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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역사의 필연과 우연

by 중은우시 2011. 2. 6.

글: 왕립군(王立群)

 

필연성을 무시하면, 역사발전의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연성을 무시하면, 역사발전의 곡절을 볼 수가 없다.

 

역사발전은 필연적인 것이다. 봉토건국(封土建國)의 봉건제는 제국제도로 대체되고; 전제의 제국제도는 이천년간 유지된 후에 공화제로 대체되었다. 원세개이든, 부의이건, 모두 제국제도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이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오늘날, 조금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제국제도를 회복시키려는 꿈을 꾸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오늘날에도 누군가가 제국의 꿈을 꾼다면, 그는 역사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역사의 발전은 우연성이 충만하다. 필연성을 무시하면, 역사발전의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연성을 무시하면, 역사발전의 곡절을 볼 수 없다. 둘 다 무시해서는 안된다.

 

역사발전의 우연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역사발전의 우연성이고, 둘째는 역사기록의 우연성이다.

 

역사발전의 우연성도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역사사건의 발생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인물의 탄생이 우연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춘추시대의 진(晋)나라는 대국이고 강국이었다. 강대하고 통일된 진(晋)나라는 진(秦)나라의 동진을 막을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진(晋)나라의 내부에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신하의 권한이 커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한, 조, 위, 지씨등 육경세력(六卿勢力)이 왕권에 거대한 위협이 된다. 이런 신하의 권한이 커지는 현상이 진(秦)나라에서는 심각하지 않았다. 진(晋)나라는 신하세력이 커지다가 결국은 한(韓), 조(趙), 위(魏)의 삼가분진(三家分晋)이 일어나는 것이다. 강대했던 진(晋)나라는 한, 조, 위의 세 나라로 대체되고, 강대하고 통일되었던 진(晋)나라는 소멸한다. 진(秦)나라에 있어서 이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 된다. 이후, 진(秦)나라의 동진을 위한 대문은 활짝 열리게 됭ㅆ다. 비록, 진나라가 동진하는데 아직 시일이 더 필요하기는 했지만, 진나라가 동진하는 대세는 이미 형성되었다. 신하의 권력이 커지는 것은 춘추시대 역사의 필연이다. 그러나, 진(晋)나라등 소수제후국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역시 역사의 우연이다. 진(秦)나라는 자신의 원인으로 신하의 권한이 왕권을 위협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진(秦)나라가 육국을 겸병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중 하니이다.

 

핵심 역사인물의 탄생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연성을 지닌다.

 

진왕(秦王) 영정(赢政)은 중국정치제도사상 이정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역사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역사의 우연이다.

 

먼저, 영정이 진왕에 오른 것은 그의 증조부인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즉위와 관계가 크다.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이 즉위하지 않았더라면, 영정은 절대로 진왕이 될 수 없었다.

 

진소양왕의 동부이모의 형인 진무왕(秦武王)은 천재적인 역도선수이다. 힘이 아주 셌고 특히 물건을 드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대역사 맹열(孟說)과 정(鼎)을 드는 시합을 했는데, 잘못하여 다리가 부러지게 된다. 아마도 준비운동이 부족했거나, 코치의 지도가 부족했을 것이다. 이번 부상은 아주 컸고, 진무왕은 얼마후 사망하고 만다.

 

진무왕은 즉위때 아주 젊었었는데, 3년간 왕으로 있다ㅏ 죽고 만다. 그러다보니 자식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법정승계인의 자리가 비어버리게 된다. 또한, 그는 부상으로 급사하였으므로 후계자에 대하여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이제 누가 진왕이 될 것인가? 왕위를 잇는 진왕이 과연 능력있는 인물일 것인가?

 

진무왕의 사후에 그 차기 왕위를 정하는 일은 진나라궁정의 대사였다.

 

종법제의 원칙에 따르면, 진왕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진무왕의 동생들이었다. 그러므로, 후궁비빈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모두 왕위를 다툴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후궁중 자식이 없는 비빈이나, 조정대신들은 비록 자신이 왕위승계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우고자, 왕위계승전투에 뛰어들었다.

