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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리베리가 중국황제의 후손인가?

by 중은우시 2010. 7. 14.

글: 모패기(毛佩琦)

 

1년전, 한 '독일매체'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바이에른 뮌헨의 미드필더인 프랑스 축구스타 리베리가 중국혈통을 지녔고, 그것도 중국황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리베리의 가족에는 일찌기 중과 거지를 지낸 사람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리베리도 이 일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리베리의 한 당형이 중국역사를 연구하다가 가족에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중국 명나라때 명태조 주원장의 경력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다음으로 그 '독일매체'는 놀라운 몇가지 근거도 제시했다; 리베리의 조상중에는 황제에 오른 후 얼마되지 않아, 친척에게 황제위를 빼앗기고 페르시아도 도망갔고, 나중에 다시 프랑스까지 왔다고 한다; 리베리의 집안에는 지금도 이름을 모르는 중국의 궁중문물이 전해지고 있다; 리베리의 조상은 후손들에게 '우리의 고향은 머나먼 동방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뉴스는 확실히 놀랄만했다. 마치 수백년의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하다. 그리하여 당시 온동네가 시끄러웠다. <<명조의 그 일들>>이라는 책을 쓴 당년명월도 '하하. 이건 너무 재미있다. 자세히 보니 리베리의 모습이 주원장과 닮았다. 리베리의 광대뼈와 턱의 윤곽은 확실이 유럽사람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것같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온다. 한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이웃집 사람을 보니, 아무리 봐도 도끼를 훔친 사람같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도끼를 찾았는데, 다시 이웃사람을 보니, 아무리 봐도 도끼를 훔칠 사람같아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문제의 행방은 수백년동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돌연 누가 나타나서 자신이 바로 건문제의 후예라고 하고 적지 않은 '증거'까지 내놓다니,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정말로 자세히 보니 리베리는 주원장과 닮았다. 얼굴도 길고, 광대뼈도 높고, 눈도 깊고 코도 크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몇 가지 증거를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는 <<명사.정화전>>에는 "명성조는 혜제(건문제)가 해외로 도망갔다고 의심하고, 그의 종적을 쫓으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일찌감치 건문제가 해외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정화를 해외로 보냈겠는가? 20년간이나 찾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이제 나타났다.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다닐 때는 보이지 않더니, 돌연 축구장의 잔디밭위에 서 있는 꼴이다.

 

둘째는 역시 하나의 설인데, 주원장은 회족이라는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회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주원장의 곁에서 있던 부하들도 회족이 많다. 그의 중중손자인 명무종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금지령까지 내렸다. 회족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지 않는가. 원말 명초에 회족은 색목인이다. 색목인은 원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서 왔다. 건문제가 해외도 도망친다면 페르시아로 가고, 다시 프랑스로 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셋째는 주원장이 어떻게 성공했는지이다. 그는 홍건적에 의존하여 기반을 잡았다. 홍건적이 무엇을 믿었는가? 바로 명교이다. 명교는 원래 마니교이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처음 창립되었다. 당나라때 비로소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주원장은 명교를 잊지 않았고, 나라의 이름도 대명국이라고 한다. 그들의 가족이 이런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 자손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페르시아로 도망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제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리베리의 조상중 중과 거지를 지낸 사람은 주원장이다. 리베리의 조상중에 황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 친척에게 빼앗긴 사람은 건문제이다. 주씨집안은 원래 색목인 회족이다. 마니교와 관계가 밀접하다. 그리고 페르시아로 도망갔다. 나중에 다시 프랑스까지 간다. 리베리의 집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이름도 모르는 중국궁중눔물도 있다. 리베리의 조상이 남긴 말도 있다. 우리의 고향은 머나먼 동방이다. 등등 이것들이 모두 증거가 된다. 다시 리베리의 모습을 보자. 주원장과 많이 닮았다. 건문제의 행방이 확인되었다. 수백년간 떠들면서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 이렇게 해결된 것이다. 그렇게 많은 문인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사실, 리베리의 집안가족내력에 관한 전설은 그저 옛날 신화의 새로운 버전일 뿐이다. 유사한 전설은 수도없이 많다. 적지 않은 이야기는 책으로도 만들어졌고, 상세하게 논증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고증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수백년이나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지자천려필유일실. 돌연 <<중국체육보>>의 편집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내가 독일의 친구들에게 관련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독일과 프랑스의 주류매체는 유사한 보도를 언급한 적이 없다. 더더구나 리베리가 중국인의 후예라는 직접적인 증거자료는 발견되지도 않았다."

 

아. 이렇게 끝났다. 금방 했던 논증은 모두 헛짓이었다. 모든 증거가 모래성과 같다. 천고의 수수께끼를 해결한 줄 알았는데, 헛고생만 한 것이다. 리베리가 무슨 중국황제의 후손이란 말인가, 아예 그런 일은 없었다.

