.03.21 |
---|---|
홍색공주(紅色公主) 손유세(孫維世) (II) (0) | 2010.08.07 |
가경시(柯慶施): 주은래의 총리직을 대체할 뻔했던 인물 (0) | 2010.01.18 |
소림장군(少林將軍) 허세우(許世友)의 세번의 혼인 (0) | 2009.10.30 |
모안영(毛岸英)은 어디에 묻혔는가? (0) | 2009.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