 

이때, 진나라에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3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진혜문왕의 왕후로 이때는 이미 왕태후가 된 여인이고, 둘째는 진무왕의 왕후이며, 셋째는 비록 왕실구성원은 아니지만, 큰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위염(魏)이라는 인물인데, 진혜문왕, 진무왕때 위염은 조정의 고관으로서 대권을 한손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세사람은 일정한 의사결정권이 있었다. '삼표제(三票制)'라고 할 수 ㅇㅆ다.

 

진혜문왕의 왕후, 진무왕의 왕후는 정치에 간여한 적이 없었고, 역량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이 두 표는 그저 형식적이었다. 위염은 달랐다. 그는 진혜문왕, 진무왕의 양조원로였고, 조정에서 세력이 아주 컸다. 그의 표는 세 표중 가장 중요한 한 표였다.

 

진혜문왕이 왕후, 진무왕의 왕후는 누구를 승계인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위염과 의견이 달랐다; 다만 위염이 권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이 일을 강제로 밀어부친다. 그리하여 진무왕의 동부이모동생인 영직(赢稷)을 진소양왕으로 올린다. 이때 영직은 연(燕)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영직이 새로운 진왕으로 선포된 후,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영직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대상(代相) 조고(趙固)를 연나라로 보내어 영직을 영접한다. 연나라도 여기서 뒤지려고 하지 않았다. 협조를 다하여, 영직이 순조롭게 진나라로 돌아가서 진왕에 오르도록 도와준다.

 

영직이 바로 진시황의 증조부이다. 그의 즉위는 위염이 힘을 써준 것이다. 멀리 이국타향에 있는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그의 증손자인 영정에게 역사적 기회를 부여하게 된다.

 

다음으로 진소양왕의 태자가 요절했다는 것이다.

 

진소양왕은 장수했다. 그의 태자는 이런 장기간의 태조로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부친보다 먼저 죽고 만다. 태자가 죽은 것은 진시황의 조부인 안국군에게 역사적 기회를 부여한다. 그는 태자의 지위를 물려받았고, 진효문왕(秦孝文王)이 된다. 효문왕의 즉위는 그의 형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고, 형이 죽으면서 빈 태자자리를 그가 차지앴기 때문이다. 효문왕은 정식으로 즉위한다. 그는 영정의 조부이다. 그의 즉위는 다시 한번 영정에게 기회를 만들어준다.

 

다음으로, 장양왕(庄襄王)의 의외의 등극이다.

 

효문왕이 즉위3일만에 사망한 후 이인(異人, 子楚)이 즉위한다. 효문왕에게는 이십여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조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이인에게는 후계자가 될 기회가 아예 없었다. 다행히 대상인 여불위가 이인에게 투자하였기 때문에, 이인은 성공적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효문왕이 죽은 후, 그는 진나라의 왕이 된다. 그는 영정의 부친이다. 역사에서는 그를 진장양왕이라 칭한다.

 

진나라가 육국을 겸병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행한 것도 역사의 필연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이 두 가지 역사적 사명을 완성한 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마찬가지로, 한무제의 즉위도 역사의 우연이다.

 

역사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각종 우연성을 지닌다.

 

진실한 역사와 기록된 역사는 서로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모두 '역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록된 역사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문헌'이라고 칭하며, 더욱 중요시된다.

 

사람들은 왕왕 한 가지를 잊곤 한다. 기록된 역사는 기록한 사람의 주관적요소의 제약을 받아서, 진실된 역사와 크건 작건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기록된 역사는 왕왕 어떤 우연성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사학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역사라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역사연구는 문헌기록을 중시한다. 다만, 역사연구는 문헌기록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도 안된다. 문헌기록이 없는 역사도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지켜야하는 원칙중 하나이다.

 

최근 삼십여년동안, 각종 대형공사를 착공하면서, 우리가 종전에 보지 못했던 문헌이 출토되고 있다. 그것은 21세기의 현학(顯學)이다: 출토문헌학. 출토문헌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예를 들어, 진나라때의 법령을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호지(睡虎地) 진간(秦簡)의 출토는 우리의 안목을 넓혀주었다. 특히 <<진률십팔종(秦律十八種)>>은 독특한 가치가 있다. 그러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역사문헌은 너무나 적다. 다만, 이런 국면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출토문헌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부 결론도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