 

건문제의 행방은 왜 천고의 수수께끼가 되었는가?

 

이것을 이야기하자면 6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초의 건문제행방에 관한 기록은 정난지역의 당사자인 명나라 관방이 인정하는 사서인 <<명태조실록>>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황상(연왕 주체, 영락제)이 멀리 궁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급히 환관을 보내어 구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환관은 불 속에서 시신을 끄집어 냈다. 그리고 황상에게 아뢰었다. 황상은 곡을 하며 말했다: "과연 이렇게 멍청하단 말인가? 내가 온 것은 너를 잘되게 도와주려는 것이었는데, 너는 그것을 헤아려주지도 않고, 이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임신년에 예를 갖추어 건문제를 장사지낸다.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3일간 조회를 걸렀다."

 

<<명태조실록>>은 주체의 손자인 명선종이 명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는 주체가 일으킨 정난지역의 목격자였다. 다만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보호해야 했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 책을 썼다. <<실록>>의 기록대로라면, 건문제는 이미 불에타 죽었고, 장사까지 지냈다. 그러나 누가 그 장례식을 보았는가? 묘는 어디에 있는가? 확실히 <<명태조실곡>>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저 천하인들에게 말한 것일뿐, 주체 본인조차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문제가 도망쳤다고 하려면 역시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 만일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주체는 분명히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절대로 아무데나 나돌아다니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조정도 건문제의 행방을 몰랐던 것같다. 살아있다면 사람을 찾고, 죽었다면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이렇게 하여 건문제의 행방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조정에서 건문제의 생사를 몰랐기 때문에, 민간에서 전설도 갈수록 많아졌다. 30여년후에는 기괴한 일이 일어난다. 멀리 광서의 한 절에서, 한 노화상이 스스로 건문제라 칭한다. 현지 정부는 서둘러 그 노화상을 북경으로 압송한다. 이것은 명영종 정통5년의 일이다. <<명영종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통오년, 십일월 정사일, 한 승려가 나이가 구십여세인데, 스스로 운남에서 광서로 왔고, '나는 건문제이다. 장천사가 나에게 40년간 고생을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기간이 찼다. 그러니 환국할 때가 되었다.' 잠영은 그를 경사로 보낸다. 그를 국문하니, 성명이 양응상이고, 흠주사람이었다. 홍무17년에 승려가 되었고, 남경,북경,운남,귀주 및 광서를 돌아다녔다. 황상은 금의위에 명하여 죽이게 하였다. 같이 모의한 승려 12명은 모두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이것은 사기사건이다. 심문을 거쳐서 분명해졌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도 없다. 건문제는 홍무10년에 태어났으니 명영종 정통5년이면 63세에 불과하다. 그런데 노승은 스스로 구십세라니 이는 거짓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다.

 

그러나, 양응상의 사기사건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소식은 날개달린듯이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여기에 근거하여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궁안의 환관들에게 확인을 하도록 시켰더니, 건문제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건문제는 궁안에서 살았고, 노불이라고 불렀으며, 사망한 후에는 북경 서산에 묻혔다. 그의 묘는 천하대사지묘라고 적어놓았다.

 

사실 이런 전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통5년에 건문제가 살아있었다면 아직 63세에 불과하고, 옛날 신하들도 많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건문제를 보지 못했을 뿐아니라, 천하대사지묘라는 것도 본 사람이 없다. 만력년간에 이르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수보 장거정은 이미 건문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명신종이 그에게 이 일에 관하여 물었는데,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민간에서는 건문제의 행적에 대하여 더욱 신비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이야기는 갈수록 완비되고, 건문제에 관한 서적도 속속 나타났다. 정제의 <<종망수필>>, 허중빈의 <<치신록>. 등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모순이 많았고,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았다. 이런 상황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지속된다.

 

건문제의 행방불명후 삼백년이 지난 후에 청나라사람들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명사>>를 편찬하면서, 기록이 혼란스럽게 나타난다:

 

"곡왕혜와 이경륭이 반란을 일으켰고, 연왕의 병사를 받아들인다. 도성이 함락되었다. 궁중에서 불길이 솟았고, 황제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연왕은 환관을 보내어 황제와 황후의 시신을 불 속에서 꺼내게 했다. 팔일이 지나 임신일에 장사지낸다. 혹은 황제가 지하도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짧은 오십여자의 글자에서 세가지 모순된 내용이 나온다.

첫째, 행방을 모른다.

둘째, 불에 타 죽었다.

셋째, 지하도로 도망쳤다.

 

민간에는 건문제에 대한 전설이 갈수록 늘어났다. 거의 각지에서 건문제의 행적이 나타난다. 각지에는 모두 건문제의 유적이 있다.

