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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음식

중국음식문화의 원죄

by 중은우시 2009. 8. 2.

글: 홍촉(洪燭)

 

중국인의 용감성은 특히 음식방면에서 드러난다. 중국인은 거의 뭐든지 다 먹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기근때는 나무껍질, 야채 심지어 관음토(觀音土)까지 먹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장정때 해방군은 쇠가죽 허리띠를 풀어서 탕을 끓여 먹었다). 평화시대에도 그들은 각양각색의 기괴하고 희귀한 음식물에 열중한다. 뱀을 먹는 것도 먹는 것이지만(서양에서는 성경에서 마귀의 화신이다), 옛날에 영남일대에서는 이름까지도 "모선(茅)"이라고 고쳐불렀다. 이는 약간 우아하게 부르는 측면과 귀를 가리고 방울을 훔치는 격(掩耳盜鈴)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갈도 먹는다.

 

필자는 북경 안정문 밖에 있는 모 식당의 주연에 참석한 적이 있다.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원탁의 중앙에 한 접시 가득 노란 색깔이 빛나는 전갈을 가득 튀겨서 내놓았다. 그 순간 나는 연상했다. 중국인의 입은 정말 '독(毒)'하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수준에 이르렀구나. 당연히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은 극독을 지닌 복을 먹는 것이다. "죽어라 복을 먹겠노라"라는 강남의 속담은 마치 열사의 절명시같다. 그래서 필자는 어려서부터 이런 인상을 갖고 있다: 생사를 도외시하는 사람으로 첫번째는 혁명가이고, 두번째는 미식가를 꼽아야 할 것이다.

 

서방세계에서, 정치가, 사상가, 예술가, 군사가등등을 제외하고, 미식가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미식가는 거의 하나의 전통이다. 비록 그것은 지금까지 "한직(閑職)"에 가까웠지만, 사람들이 아주 부러워하는 것이다. 유럽문명에서, 미식가의 자리는 한때 비어 있었다. 그들이 숭상하는 탐험가와 같이. 그렇지만 중국에 있어서, 이들 단어는 외래어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미식가도 집안을 벗어나지 않는 탐험가라고 할 수 있다고. 술잔으로 나침반을 대신하고, 젓가락으로 노를 대신하며, 자신의 미각속을 항해하면서, 마찬가지로 무한한 풍광을 느낀다. 이런 모험심리는 복의 문제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복은 중국음식문화에서 "금단의 과실"이다. 일종의 치명적 유혹이다. 그것의 아름다운 맛은 신비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과장된 측면이 있다. 미식가들은 위험하다고 하여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줄을 서서 이를 쫓는다. 이런 용기는 아마도 임무를 벗어난 아담, 이브마저도 족탈불급이라고 탄식할 정도이다.

 

신농씨(즉, 염제)는 사전(史前)의 미식가라고 할 수 있다. "신농이 백초(百草)를 맛보았다"라고 하는데, 이는 과실을 먹어서 배부르겠다는 것뿐아니라 식물의 종류, 맛, 영양가치(약용가치 포함)까지 식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후세인들의 '채소바구니공정'을 아주 풍부하게 해주었다. 필자의 상상속에서 중국인의 조상은 야채를 캐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복장, 표정은 아마도 나중에 <<본초강목>>을 편찬한 중의 이시진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짚신을 싵고, 대나무바구니를 들고, 작은 호미를 어깨에 매고 있다. 호북에는 신농가(神農架)라는 곳이 있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이곳이 그의 노천식당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앞장서서 음식을 즐겼던 신농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입은 많은 복을 놓쳤을 것이다.

 

심지어 춘추시대의 공자도 "식불염정, 회불염세(食不厭精, 膾不厭細)"를 주창했다. 그가 학교를 만들었을 때도, 현금을 받기를 좋아하지 않고, 제자들이 바치는 말린고기를 기꺼이 받았고, 이를 학비로 삼아주었다. 이를 보면 음식물은 고대의 '화폐"였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여러 측면에서 중국민족의 스승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후대의 가면갈수록 정교함을 추구하는 미식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음식발전을 문화로 끌어올려서 대아지당(大雅之堂)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중국의 음식책은 손으로 베껴쓴 필사본부터 인쇄본까지 모두 쌓아본다면, 절대로 사서오경보다 훨씬 두꺼울 것이다. 미식가들이 보기에, 이는 시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동파가 돼지고기를 굽는 비결(나중에 동파육이라고 부른다)을 "다저화, 소저수(多著火, 少著水, 불은 많이, 물은 적게)"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세련되었는가. 원목(袁牧)은 <<수원시화>>를 썼을 뿐아니라, <<수원식단>>도 썼다. 그는 젓가락을 들고 사용할 때도 붓을 휘둘러 시를 쓸 때처럼 경건했고, 붓을 놀릴 때도 젓가락을 놀릴 때처럼 호방했다.

