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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당백호(唐伯虎)와 추향(秋香): 사실인가 허구인가

by 중은우시 2010. 7. 28.

글: 문재봉(文裁縫)

 

<<당백호점추향(唐伯虎點秋香)>>의 이야기는 강소,절강지역에서 500여년간이나 전해져 내려왔다. 그 내용은 당백호(즉, 唐寅)는 문징명, 축지산과 함께 오중(吳中)의 재자(才子)이고, 당백호는 특히 글과 그림에 뛰어났으며, 기품이 소탈하고, 자잘한 데 구애받지 않았다. 무석(無錫)의 명문거족 화(華)씨집안의 부인이 노비를 이끌고 꽃배를 타고 오중으로 향을 바치러 왔는데, 마침 문진명과 축지산의 요청을 받아 호구(虎丘)로 가서 유람하고 있던 당백호와 만나게 된다. 당백호는 화씨집안의 사람들 중에서 아름다운 풍모와 빼어난 기품을 지닌 시비를 보고는 그녀를 쫓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위하여 당백호는 옷을 바꾸어 입고 화씨집안에 글선생으로 들어가며, 이름을 화안(華安)으로 바꾼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그는 추향과 결혼한다.

 

그렇지만 이는 전설이야기에 불과하다. 역사상 진실한 당백호는 전설 속에서처럼 풍류남아가 아니었다. 생활은 청빈하였고, 일생동안 힘들게 살았다. 그는 젊어서, 처자식을 잃는다. 당백호는 27살때 후처를 맞이하는데, 하씨이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해 회시에서 당백호는 과거부정사건에 휘말려 송사를 겪게 된다. 나중에 당백호는 기녀인 심구낭(沈九娘)을 처로 맞이하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당백호는 이때부터 그림에 전력하여, 그림에서 큰 발전을 보인다. 당백호는 31살때부터 '천리유람'을 하여 강소, 절강, 호남, 호북, 복건, 강서등 7개성을 다니며, 빈곤한 가운데 그림을 팔아서 연명한다. 당백호는 산수화와 공필화 특히 미녀도에 능했다. 그의 필법은 수윤진밀(秀潤縝密), 소쇄표일(瀟灑飄逸)했다. '당백호그림'은 후세의 화가들이 본받는 것이 된다. 그의 작품중에 후세에 전해지는 것에는 <<기려귀사도>> <<추풍환선도>>, <<이서서도>>, <<일세인연도>>, <<산로송성도>>등이 있다. 시사산문에는 <<육여거사전집>>이 있다.

 

명나라 정덕4년(1509년), 당백호는 소주성의 북쪽에 도화오(桃花塢)를 만들어, 스스로 도화오주(桃花塢主)라 칭하며, <<도화암가>>를 쓴 바 있다. "도화오리도화암(桃花塢裏桃花庵), 도화암하도화선(桃花庵下桃花仙), 도화선인종도수(桃花仙人種桃樹), 우적도화환주전(又摘桃花換酒錢)...." 당백호의 후반생은 주로 도화오에서 생활한다. 일생중의 주요한 예술작품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당백호는 만년에 빈곤과 고통에 시달리며 54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당백홍은 추향을 처로 맞이한 적이 없는데, 왜 "당백호가 추향을 점찍어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을까? 추향은 도대체 역사상 실존하는 인물일까?

 

