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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중산릉(中山陵)에 얼마나 돈을 썼는가?

by 중은우시 2008. 11. 6.

글: 위금계(衛金桂)

 

전에 중산릉에 올라가서 중산선생(손문)을 배알한 적이 있다. 나는 젊고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올라가는데 힘이 들었다. 아마도 날씨가 더워서인지, 진시황릉을 오르는 것보다도 더 힘이 들었다; 지난주에 글친구인 시묵 여사와 송경령(宋慶齡) 고거(故居)를 보러갔는데, 국부 손중산의 낡은 겉옷이 그 중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해외유학생이 그를 존경하여 선물한 것이었다. 국부는 일생동안 빈곤한 가운데 혁명을 위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생활이 검박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서거후에 20세기에 보기드물게 재물과 땅을 들여서 능묘를 만들어 그 안에 몸을 누이고 있으니, 이는 선생의 뜻에 어긋날 뿐아니라, 국민당일당독재상황을 기록하는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손중산이 남경 자금산을 그가 몸을 누일 곳으로 선택한 것은 그가 남경정부 임시대총통을 지내던 시기이다. 그때 호한민등과 산에 올라가서 사냥을 하면서, 자금산의 경관이 뛰어난 것을 보고는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국민들에게 땅 한조각을 얻어서, 몸을 누이고 싶다"라고 하였고, 병이 위급해졌을 때, 왕정위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 남경 자금산록에 묻으면 된다" 그는 후하게 장례를 지내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와 자손인 손과등은 중국이 당시에 빈약하다는 것도 돌보지 않고, 장소선정부터 비용지출까지 실로 놀랄만한 일을 벌였다: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쏟아부었으니, 인민의 반항까지 불러왔다. 중산릉을 선정하여 건설하는 4년동안 백은 100여만냥을 들였고, 미국에서 주문제작한 구리관에만도 1.5만냥을 들였으며, 부지를 6500여무(1무는 200평)나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 백성들의 토지 1000무도 포함되어, 백성들이 분노와 항의를 불러왔다. 예를 들면, 1925년 9월, 자금산 남록의 모 촌장은 강소성 성장에게 공문을 보냈는데: "우리들의 선조는 홍양(홍수전, 양수청의 태평천국)의 난때 비명에 죽은 바 있는데, 백년이후 다시 시신을 이장하는 참혹함을 당하고 있다...한 사람의 뼈를 묻기 위하여 만명의 묘를 파내다니, 하늘에 영혼이 있다면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백성들은 중산을을 짓기 때문에 집을 잃고 사방으로 쫓겨났고, 적지 않은 빈민의 유골은 들판에 버려졌다.

 

국민혁명에 수십년간 힘써오고, 황제제도를 무너뜨린 민주혁명가가 영원히 잠든 곳이 바로 중국최대의 제왕능의 안이 되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위하여 분투한 지도자를 위하여 건립한 묘혈이 바로 백성의 전답을 빼앗고, 백성의 분묘를 허물어서 빼앗은 땅에 지어졌다; 생전에 겉옷도 살 수 없었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백만냥이상의 은자를 썼다...이런 괴이한 현상은 중국의 심각한 정치문화와 역사문화를 반영하고, 국민당이 일당독재를 영구히 만만세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사서에서는 모두 이렇게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 국민정부는 북벌을 준비했고, 군비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등등. 필자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떤 일에는 경비가 뒷받침되고, 어떤 일에는 돈이 없고; 어떤 경우는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착취해내고, 어떤 경우에는 백성들의 자원하여 돈을 헌납한다. 중산릉을 건축하는 것과 백성들의 지원을 받은 북벌군의 조직. 이 두 가지 행위는 바로 그 양측의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