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촉(洪燭)
만한전석은 청나라를 생각나게 한다. 부귀에서 부패로 넘어간 그 왕조를.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들어오기 전까지 아주 소박했다고 한다. 소위 궁정연회로 아주 평민적이었다. 그저 노천에 짐승가죽을 깔고 여러 명이 고기를 삶은 냄비를 둘러싸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먹는 것이다. 요즘으로 하면 캠핑하면서 먹는 것과 비슷했다. <<만문노당>>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패륵들이 연회를 베풀 때 탁자를 두지 않고, 모두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러나, 그들이 천하를 얻은 후에는 갈수록 형식을 따진다. 음식분야에서는 만한전석이 나타난다. 처음에 청나라초기에 문무대신들을 불러 연회를 열때는 만석(滿席)과 한석(漢席)
을 구분했다. 강희제는 여러 번 수천명의 노인을 불러서 천수연(千叟宴)을 열었는데, 그중 1등석은 탁자당 백은8냥짜리였다. 이런 대형 연회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한 것이다. 건륭연간에 만한전석이 민간에 전해져서 일거에 전국에 유행하게 된다.
청나라의 만한전석은 양주(揚州)가 가장 유명했다. 강남의 관청요리였다. 이두(李斗)의 <<양주화방록>>에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필자는 천식(川式, 사천식), 광식(廣式, 광동식), 악식(鄂式, 호북식) 만한전석의 요리메뉴를 살펴보았더니, 각지역마다 종류와 내용이 크게 달랐다. 그러나 모두 산해진미를 위주로 한 것은 같다. 비록 직접 맛보지는 못했지만, 요리메뉴만 보더라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선조들이여 선조들이여. 당신들은 왜 먹는데 이렇게 큰 열정을 보였고, 이렇게 많은 것을 만들어냈던가?
만주족들은 연회를 할 때 요리 하나를 먹으면 그 요리는 내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1끼의 음식이 아니라, 하루종일(아침, 점심, 저녁) 진행되었다. 어떤 때는 이틀이나 삼일로 나누어서 먹었다. 이를 보면 요리의 종류가 아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한전석은 이렇게 여러가지 요리로 심지어 며칠동안 지속되는 연회활동으로 유명하다. 해가 뜰때부터 시작하여 해가 질 때까지 먹는 것이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내일까지 먹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은 거의 먹는 기계로 바뀌는 것같다. 먹는 것이 무슨 기계적 행동처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구 먹고 마구 마시고 하루종일 먹는 방식은 물질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다. 먹는 사람이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허무하지는 않았을까?
만한전석은 대부분 궁정이나 관청에서 성행했다. 이를 보면 나중에 공금으로 마구먹는 것과 유사한 점도 있다. 이렇게 계속 먹다가는 천하를 다 먹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지는 않을까? 득의만면한 청나라왕조는 아마도 가장 먼저 식탁에서부터 부패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식탁에서 실패하고, 그 후에 전장에서 실패했다. 청나라왕조가 만한전석을 요리하고 즐기고 있을 때, 침을 흘리고 있던 서양열강은 견고한 함선과 날카로운 대포를 만들고 있었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파티는 없다. 화려하고 낭비많은 만한전석은 청나라역사와 마찬가지로 기껏해야 수백년 먹을 수 있을 뿐이다. 한때 세상에 둘도 없던 화려한 왕조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 기껏 식어버린 잔반을 남겼을 뿐이다. 후대인들은 이를 바라보면서 탄식을 하고. 소위 아편전쟁은 청나라가 황혼으로 지는 표지이다. 이는 이미 최후의 만찬인 것이다.
청나라때의 양주는 만한전석을 펼칠 수 있었다(요리종류는 134가지에 달했다). 이 점에서는 북경과 분정항례(分庭抗禮)하거나 부를 겨루는 의미도 있었다. 두 곳의 만한전석 메뉴를 비교해보니, 재료를 고르고 재료가 비싼 정도를 보더라도 양주는 북경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제비집, 샥스핀, 곰발바닥, 원숭이입술, 해삼, 전복, 낙타봉우리, 사슴꼬리, 내지 오늘날 사스로 유명해진 과자리(果子狸)까지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양주사람들이 과자리를 도대체 어떻게 요리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원래 배조각(梨片)과 함께 쪘다. 과일향이 분명히 짙었을 것이다. 양주의 만한전석의 요리방법과맛은 북경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청나라때 양주의 요리사는 아마도 황제의 위장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강희, 옹정, 건륭제들이 왜 바쁜 와중에도 여러 번 강남으로 내려왔을 것인가?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여인 이외에 맛있는 음식도 분명히 그들을 유혹했을 것이다.