 

당연히 시인이 먹는 모습이아 비교적 우아할 것이다. <<수원식단>>은 그저 중국인의 음식물중 극히 일부만을 드러내준다. 이외에 사치스러운 먹을 거리와 야만스러운 먹을 거리들은 고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빠져 있다. 예를 들어, 민간에 유래되고 있는 "원숭이골(活吃腦, 살아있는 원숭이를 나무틀에 가둬서 고정시킨 후, 두개골을 잘라서 열고, 보리빨대로 뇌즙을 빨아먹는다)"은 너무나 잔혹하다. 그것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중국인의 음식 속에는 일부 반문화적인 것들도 있다. 비판할 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노신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식문제는 사회의 물질문명정도를 말해줄 뿐아니라, 일정한 사회의 사회상황 및 각종 사회의 고질을 드러내준다"

 

루이스 심프슨이 쓴 <<미국시가>>에서 이렇게 읊은 적이 있다: "그것이 뭐든지 간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나의 위, 소화시킬 수 있는/ 고무, 석탄, 우라늄, 달, 시/ 상어와 같이, 뱃속에는 신발로 가득하다/ 그것은 반드시 망망한 사막을 지나가야 한다/ 계속하여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면서" 생각해보라. 고대이래의 중국을 생각해보면 나는 마치 거대한 위를 보는 것같다; 오곡 잡곡외에, 그 안에는 제비집, 샥스핀, 곰발바닥, 해삼, 호랑이뼈 등등이 있고, 심지어 우매한 연대에는 금단, 태반(胞衣), 인혈만두등등도 있다. 이는 소화능력이 놀라운 위이다. 수천년간을 꿈틀거리고 있다. 위산은 돌맹이 혹은 금속마저도 부식시킬 수 있다. 중국인의 위는 정말 너무나 크고 너무나 좋다.

 

20세기말이래로, "환경보호"는 세계적인 범위에서 갈수록 중시되는 주제이다. 중국인의 온갖 것이 다 포함된 식사메뉴는 따져봐야하고 지적해야할 점이 있다.

 

필자는 청나라의 만한전석의 요리리스트를 뽑아본 적이 있다. 거기에 용간(龍肝, 대부분은 와와어나 穿山甲으로 대체함), 봉수(鳳髓, 대부분 공작이나 비룡으로 대체함), 상피(象披, 즉 코끼리코, 물소코, 들개코로 대체하기도 함), 효자(梟炙, 부엉이구이), 사유(獅乳, 숫사자의 유방), 표태(豹胎), 성순(猩脣), 후뇌(腦), 호안(虎眼), 타봉(駝峰), 상어 지느러미와 입술, 곰의 발바닥과 쓸개, 선학(仙鶴)....심지어 백조살(天鵝肉)있다. 현재는 거의 멸종의 위기에 놓인 야생동물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다. 필자는 글자만 보고서도 거기서 피비린내가 난다고 느낀다.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우리의 그 먹기 좋아하는 조상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태위기를 가중시키지는 않았을까? 미식에 대한 쉬임없는 추구가 무형중에 그들의 잘못이 되지는 않았을까? 모두 욕망때문에 생긴 일이다. 식탐의 악영향은 현재 갈수록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전중국에서 도대체 남아있는 야생의 호랑이, 표범, 코끼리, 곰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양자악어, 와와어는 또 얼마나 남았는가?

 

조상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요리책을 덮으면서 나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이들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들에게 참회를 표시한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참회의 한 표시이다. 야생동물보호법이 나오면서, 중국인들의 식욕도 절제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 이는 무형중에 자신의 미래를 잠식하는 것이 된다. 이 유일한 지구를 잠식하는 것이 된다. 아, 인류의 원죄는 항상 먹는 것과 관련된다. 나는 일부 동물종류의 멸종이 인류가 범한 또 다른 원죄라고 본다.

 

친구 추정지가 상서(호남서부)로 갔을 때, 일찌기 식당에서 몰래 와와어를 파는 것을 보았다. 식당주인은 그에게 먹고 싶은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단연코 거절했다. 그는 돈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찌감치 사상적으로 녹색평화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만일 모든 중국인이 이같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면, 음식문화의 부작용은 제로까지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추정지는 <<먹는 것의 비열한 행적>>이라는 수필을 쓴 적이 있다. 멸종위기동물을 먹는 것은 자연히 비열한 행적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이 측면에서의 비열한 행적이 철저히 뿌리뽑히기를 바란다.

 

아쉽게도 나는 최근 남방의 어느 성에 있는 산지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듣기로 현지의 돈있는 사람들은 천산갑을 끓인 탕으로 귀빈을 대접한다고 한다. 일단 집법기관에 걸리면, 천산갑이 도로를 지나가는데 차로 들이받아서 죽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포획금지된 동물을 대접함으로써 격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의 허영심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날 밤에 나는 꿈 속에서 피를 덮어쓴 천산갑을 보았다. 악몽이었다.

 

중국인들도 개고기를 먹는다. 일의대수의 이웃나라인 한국에서는 더욱 심하다. 이것은 그다지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는 멸종위기의 희귀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미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는데 대하여 말들이 많다. 심지어 이 습관을 뿌리뽑는 것을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는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구미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것은 법률의 구속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정적인 것이다. 그들은 개는 인류의 가장 충실한 친구라고 여겨왔다. 이는 마음이 너무 여린 것이거나 혹은 멍청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한다. 인류의 영혼이 더욱 부드럽고 더욱 선량하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구미에서 동물학대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고액의 벌금을 매기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지킨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류는 양심을 밝힐 때가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