명나라때의 필기체소설에서 가장 먼저 당백호점추향의 이야기 원형이 나타난다. 명나라때 소설가인 왕동궤는 그의 <<이담(耳談)>>에서 또 다른 소주재자(蘇州才子) 진원초(陳元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당백호점추향과 같은 유형의 이야기이다: "진원초는 어려서 장난을 좋아하며 구속받기를 싫어했다. 자주 친구들과 호구에 올라가서 놀았다. 거기서 관리집안의 노비중에서 자색이 뛰어난 여인이 웃으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을 찾아내고는 낙백서생으로 변장하여 그 집안에서 글선생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두 아들을 가르치게 된다. 두 아들의 글이 날로 뛰어나게 되자 부친이 크게 놀라나, 진원초때문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결혼하겠다고 돌아가겠다고 하니 두 아들이 안된다고 한다. '집안에서 그대가 골라라" 그러자, '어쩔 수 없다. 추향이면 되겠다'고 한다. 바로 이전에 보았던 그 시비이다. 두 아들은 부모에게 이를 얘기하고, 추향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원초가 추향과 결혼한 후 추향은 말한다: "그대는 호구에서 만났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 '그대는 귀공자인데, 왜 스스로를 이렇게 비천하게 낮추는가?" "그대가 옛날에 웃으면서 나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그 정을 잊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명나라 말기의 풍몽룡의 손에 들어오면서 <<경세통언>>의 <<당해원일소인연(唐解元一笑姻緣)>>으로 바뀐다. 그리고 희곡에서 당백호의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명나라말기 맹칭순(孟稱舜)의 잡극 <<화전일소(花前一笑)>>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일소(一笑)"만으로는 재미가 적다고 생각했는지, "삼소(三笑)"로 발전시킨다. 이렇게 하여 왕백곡의 <<삼소연(三笑緣)>>이라는 탄사가 나오고, 탁인월의 <<당백호천금화방연>>이라는 잡극이 나온다. 건륭,가경이후, 소주의 평탄예술인 이 자주 부르는 것에는 <<삼소인연>>, <<삼소신편>>, <<삼소팔미도>>, <<소중연>>등등이 있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민간에는 <<구미도(九美圖)>>가 유행하는데, 당백호가 9명의 미인을 부인으로 거느렸다는 이야기이다.

 

추향은 역사상 실존인물이다. 당백호의 시대에 추향이라는 여자는 어느 정도 유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명문집안의 시비가 아니라, 남경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추향의 본명은 임노아(林奴兒)이고, 자는 금란(金蘭), 호는 추향(秋香)이다. 그녀는 금,기,서,화에 모두 정통하여 당시 '오중여재자(吳中女才子)"로 불리웠다. 추향은 어려서 청루에 들어와서, 나중에 청루에서 나와서 시집을 간다. 그 후에도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녀는 모두 거절한다. 거절하면서 그녀는 부채에 <<신류도(新柳圖)>>를 그려주었는데, 이러한 시를 덧붙였다:

 

석일장태무세요(昔日章台舞細腰)

임군반절눈지조(任君攀折嫩枝條)

여금사입단청리(如今寫入丹靑裏)

불허동풍재동요(不許東風再動搖)

 

명나라때의 <<화사(畵史)>>에는 "추향은 그림을 사정직, 왕원보의 두 사람에게 배웠다" <<금릉쇄사>>에서는 추향이 당백호의 그림스승인 심주(沈周)로부터 그림을 배운 적이 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심주는 명나라때의 저명한 대화가이다. 추향을 위하여 그림을 그려준 바도 있고, 시도 하나 써준 바 있다. 추향은 비록 당백호와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고증에 따르면, 추향은 명나라 경태원년(1450년)에 태어나서, 당백호보다 20살이나 많았다. 당백호가 16살에 세상에 나왔을 때, 금릉 진회하에 있던 추향과 애정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백호점추향은 후세인들이 재자가인의 풍류이야기를 그들에게 덮어씌운 것일 뿐이다.

 

문학소재로서 화태사와 실제 화태사도 차이가 있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화태사는 당백호보다 27살이나 어리다. 그의 본명은 화찰(華察)이고, 자는 자잠(子潛)이며, 호는 홍산(鴻山)이다. 명나라 가정5년(152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당시 30살이다. 화홍산은 나중에 병부랑중이 되고, 한림원 수찬이 되며 조선에 사신으로 간 적도 있다. <<삼소>>에 묘사된 상황과는 달리, 화홍산은 평소에 검소한 생활을 지냈고, 음식도 간단히 먹었다. 집안에 시비도 없었다. 그의 두 아들도 멍청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과거에 급제했다고 되어 있다.

 

왜 '진공자점추향'의 이야기가 갑자기 '당백호점추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당백호가 명나라때 태어난 소주사람이고 아주 유명하 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진원초도 역시 명나라때 소주사람이며 재자였다. 두 사람의 신분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게다가 당백호가 살았던 시절에 확실히 추향이라는 사람이 실존했었다. 명나라말기의 풍몽룡은 아마도 두 사람의 신분을 혼동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