양주의 항구는 풀유황제의 용주(龍舟)가 정박한 적이 있다. 양주라는 도시는, 자연히 풍류와 관련이 있다. 식색성야(食色性也, 먹는 것과 색은 인간의 본성이다). 양주의 음식문화는 아주 진솔하다. 이 옛중국의 부자동네는 맛있는 요리를 위하여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청나라때만 보더라도, 부유하기 그지없는 염상(鹽商)이 모여들었고, 양주팔괴(揚州八怪)의 시서화(詩書畵)는 그들에 의지하여 이름을 떨쳤다. 돈을 많이 주는데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풍명월을 제외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게 뭐가 있겠는가? 산해진미, 미주가인 모두 가능하다. 소위 ‘조운(漕運)이 있는 곳에 미식(美食)이 있다’는 말는 결국 경제실력에 좌우된다는 말이다. 양주의 만한전석과 같이 시찰을 나오는 왕후장상(공금으로 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들이나, 장사로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거나 허영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다. 만한전석을 차려서 고관들을 몇몇 불러 대접하면, 자그마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자신이 상류사회에 들어간 것처름 느끼는 것이다. 관료와 상인이 나뉘지 않고, 서로가 필요한 것을 얻는다. 만한전석이 양주에서 한때 유행한 것은 바로 이런 권력과 돈간의 결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최소한 멀리 있는 황제의 덕을 조금은 보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거지닭(叫化鷄)은 올리지 않는단 말인가? 양주의 부상들은 고관대작에 빌붙으려 한 것이지 비천한 거지에게 가까이 가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는 천하의 장삿꾼들이 공통으로 가진 생각일 것이다.
만한전석은 이렇게 궁중에서 민간으로 흘러들어갔다. 그것은 양주에서 순조롭게 권력에서 재물로의 연착륙에 성공한다. 알아야 할 것은, 만한전석은 처음부터 일종의 불평등한 연회였다. 한족은 그저 2품이상의 관리들만 누릴 수 있었다. 양주의 상인은 자신이 모은 돈으로 점차 이런 자격을 쟁취한다. 이두의 <<양주화방록>>에 기록된 만한전석의 요리메뉴는 처음에 건륭제가 순행할 때 양주의 지방관리들이 황제를 맞이하기 위하여 마련한 연회의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세속화’된다. ‘어선(御膳)’이 ‘방선(仿膳)’이 되는 것처럼. 양주인들은 돈을 가지게 되자, 호기심이 일었다. 황제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맛보고 싶어진다. 양주 버전의 만한전석(짝퉁?)은 사실 허영심의 성연이었다.
양주는 당시에 허영심이 아주 강한 도시였다. 음식에서도 유행을 따라갔다. 그리고 유행을 따라갈 수 있을 자금이 있었다. 필자는 양주 이후에, 점차로 천식, 광식, 악식의 만한전석(기본적으로 청나라말기에서 중화민국시대까지 유행함)이 나타난 것으로 믿는다. <<양주화방록>>에 기록된 것은 사료중 첫번째 만한전석 요리메뉴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이 연회가 “상매매가전후사관(上賣買街前後寺觀)”의 “대주방(大廚房)”에서 만든 것으로 “비육사백관(備六司百官)”용으로 준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특권계급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양주는 온갖 방법으로 이 특권을 상품화 한다. 양주인들의 비즈니스마인드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쨌든 하루종일 배불리 먹기만 하는 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주의 만한전석은 개량을 거쳐, 회양(淮陽)요리와 궁중요리를 결합시켰다. 섬세하고 담백함을 화려하고 거친 음식과 결합시켰다. 이는 마치 완약파와 호방파(‘양류안효풍잔월’과 ‘대강동거’)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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