예를 들어, 건문제는 사천 평창의 불라사에서 살았었다고도 한다.

예를 들어, 건문제는 운남 대리에서 사천 의빈 월계하로 도망쳐, 융흥에 은거했고, 사후에 융흥의 지하탑림(속칭 공산)에 묻혔다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운남 무정 사자산은 건문제가 이 산의 정속선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각의 앞에는 '승위제,제역위승,수십재의발상전,정각의연황각구,숙부질,질부부숙,팔천리망혜도보, 사산갱비연산고"라는 대련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중경시의 용흥고진에는 건문제가 이곳의 용장사에서 승려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중경시 자기구 보륜사에는 건문제가 은거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건문제는 승려로 분장하여 남경을 빠져나가는데 부흡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건문제는 먼저 소오현 보제사에 머물다가, 나중에 요광효의 도움을 받아, 궁륭산 황가암에 은거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궁륭산에 묻혔다고 한다.

 

모두 의문이 들 것이다. 이렇게 많은 유적지와 주장이 있는데 모두 틀렸다는 말인가? 명말청초의 사학자 담천의 말을 빌리자면, 담천은 건문제의 행방에 대한 주장은 23가지나 된다고 했다. 담천은 바로 이 스물세가지나 있는 것은 모두 틀렸기 때문이다. 만일 맞는다면 1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당연히 이런 전설은 확인될 수도 없고, 검증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기로 한다.

 

이외에 적지 않은 곳에는 건문제의 후손이 있다고 주장한다. 운남의 소수민족지방부터, 멀리 조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있다. 최소한 필자가 접촉해본 곳도 양(讓)씨와 하(何)씨의 두 집안이 있다. 양씨의 후인은 호북 북경에 모두 있다. 그들은 건문제가 도망친 후, 황위를 숙부인 주체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양'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민간에 은거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양씨들은 족보를 증거로 내민다.

 

하씨는 호남 상담에 있다. 상담 금석 하씨가족은 대대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상담금석하씨칠수족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 일족의 여천공은 명나라 영락이년에 예장에서 상담으로 왔다. 즉 그가 이주한 시조이다. 이런 말이 있다. 우리 일족은 명태조 주원장의 후예이고, 건문제의 난을 피휘하여 성을 하씨로 고쳤다."

 

<<상담현지>>에는 하복이 주인을 구한 이야기가 나온다. 은당 하씨의 조상은 명나라초기의 대장 하복인데, 하복은 주원장, 건문제, 영락제의 세 황제를 모셨다. 전공도 컸고 영락제때 녕원후에 봉해진다.

 

금석하씨의 후손인 하가경은 이렇게 추단한다. 금석의 주원장 후예는 실제는 건문제이다. 당시의 이름은 하필화(何必華)였다. 금천문의 변고후에 건문제는 남경을 도망쳐 나온다. 전좌군도독 하복이 건문제의 도망을 도와준다. 그는 집안 사람들을 시켜 건문제를 도망가게 해주고, 하복의 집안 사람들과 함께 건문제를 구해준 사람들은 고씨, 제씨의 선조들도 있다. 건문제는 강서 임천에 기거한 적도 있고, 영락2년에 상담 은당으로 온다. 거기서 하씨와 결혼하여, 하씨로 성을 고친다. 금석하씨의 시조이다. 나중에 하복이 건문제의 도망에 간여했다는 것이 들통나서, 자살하였다고 허위보고하고, 상담으로 몰래 도망쳐 온다. 그리고 성명을 바꾸고 은거하니 그가 은당하씨의 시조이다.

 

하가경선생이 내놓은 자료는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 그가 내놓은 결론도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건문제의 행방에 관한 수수께끼를 푼 것이 아니다. 족보는 역사연구의 중요자료이지만, 하씨족보이든 양씨족보이든 모두 나중에 만들어졌다. 이백여년의 고리가 비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금석하씨가 주원장의 후손이라고 치더라도, 그가 건문의 난을 피휘했다는 것은 건문제가 삭번한 난을 피했다는 것인지, 건문제  연간의 정난지역의 난을 피했다는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주원장의 후예가 주윤문인지 다른 자손인지도 불명확하다.

 

여기까지 얘기하자. 양씨, 하씨의 주장은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리베리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황당하다.

 

다만, 우리는 리베리가 건문제의 후손이라는 것은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건문제가 해외로 도망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느날인가 다른 외국인이 나타나서 자신이 건문제의 후손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모두 축구경기를 본 후에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생길 것이다. 아쉽게도 건문제의 행방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는 없어지지만, 원고료는 더 이상 받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다. 건문제의 행방에 대하여는 여전히 이 말이 유효하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다시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